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자리/* 여행(旅行)

크메르 제국, 그 앙코르 문명을 찾아서

月波 2009. 1. 4. 21:42

 

크메르 제국, 그 앙코르 문명을 찾아서

 

 

 (1)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며

 

1,000년 전의 크메르 제국, 그  앙코르 문명을 보러 길을 나선다. 오래도록 꿈꾸었으되 그 길에 드는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긴 시간을 거슬러오르는 지적(知的) 열망과 먼 길을 마다않는 동적(動的) 의지를 속으로 삭이며 때를 기다렸다. 시간과 공간을 두루 아우르는 날을 기다리며, 힌두 신화(神話)의 신비로운 세계에 흠뻑 젖는 꿈을 꾸곤했다. 앙코르는 통상의 여행이 아닌 역사탐방이라는 이름의 인문학 탐구로 점찍고 있었던 셈이다. 

 

인류에게 신화는 문화의 원류였고 시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달리 힌두 신화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생소하다. 생활 속에 신화가 생생히 살아 움직였던 1,000년 전의 크메르인들에게, 과연 힌두 신화는 어떤 의미였으며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신화의 샘물은 그들의 상상력의 바다를 얼마나 넓고 깊게 만들었으며, 그들이 지극정성으로 표현했던 건축양식에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힌두 신화가 그들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원용되었는지를 살피러, 캄보디아 씨엠립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마음 한 편에는 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킬링필드(Killing Field)와 폴 포트로 대변되는 크메르 루즈의 잔학했던 실상이 궁금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일이다. 해질 무렵의 씨엠립에는 킬링필드를 연상시키는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어둠이 그 핏빛을 덮을 때까지 작은 킬링필드를 둘러본다. 씨엠립 다운타운의 Red Bar에서 아들이 따르는 생맥주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든다.

 

 

 

 

  (2) 앙코르 와트에서

 

이튿날 아침 앙코르 와트로 간다. 11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 재임시 건축된 석조의 힌두 신전이다. 둘레가 6Km가 넘는 장방형의 해자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석조의 사원을 만들어 놓았다. 그 규모의 장대함과 표현의 정교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한마디로 신의 코드로 짓지 않으면 불가능해 보인다. 그 크기가 도저히 가늠이 안되는 방대한 신전은 신화를 재현한 조각품의 전시장이요, 회랑에 아로새겨진 신들과 무희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회랑에서 매혹적인 데바타(여신)와 압사라(무희)의 관능적 미학에 빠져든다.

 

1,000 년 전의 캄보디아에 이렇게 장엄한 문명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그 대단했던 앙코르 문명의 실체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느끼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음을 직감한다. 왜 크메르인들은 그토록 거대한 규모의 신전을, 그것도 수 없이 많은 사원을 곳곳에 지었을까? 석조 사원의 회랑에 파노라마처럼 부조된 수많은 힌두 신들과 무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광신(狂信), 그래 광신이라 부를 수 밖에 없으리라. 도대체 그 광적 믿음의 깊이는 얼마나 되었던 것일까?

 

건축적인 측면에서도 입을 다물 수 없다. 좌우동형의 완벽한 석조건축 기술, 미적으로 승화된 섬세한 건축양식, 방대하면서도 미로찾기같은 건축구조에 숨은 비밀들을 도저히 캘 수 없다. 절로 불가사의함에 젖게 한다. 힌두의 대서사시를 조각의 칼로 아로새긴 신전의 회랑을 돌며, 크메르인들의 초월적 예술성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신화에 대한 그들의 미적 상상력은 끝이 없어 보인다. 

 

앙코르 와트를 돌아나오며 힌두 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스스로를 통탄한다. 크메르 제국과 앙코르의 역사, 그들의 영적세계를 지배했던 힌두 신화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의 절대빈곤을 뼈저리게 느끼며, 안타까운 마음이다. 다음에 다시 찾고 싶지만 세상은 넓고 가고 싶은 곳은 많으니 그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만 또 다른 역사탐방에서는 좀 더 사전소양을 쌓아 준비된 길을 나서야겠다는 다짐을 할 뿐.

 

  * 데바타와 압사라,  유해교반(乳海攪泮, 젖의 바다 휘젓기, The churning of the sea milk)

앙코르 와트의 모든 벽에 마치 수를 놓은 것처럼 조각되어 있는 여신(데바타)과 춤추는 여인들(압사라)의 관능적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힌두교의 천지창조 신화에, 신과 아수라가 협력하여 1천년간 '대양의 우유바다를 저어서(乳海攪泮)' 만물이 생성된다고 적고 있다. 이 때 태어난 압사라(무희)가 6억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신화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다.

 

 

 

 

 

 

 

 

 

 

 

 

 

 

 

 

 

 

 

 

 (3) 앙코르 톰, 그외의 앙코르 유적들

 

신에 가까운 절대왕권의 힘으로 지었던 앙코르의 힌두사원은 앙코르 와트만이 아니다.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건축한 앙코르 톰 또한 그 신전 건축에 쏟은 신앙적 깊이와 넓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3,000 여개가 넘는 힌두의 신들이 등장하지만 궁극에는 창조의 신(브라만), 파괴의 신(시바), 그리고 질서유지의 신(비슈누)로 대표되고, 왕권(王權)과 신권(神權)이 일체화되면서 신과 동일시된 왕권의 힘으로 지어진 신전들이 앙코르의 동서남북에 산재해 있다.

 

피미아나카스(Phimeanakas) 사원, 하늘의 궁전이다. 뱀의 정령이 여인으로 변하여 밤마다 왕을 먼저 맞이하고서야, 왕이 왕비와 잠자리에 들게하였다는 신화도 귀에 솔깃하고, 왕들이 별자리를 살펴보고(국가대사를 먼저 살펴보고) 밤 일을 보러갔을 것이라는 문둥왕의 테라스 해설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코끼리 테라스에서 보는 전망은 일품이다. 축제나 군사행렬의 사열장답다.

 

바푸온 사원을 둘러 본다. 흙으로 만든 돌인 라테라이트로 속을 채우고, 겉에는 조각하기 쉬운 적색과 청색의 사암(砂岩)으로 신화를 아로새긴 사원이다. 오랜 세월 열대의 숲속에 숨겨져 방치되었지만, 화려했던 옛 신전의 영화를 추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황금의 링가가 잘 모셔져 있다고 하는데, 아내는 살펴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움이 큰듯하다. ㅎㅎㅎ

 

타프롬 사원의 스퐁나무, 그 나무가 석조신전의 벽과 기둥을 휘감으며 곳곳에서 신전과 씨름을 하고 있다. 치열한 생존전쟁을 하고 있다. 범어사 입구의 등운곡을 잠시 떠올린다. 그 나무의 생이 신전의 역사에 비해 턱없이 짧건만, 그 몸둥이로 신전을 휘감아 신전을 부수고 있다. 사원 보전과 스퐁나무라는 자연보호 사이의 고민이 있어 보인다. 그 해법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상생의 길로 택한 성장억제 호르몬 주사이니 아이러니하다. 사진을 찍으려고 그 나무 앞에 서니 마치 개미와 기린처럼 차이가 난다.

 

바이욘 사원, 자야바르만 7세의 말기에 힌두신의 나라에 대승불교를 처음으로 도입하며 건립한 거대한 석조사원이다. 3층의 피리미드를 이루는 웅대한 불교성전을 건축해놓았는데, 그 원형이 대부분 유지되고 있어 보인다. 거대한 석조 불탑이 54개가 있는데(실제 헤아리지 못함), 각각의 불탑에는 모두 4면으로 관세음보살상이 석조로 조각되어 있다. 합하여, 54X4=216 개의 관세음 보살상이 사원을 가득채우고 있다.

 

앙코르 톰을 비롯한 많은 힌두 사원을 세운 자야 바르만 7세가 불교식의 바이욘 사원까지 저렇게 웅장하게 지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두 사원의 병존을 보면서, 당시의 신(종교)은 왕(왕권)에게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왕이 신적 존재이고, 신은 왕의 도구였을까?

 

앙코르의 일몰을 보러 프놈바켕에 오른다. 프놈바켕은 이제는 숲으로 변한 앙코르 평원의 가장 높은 산(언덕 정도)에 자리 잡은 사원이다. 앙코르는 숲속에 잠긴채 그 머리만 슬쩍 내밀 뿐 사방이 고요하다. 오늘의 석양은 앙코르 시절의 그 화려함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석양이 물드는 프놈바켕을 뒤로하고, 저녁으로 각국 음식의 경연장을 찾았는데 압사라 무희들의 춤이 더욱 식욕을 돋군다.

 

 

 

 앙코르 톰(Ankor Thom), 피미아나카스(Phimeanakas) 궁전

 

 앙코르 톰(Ankor Thom), 코끼리테라스에서 본 사원의 흔적들

 

 앙코르 톰(Ankor Thom), 코끼리 테라스

 

 앙코르 톰(Ankor Thom), 코끼리 테라스

 

타프롬 사원의 스퐁나무(열대 무화과 나무)

 

 바이욘(Bayon) 사원

 

바이욘(Bayon) 사원 

 

 프놈바켕(Phnom Bakheng)

 

프놈바켕(Phnom Bakheng)의 일몰 

 

 

 (4) 행복은 스스로에게 있다

 

1,000 여년 전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문명을 뒤로하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열에 서있는 캄보디아의 실상을 보는 일이 남아있다. 짧은 시간 수박 겉핥기 식이 되겠지만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돌아보기로 한다. 가난함이 곧 불행일까? 그들은 어디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씨엠립을 떠나는 아침, 레스토랑 매니저의 눈빛이 순하고 맑다. Omlette을 주문하는데 Fried Egg도 권한다. 몇 일이나 머물렀으며, 언제 떠나느냐고 관심있게 묻는다. 다정스런 눈매에서 그의 순수함을 읽는다. 앙코르, 600년 왕조의 뒷그늘에서 세계 최빈국이라는 위치의 국민, 어쩌면 그는 그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영어를 제법하고, 그 정도면 그 세상에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넉넉한 지위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

 

그 젊은 매니저는 저렇게 오고가는 사람에게 정을 쏟고 있다.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식당 테이블을 찾아와 과일 디져트를 챙겨주는 그에게 관심이 간다. Dragon Food와 Pine Apple을 먹는 우리에게 손수 Water Melon을 가져와 권한다. 그의 즐거움이리라. 그것이 곧 우리의 즐거움이니 ...... 행복은 스스로에게 있다.

 

호텔 로비에서

늦잠을 잔 딸이 아침을 못챙기니 오히려 엄마가 안스러운 모습이다. 아내로서보다 어머니로서 그녀가 더 살갑다는 생각에 살짝 질투가 난다. 어머니란 딸에게 늘 저런 모습이려니 ....... 아내의 저런 마음이 곱다. 그 속에 아내의 행복이 있다.

 

씨엠립 재래시장에서

1960년대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재래시장을 보는듯하다. 공산품은 보이지 않고 거의 손으로 거두어들인 농수산물이다. 시장 사람들의 검고 야윈 얼굴에서 오히려 삶의 열망을 읽는다. 시장통의 어느 가게의 해목에 누운 아빠와 아기,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마음에 담는다. 행복, 진정한 행복이란 ..... 자기들이 알고 느끼는 그 세상에서 순진무구한 모습이 아닐까?

 

톤레삽 호수의 수상가옥 사람들

삶의 질, 그 깊이와 높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만족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기 알고 있지만, 궁핍함의 극한은 어디까지이며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행복의 근저는 도대체 어느 깊이일까? 온통 흙탕물인 호수의 물을 그대로 식수로 쓰며, 호수의 물고기를 잡아 삶을 유지하며, 앞날보다 오늘의 연명에 급한 어린 아이들을 보며, 그들이 기대고 있는 삶에 눈물이 난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서 불행의 그림자를 찾기도 어렵다. 다만 곤궁할 뿐 불행하지 않은 것이다.  행복과 불행을 보는 내 마음 속의 기준은 허상이지 싶다. 

 

 

 

 

 

 

 

 

 

 

 (5)  호치민으로 향하며

 

캄보디아를 떠나 호치민(옛 사이공)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하노이의 어제와 오늘(Hanoi Past & Present)' 이라고 부제가 붙은 사진 한 장을 유심히 들여다 본다. 도시의 4거리 대로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공존하고, 키 높은 가로수의 그림자가 길게 거리를  덮고 있다. 그 길에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슬리퍼 신은 걸음으로 대로를 가로지르는 여인과 그 그림자를 본다. 가로수의 긴 그림자와 길이를 같이하는 그 여인의 그림자는, 그 여인이 안고있을 일상의 고달픔만큼 크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

 

눈에 익숙하면서도 느낌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사진을 찍기란 단순한 기교만으로는 안된다. 사물과 사람을 보고 대하는 관(觀)이 있어야 한다. 키 높은 가로수의 긴 그림자차럼  단순한 Point of View가 아니라 내면을 읽어내는 Philosophy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어쩌면 오랜 시간 고뇌하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과정의 반복 속에 삶의 철학이 묻어나야 하는 것이리라. 

 

Inflight Magazine을 넘기다가 베트남의 사진작가 롱탄(Long Thanh)의 세계를 접한다. 특히, 그의 유명한 '비(Rain)"를 다시 만난다. 생동감 넘치는 그의 사진을 보면 사실감과 현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빛과 그림자, 그 흑백의 앙상블이 인상적이고 실체적 느낌이 절절하다.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저 실상, 그러나 카메라에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으니 ......

 

사진 속에서 평화를 찾는다고 말하는 그의 흑백사진 "비( Rain, 1987)"에 얽힌 스토리를 읽으며 편안함에 젖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노인 Thu An을 조문하러 길을 걸어가고 있던 어느 날 오후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 빗방울은 배경의 찬란한 햇빛과 분명 대조를 이루며 선명하게 다가왔다. 운좋게도 마침 그 때 두 아이가 한 우산을 쓰고 길을 건너고 있었고, 나는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Rain(비). 1987년,  by Long Thanh

 

호치민시, 사이공이라 불리던 도시다. Transit하며 공항에서 3시간 정도 머문다. 유년의 기억은 베트콩이라는 이름 속에 아스라하고, 청년의 기억은 미스 사이공의 애절한 뮤지컬로 남아 있고, 장년은 머물고 싶은 그리움에 잠시 스친다. 아내는 2~3일 머물고 싶다고 한다. 하노이와 달리 자본주의와 한결 가까웠고, 4계절 대신에 항시 더운 기후로 덜 딱딱하고 자유스러운 도시풍이다. 하노이가 유교적 성향이 많았던 곳에 프랑스풍이 가미되었다면, 사이공(호치민)은 자유주의적 분방함과 느긋함이 있는 곳이 아닐까?

 

새벽 1시 25분, 이륙을 위해 비행기가 활주로로 향한다. 5박 6일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다. 한숨자고 나면 인천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왠지 위스키 한 잔 하고 싶다. 발렌타인 한 병을 산다. 해외여행 길에 술 사본 기억이 까마득한데, 오늘은 그저 한 병 사고 싶다. 캄보디아의 인구 추정치 14백만, 통계가 제대로 없는 나라. 국가경제의 중추가 되는 30~50대가 잘룩하고, 10~20대가 인구의 대다수인 나라, 킬링필드는 과연 누구의 시나리오인가?  단지 크메르 루즈만이었을까? 다시금 되묻는다.

 

 

2008년 12월 29일(월)

캄보디아(씨엠립)을 떠나며

월파

 

 

-----------------------------------------------------------------

 

[Killing Field]

 

1차 미국의 폭격 70만~80만

2차 폴포트 정권의 대규모 숙청작업

   - 1975년 론놀 정권이 무너지고 폴포트 정권(크메르 루즈) 성립

 

1861~1954 인도차이나 반도 (잠시 일본영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호치민의 항전선언, 코끼리가 개미에게 물리는 날 있으리니 .......

1954년 프랑스군이 패전, 월맹 성립

1954년 캄보디아 독립선언(당시 프랑스가 농지정리, 잘 살았음, 한국 찢어지도록 가난

1970년 론놀 군사혁명, 군사정권 시아누크 공(왕)

1975년 론놀정권 무너지고 크메르 루즈 성립(폴포트)

1963~1975 베트남 전쟁

 

폴포트 프랑스 유학, 사회주의 이념 사상화

1975년 정권 장악, 1979년 베트남과의 전쟁 발발, 수도 프놈펜 함락, 그 이후 1997년 태국 구경으로 탈출도중 자연사할 때까지 내전

 

----------------------------------------------------------------------------

 

'편안한 자리 > * 여행(旅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왕리의 낙조  (0) 2009.02.03
영흥 측도의 해질녘 풍경  (0) 2009.01.18
하노이, 그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0) 2009.01.04
도쿄(2)  (0) 2008.05.20
도쿄(1)  (0) 200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