편안한 자리/* 여백(餘白)

고매古梅

月波 2012. 2. 18. 19:38

 

매화梅花를 기다리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피는 꽃이 매화梅花의 참모습이지요. 봄날의 도리행화桃李杏花와 어울려 피면 매화라 할 수 있겠는지요. 옛 선비는 동지冬至에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리며 봄을 기다렸다지요. 도리행화桃李杏花와 어울려 봄날에 늦게 핀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렸다던 조선 선비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일화(*)가 생각나는 때입니다.                 - 도리행화桃李杏花 : 복숭아, 오얏, 살구 꽃

 

고매古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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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핀 매화를 도끼로 찍게 한 선비 최영경崔永慶

 

   (1) 최영경과 한강 정구 선생의 일화

정해년(1587년)에 한강寒岡 정구寒岡 선생이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최영경崔永慶 선생을 내방하였다. 이듬해 2월 최영경 선생이 한강 선생을 답방하였다. 한강 선생은 그때 백매원百梅園에 있었다. 매화가 한창 꽃망울을 터뜨려 온 좌중이 감탄하며, 감상하고 있었다. 최영경 선생은 동자를 불러 도끼를 가져와 찍어버리게 했다. 좌우에서 온통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선생은 이에 매화를 경계하게 하며 말했다. “너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단지 백설의 바위 골짜기에서 그 절조를 아낄 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복사꽃, 오얏꽃과  봄을 다투고 있으니, 네 죄가 베어 마땅하다. 말리기에 그만둔다. 이후로는 마땅히 경계할 줄 알아야 하리라.”

  - 최영경崔永慶(1529-1590), 행록行錄, 수우당실기守愚堂實記

 

   (2) 정민 교수가 들려주는 죽비소리

매화는 오얏꽃, 복사꽃과 먼저 피겠다고 봄을 다투는 꽃이 아니다. 매화는 마땅히 북풍한설이 몰아칠 때, 그 모진 눈보라 속에 피는 꽃이 아니던가. 그런데 알만하신 주인장 한강 정구 선생께서는 수백그루의 매화를 심고, 봄날 손님을 청해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매화를 매화답게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최영경 선생이 도끼를 들고 매화를 찍어내겠다고 나선 것이겠지요.

 

속으로 최영경 선생은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여보시오 주인장, 매화를 심은 까닭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어려운 시기에도 정신을 맑게 하고, 머리를 차게 해서 흔들리지 않는 기상을 기르고자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댁은 이게 뭡니까? 따뜻한 봄날에 술잔이나 돌리면서 노래하자고 매화를 심었습니까? 불러준 성의를 봐서 주인을 면전에서 준열히 꾸짖을 순 없고, 도끼로 애꿎은 매화나 찍어내야겠습니다.”

 

  (3) 이 일화를 생각하며 쓴 어느 검사의 글(*)

점심 식사 후, 한양대 정민 교수의 죽비소리라는 책을 뒤적이다가, 책 제목처럼 죽비로 한대 얻어맞았습니다. 그리고 정민 교수의 해설을 요약해 보니, 자연스럽게 매화와 우리의 처지를 빗대어 생각하게 됐습니다. 

 

요즘 우리의 처지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경찰로부터는 수사권조정과 관련해서 공격을 받고, 사개추로부터는 형사소송법 개정과 관련하여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왜 이런 처지가 됐을까요? 우리가 오얏꽃, 복사꽃과 봄을 다투면서, 매화의 본래 기상을 잃어버린 바람에 오늘 우리의 처지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번져갑니다.

 

아무리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세상의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꿋꿋하게 우리의 본래 기상을 찾고 추상열일(秋霜烈日)했으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되찾지 않으면, 주인장은 우리로 하여금 도리행화(桃李杏花)와 봄날을 다투게 하면서, 친구들을 불러, 술잔이나 돌리며 노래나 부를 것이고, 조만간 제구실 못한, 우리는 주인장에 의해 도끼로 찍혀나가 땔감이나 될 거외다.

 

 - (*) 고(故) 강영권 검사가 2005년 6월  검찰 내부 통신망의 게시판에 게재하여 검사들에게 각성을 촉구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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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최영경(崔永慶) 약전(略傳)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이고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으로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년) 7월 16일에 한양(漢陽)의 원동리(院洞里)에서 아버지 세준(世俊)과 어머니 평해(平海) 손씨(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자료는 『수우당실기(守愚堂實紀)』 2권 2책이 전한다.

(1) 수학 및 교육 : 최영경이 33세 되는 해에 이로(李魯)가 아우 보(普)·지(旨)와 함께 그의 문하에서 글을 읽었고, 58세(1587년)에는 하수일(河受一), 이대기, 김창일, 신가 등이 와서 학문을 배웠다. 최영경은 스스로를 삼가고 근면하여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2) 급문 : 최영경은 35세(1564년)에 남명선생의 명성을 듣고 서울로부터 동생 여경과 함께 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36세(1565년)에는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하였고, 65歲條), 38세(1567년)에는 이대기와 더불어 덕산의 산천재로 가서 남명선생에게서 배웠다. 이 때 김우옹도 함께 공부하였다.


(3) 과거 및 벼슬 : 최영경은 약관의 나이에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 회시(會試)에는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자기수양을 으뜸으로 하는 공부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는 44세(1573년)에 조정에서 학행으로 이른바 오현사(五賢士)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는 이조(吏曹)에서 추천하였던 것이다.

 

화담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이지함이, 남명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최영경과 정인홍이, 퇴계(退溪)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조목(趙穆)이, 일재(一齋)선생의 제자 중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발탁된 것이다. 그 후 52세(1581년)에는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이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은 때를 당하여 공론이 행해지지 않고 붕당이 왕성하여 기강이 날로 쇠하니 실로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 처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명덕(明德)으로 밝히고 위엄으로 다스려 붕당을 짓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흉계를 펴지 못하게 하소서 …… ." 그러나 이 상소는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당쟁은 더욱 거세어져 갔다.

 
57세(1585년)에는 『소학』, 『사서』 언해교정청(諺解校正廳)의 낭청(郞廳)으로 소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60세(1588년) 10월에는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는 몸이 되자 평소 그를 미워하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이 위관으로 있으면서 심한 매질을 가하여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남길 말을 청하자 일어나 앉아 바를 정(正)자를 쓰다가 획수를 다하지 못하고 임종하였다. 그는 정여립과 평생에 단 한 차례밖에 만나지 않았다. 48세 때(1577년) 독자였던 홍렴(弘濂)이 요절하여 양주(楊州)에 있는 선친 좌랑공(佐郞公)의 묘 아래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 때에 정여립이 이발(李潑)을 따라 와서 조문하였으나, 그는 정여립의 사람됨을 바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1594년에 김우옹과 그 친구들의 끈질긴 상소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특별히 선조가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4) 강학 및 교유 : 최영경은 32세(1561년)에 오건, 이조, 김우옹,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함께 서로 강마하였고(『桐谷實紀』), 36세(1565년)에는 덕산의 뇌룡사(雷龍舍)로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와 만났고, 겨울에는 정구(鄭構)와 구사재에서 주서(朱書)를 토론하였다(『竹閣集』).

43세(1572년)에는 서울에서 남명선생의 부고를 듣고 바로 달려와 제를 드리고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였다. 47세(1576년)에는 하항(河沆), 하응도, 구변, 이정(李瀞, 성여신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서원 앞 시냇가에 소나무 100여 그루를 심었는데, 최영경이 손수 심은 소나무 한 그루를 사람들은 수우송(守愚松)이라고 불렀다.

55세(1584년)에는 유성룡(柳成龍)이 영남을 시찰하면서 최영경을 만나러 만죽산으로 찾아오기도 하였고, 58세(1587년)에는 함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가 방문하여 『주례』를 강론하였다. 이듬해 봄에 최영경은 함안의 정구(鄭逑)를 답방하였다가 늦게 핀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게 하는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일화(*)를 남긴다.  (*) 행록行錄,『수우당실기(守愚堂實紀)』

(5) 향사 : 최영경은 남명선생을 위해 덕산에 서원을 건립하는 등 스승에 대한 추모사업에 진력하여 훗날 덕천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현재는 진주의 도강서당과 옥종의 수정당에서 향사되고 있다.  

□ 참고자료

崔永慶, 『守愚堂實紀』 2권 2책.
崔海甲, 「崔永慶의 生涯와 思想」, 『晋州文化』 11, 晋州敎育大學附設 晋州文化圈硏究所, 1992.
權仁浩, 「守愚堂 崔永慶의 生涯와 學問思想 硏究」, 『南冥學硏究論叢』 2, 南冥學硏究院, 1992.
編輯室, 「守愚堂 崔永慶」, 『南冥院報』 1, 南冥學硏究院, 1996.
崔寅, 「崔守愚堂先生의 靑風高節」, 『嶺右正氣』, 同硯書塾, 1996.
鄭羽洛, 「최영경 삶의 특징과 그 문학의 미적체계」, 『南冥學硏究』 9,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9.

 

출처 : 남명학연구원 南冥學硏究院  http://nammyung.org/2007/gnuboard4/bbs/board.php?bo_table=man&wr_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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