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 크로스 컨츄리

내가 딛고 일어선 것은 - 엄홍길을 만나다

月波 2007. 6. 18. 17:42

 

불수사도삼 5산종주,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삼각산(북한산)을 잇는 67Km의 산 길.

13시간 이내에 그 산을 오르내리고 이어달리는 울트라여행.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해내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한 번 해봐야지 하는 정도의 관심과 막연한 호기심으로

지난 3월 중순,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자 등록을 했었다.

 

그러나, 낙동을 시작하면서 일정이 중첩되어 5산은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낙동스케쥴이 변경되었지만, 5산에 대한 의욕을 접고 있었다.

하루 전에야 참가를 결심하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길에 나선다.

구간 연습주로 코스를 익히기는 커녕, 코스에 대한 검토도 없이 .......

출발지에서 건네주는 지도 한 장 받아들고 그를 따라 나선다.

 

67Km의 산길을 13시간 안에 달린다고? 과연 그 길이 67Km가 맞는거야?

그렇다면, 그 산길을 어떻게 13시간 안에 걸을 수 있는거야?

에라, 모르겠다. 따지지 말고 그 길에 들어보자.

5산까지는 아니어도, 불수사도 4산은 하겠지.

아니야, 4산만으로도 충분한거야. 

 

 

 

새벽4시 어둠속에 중계동의 어느 약수터에서 불암산 정상을 향해 길을 나선다.

모두들 쏜살처럼 산 길을 달리지만 그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마라톤에서는 걷지 않고 반드시 달리지만, 오늘 산에서는 절대로  달리지 않고 걷기로 합의한다.

미명속에 밝아오는 불암산 자락,

정상을 향하는 암릉구간에서 사람들에 밀려 30분이나 지체되지만 마음이 급할 것도 없다.

불암산 정상에서 점 하나 찍는다(05:15)

 

뒤따르는 사람이 몇 명 안보여도 조바심이 없다.

나는 오늘 갈 길을 모른다. 길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말한다. 자네가 앞장서서 걸어라. 따라갈테니 .....

차라리 모든 것을 맡기고 털어버리니 이렇게 속이 편한 것을 ..... 

그 길에서 만난 일출이 더욱 마음을 밝힌다.

 

 

 

덕능고개를 지나 철모바위를 오르면, 수락산 정상이 멀지 않다.(06:40)

나란히 서서 수락산 정상을 배경으로 한 컷.

사진기 들고 무슨 5산종주를 하느냐구? 

맞은 편에 우뚝 솟아 있는 도봉산,  그 왼쪽으로 삼각산의 백운대, 오른 쪽으로 사패산의 능선.

지나온 불암산을 포함해 5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밧줄타고 기차바위를 신나게 내려선다.

 

 

 

동막골을 벗어나며 만난 분당검푸의 자봉,

떡, 미숫가루, 커피, 음료수, 생수 ..... 먹는 즐거움이 산 길에 비할 바가 아니다.

회룡역을 앞두고, 청국장에 밥 한 그릇 반을 뚝딱 해치운다(08:00).

오늘 배고파 산을 못타는 일은 없을거다.

 

이제 우리 뒤를 따르는 무리는 거의 안보인다.

의정부 회룡역 근처의 시내구간에서 길을 묻고, 물어서 범골의 호암사를 찾아든다.(08:50)

호암사 구경하고 해우소(解憂所)에 들러 근심덩어리 풀어버리고 ......

다시 가파르게 사패능선을 오른다.

아침부터 날씨가 제법이다. 무덥다 못해 아침부터 푹푹 찐다.

 

호암사 뒤 능선 숲에서 만난 미녀들, 비비빅이 입안에서 사르르 ......

비비빅은 천천히 혀끝으로 느껴야 더위를 덜 탄다고? 진작 일러주지 그랬어?

오른 손 엄지를 세우며 화이팅응 외쳐주는 산행객,

안타까운듯 "꼴찌에요, 힘내세요 !"하는 아주머니,

모두 정겹다.

 

 

 

포대능선에 오르고(09:35), 사패산 정상에서 찍는 두 번째 점 하나.(09:45)

사패산에서 바라보는 도봉산, 그 장쾌함이 과히 장관이다.

참가를 주저주저했지만, 역시 산에 들기를 잘했다.

제 2포인트의 점찍는 그들은 이제 철수준비를 한다. 우리 뒤에도 몇 사람이 있는데 ......

사패산에서 포대능선을 따라 도봉산으로 향한다.

 

회룡능선, 송추능선을 좌우로 굽어보며 제 3 포인트를 향해  언덕을 치고 오른다.

쉬고 있거나 속도가 늦어지고 있는 5산종주팀 몇몇을 만난다.

그런데,앞서가던 그가 멈춰서며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더운 여름 저렇게 물 마시기 시작하면 ?????

꼭대기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하고 먼저 길을 오른다.

 

정상부의 산불감시초소에서 세번째 점을 찍는다(10:25).

그가 뒤따라와 다행이다.

제 3포인트의 그들도 우리를 마지막으로 철수를 서두른다.

아직 뒤에서 오고있는 종주팀이 있는데 .......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서두름도 초조함도 없을까?

포대능선의 망월사 갈림길, 자운봉을 향해 능선의 바위에 붙는데(10:35),

그가 뒤에서 불쑥 던지는 한 마디. "월파야, 먼저 가라. 나는더 이상 못 가겠다."

농담이겠지, 느낌이 이상해 돌아보니 그는 벌써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늘에서 바람을 쐬고,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지만 다운된 그의 기분이 업되지 않는다.

 

 

 

마음 한 구석에 도봉산까지는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조금 더 가면 어떻고, 여기서 그치면 뭔 대수랴?

그를 따라 망월사로 하산을 결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후련하다.

마음 속에 두었던 4산이 3산으로 줄었지만,

내려서는 길에 들린 망월사와 원도봉 계곡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원도봉계곡에서 막걸리 한 잔하고, 망월사역 근처의 엄홍길 기념관에 들렀다.

기념관 입구에서 "8,000m의 희망과 고독"을 이야기하는 엄홍길을 만난다. 

 " 내가 딛고 일어선 것은 좌절과 실패다"

히말라야 8,000m급 16좌 등정에 성공한 그의 한 마디는 단순한 의미를 능가한다.

 

혼이 들어 간 시(詩)이기도 하고, 오래 수행한 선사(禪師)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어느 업(業)에서 일가(一家)를 이루면, 누구든 시인(詩人)이 되고 선사(禪師)가 되는 것이다. 

 " 내가 딛고 일어선 것은 좌절과 실패다"

5산 길에서 중도하차했지만, 산에서 도(道)를 이룬 엄홍길을 만난 것은 다른 "얻음"이다.

하나를 잃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또 다른 하나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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