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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그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月波 2009. 1. 4. 15:48

 

하노이, 그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1)  호치민 정신의 허(虛)와 실(實)은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여행길에 오른다. 지난 봄의 일본 문화탐방처럼 네 식구가 함께 떠나기로 한다. 갑작스런 스케쥴에 여친과의 크리스마스가 펑크난 아들녀석의 볼이 부어 있었지만, 그는 군소리없이 가족여행에 동참한다. 안타깝지만 대견스런 그의 모습에서 듬직함을 본다. 이 번에는 크메르 왕조의 앙코르 유적을 둘러보는 역사탐방이 주 목적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아내는 1,000 여년 전의 크메르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함께 1,000년 전의 앙코르 문화를 더듬는 인문학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이다.

 

씨엠립으로 가는 길에 하노이에서 이틀을 스탑오버(Stop Over)한다. 호치민의 민족애에 근거한 정치이념을 살펴보고, 하노이에서 가까운 하롱베이의 절경을 눈에 담겠다는 의도가 담긴 여정이다. 어쩌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년 시절의 내 기억이 하노이로 가는 길을 재촉했는지도 모르겠다. 1963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다목적 판단으로 월남파병을 결정했고, 미국 주도의 그 전쟁은 수없는 목숨을 담보로 10년 이상 소모전을 지속하며 수없는 애환을 양산했다. 

 

베트남 전쟁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열강이 겨룬 식민주의 전쟁터였든, 뭘남과 월맹으로 나눠 다툰 민족적 이념전쟁이었든, 그 한 축에 어렵고 힘들던 시절의 우리 역사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는 디딤돌 중의 하나가 베트남 전쟁이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GNP를 척도로 비교하면, 당시의 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했으나 지금은 상호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격차가 크다.

 

그 차이에는 어느 길이 진정 역사와 국민을 위하는 길인가라는 정치지도자의 판단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호치민과 박정희, 두 지도자의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되, 사후의 실존적 국민생활 지수는 천장지차가 난다. 호치민과 그 백성들, 열강에 굴욕않고 독립의지를 불태웠으되 사회주의라는 낡은 이념의 틀에 얽매여 국민은 더욱 피폐해졌음을 이제서라도 느끼고 있는지? 사후에 신전도, 동상도, 무덤도 만들지 말라던 진정한 호치민의 정신은 오늘 날 찾아보기 힘들다.

 

밀랍인형처럼 사후에도 시신을 보존하고 참배객을 맞는 묘가 지구상에 다섯이 있다. 레닌, 스탈린, 모택동, 호치민, 그리고 김일성. 사회주의 체제로 오랜 세월 백성들의 삶을 탕진한 그들의 실상은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무엇이 될까? 하노이든 하롱베이든 어느 곳에서도 사회주의가 낳은 병폐를 볼 수 있다. 눈빛과 행동에서 그들의 사고와 인식, 행동을 읽을 수 있다. 김우중, 오히려 그들에게 진정한 영웅은 김우중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  하노이

          - 1010 년 : 베트남 리왕조(李王祖, 1009~1225)의 초대 통치자 리타이토(李太祖)가 수도로 정함

          - 1428 ~ 1787 : 레(黎) 왕조 때에는 통킹, 통퀸이라 불림

          - 1802 년 : 베트남 마지막 구엔(院) 왕조가 남쪽으로 천도

          - 1902 년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 1940 ~ 1945 : 일본 점령기

          - 1946 ~ 1954 : 프랑스령

          - 1954 ~ 1976 : 북베트남(월맹)의 수도

          - 1962, 1968, 1972 년 : 미국의 하노이 폭격

          - 1975. 4. 30.  : 남베트남 함락

          - 1976 ~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2)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길은?

 

처음부터 베트남은 가벼운 여행으로 생각했고 캄보디아는 인문학적 역사탐구의 여정이라 생각했으니, 하노이와 하롱베이의 일정은 그야말로 편안한 휴식이다. 옅은 안개 속의 하롱베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하노이에서는 호치민의 삶의 흔적이 있는 몇 곳을 둘러보며 그가 남긴 이념과 실상의 차이, 그리고 사후 정치세력들의 표리부동을 본다. 백성이 먼저 있었으되 그것은 구호에 지나지 않고, 이념적 우산아래 권력자외의 백성은 도탄에 빠져버린 그 실상을 본다.

 

"논에 가면 쌀이 있고 물에 가면 고기가 있다", 베트남 남부를 지배해온 넉넉하면서도, 널부러빠진 정신의 근거가 되는 사상이다.

"아오자이, 쌀국수, 오토바이", 베트남을 특징짓는 근래의 세 단어이지만 진취성과 자율성에 근거한 독립성이 보이지 않는다.

 

"월남, 월맹, 베트콩", 하노이를 떠나며 유년 시절(1960년대)에 내 기억을 사로잡았던 베트남의 땅과 사람에 대한 이름을 다시 불러 본다.

"호치민" , 남과 북의 분단이 우리와 유사했고 그 이념적 대립이 남다르지 않았던 시절에 그는 우리와 이념적 반대편에 섰던 지도자다.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미국이라는 이념적 적과 대치하면서,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았던 그의 이념적 근간에는 오로지 백성(국민)이 있었다.

 

결혼하지 않아 얽매일 가족이 없었고, 호주머니를 꿰매서 받아들일 뒷돈의 여지가 없었고, 편안한 잠자리와 사치스런 음식을 사양했기에 그는 국민의 편에 서 있었고, 사후에는 한 줌의 재로 베트남의 남, 중, 북에 골고루 뿌려지길 소원했었다. 그러나, 오늘 그가 간지 수십여년, 그 이념적 체제는 그가 원했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로 남아 있지만 진실로 그가 꿈꾸었던 국민들의 생활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자라고 성장하며 그 이념적 접근에 길들여진 시각으로 스스로가 편향될 수 있다는 점을 일정 부분 인정하더라도, 호치민의 민족주의적 좌편향 시각의 결과로 나타난 국민의 생활수준을 보면 그 이념적 접근의 명분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적 대척점에는 항상 정치지도자의 개인적 욕망이 음흠하게 자리했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념적 지향점을 포장하면서 본질을 왜곡해왔다.

 

호치민은 과연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의지에 기반한, 일신의 영달이 아닌 민족의 절대행복에 근거해서, 어렵고 고뇌에 찬 결단을 했던 것일까? 이념은 멀고 생존열망과 복지추구는 현실이다. 현실을 벗어난 이념만을 쫓는 정치는 허황되며, 절대다수의 행복이라는 미명하에 극소수의 이념적 욕구충족을 위해 다수가 희생된다. 이러한 정치는 겉으로는 잘 포장된듯 하지만 속으로는 썩어 있다. 그 정치의 짧은 지속과 영원한 몰락 사이에는 민중의 의식이 두텁게 자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베트남 남부지역에서도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그 근원은 무었인지, 현실에 기반을 둔 존경심의 근원이 있다면 그 이념적 뿌리의 깊이와 동조의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살펴볼 일이다. 한때 사회주의의 깃발아래 또 다른 정체를 구축하며 동반과 협력의 기치로 뭉쳤다가, 이제 이념적 대척점에 서 있는 캄보디아로 향하며, 호치민의 길이 진정 국민을 위한 길이었는지 되물어 본다.

 

 

 

 

 

 

 

신화를 찾아서, 크메르인의 숨결을 찾아서, 앙코르를 찾아간다.

 

 

2008. 12. 26.

베트남 하노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