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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번 VS 조슈번] 삿초(薩長 : 사쓰마+조슈) 동맹과 메이지유신

月波 2014. 3. 5. 01:16

 

 

[일본 이슈] 사쓰마번薩摩藩 VS 조슈번長州藩

 

[薩長さっちょう]  : 薩摩国 vs 長門国   =   薩摩藩 vs 長州藩    

     -- 薩摩(さつま) : ① 일본의 옛지명 ② 현재의 鹿児島県(가고시마현)의 서부

     -- 長門(ながと) = 長州(ちょうしゅう) :  ① 일본의 옛지명 ② 현재의 山口県(야마구치현)

 

 

(*) 사쓰마번(薩摩藩)

사쓰마번(일본어: 薩摩藩 사쓰마한)은 일본 에도 시대 사쓰마, 오스미 2국과 휴가 국 모로가타 군(諸県郡), 사쓰난 제도 등을 지배했던 번이다. 그 지배 영역은 지금의 가고시마 현 전역과 미야자키 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었다.

 

사쓰마번은 통칭으로, 판적봉환(#) 이후의 정식 명칭은 가고시마번(鹿児島藩)이다. 번청은 가고시마 성으로 시마즈 가문이 번주로써 지배했다.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도 최고 고쿠다카가 90만 석(이것은 표면상의 고쿠다카로 실제 고쿠다카는 그 절반 정도였다)으로 가가 번에 다음가는 대형 번을 형성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걸쳐서 오쿠보 도시미치사이고 다카모리 등 다수의 유력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일본 국내의 정치를 지배한 한바쓰 정치(藩閥政治)에서는 사쓰마바쓰(薩摩閥) 라는 통칭으로 일본 제국 육군을 장악해 온 조슈 번과 함께 사쓰마번 일본 제국 해군을 장악해 오면서 유력한 일본우익 정치세력의 빅2를 형성했다. 현재의 일본 현대정치에서는 조슈 파벌의 대표로 아베 신조(*)가 있다면,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사쓰마 파벌을 대표해 오고 있다.

역대번주
01.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재위 1602년 ~ 1638년 (다다쓰네에서 개명)
02.시마즈 미쓰히사(島津光久)   재위 1638년 ~ 1687년
03.시마즈 쓰나타카(島津綱貴)   재위 1687년 ~ 1704년
04.시마즈 요시타카(島津吉貴)   재위 1704년 ~ 1721년
05.시마즈 쓰구토요(島津継豊)   재위 1721년 ~ 1746년
06.시마즈 무네노부(島津宗信)   재위 1746년 ~ 1749년
07.시마즈 시게토시(島津重年)   재위 1749년 ~ 1755년
08.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   재위 1755년 ~ 1787년
09.시마즈 나리노부(島津斉宣)   재위 1787년 ~ 1809년
10.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   재위 1809년 ~ 1851년
11.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재위 1851년 ~ 1858년
12.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   재위 1858년 ~ 1871년

 

(#) 판적봉환(版籍奉還 ,はんせきほうかん, 한세키호칸)

판적봉환(版籍奉還 한세키호칸[*])은 1869년 7월 25일, 일본의 메이지 시대 초기에 행해진 조치로, 다이묘들이 일본 천황에게 자신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반환하였던 일이다.

 

에도 막부의 소멸과 함께 메이지 신정부는 기존의 막번 체제를 고쳐 새로운 지방제도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868년 4월, 다이묘들의 영지를 번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고, 다이묘를 지사에 임명하여 그 통치를 계속 위임하였다. 그리고 막부 직할령은 신정부의 통제하에 들어가 부와 현으로 재편됨으로써, 부번현 삼부제가 확립되었다. 10월에는 번 정치를 중앙에서 통제하고 가신들의 정치 참여를 막았다. 이듬해인 1869년 1월, 메이지 유신에 공이 컸던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히젠 번이 다이묘들이 가진 번에 대한 권리를 천황에 귀속한다는 판적봉환의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같은해 5월 공의소에서 자문과 논의가 이루어진 뒤 시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신정부는 권력기반이 아직은 취약한 까닭에 각 번에 대한 강제력도 갖지 못했고, 법적인 근거도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주군과 가신의 주종관계, 세습으로 이어져 온 번의 권력을 다이묘들이 쉽게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저항이 충분히 예상되었다. 따라서 신정부 측은 공의소에서의 논의를 통해 번주 측의 동의와 양해를 구했고, 보신 전쟁에서의 공훈에 대한 은상 내역을 정함으로써 번주와 번의 가신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의 많은 번들이 만성적 재정난을 겪고 있던 터라 번의 유지에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고, 막부가 몰락하면서 그 역할을 천황이 대신한다는 사고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판적봉환의 절차는 큰 저항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결국 판적봉환을 발판 삼아 폐번치현이 이루어졌고, 부현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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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번(長州藩) : 조슈번을 대표하는 오늘 날의 아베 신조

 

역사를 거꾸로 읽고 국민 오도하는 아베

2014-03-05 / 세계일보 
 

메이지유신 이후 극우파 득세하며 日, 제국주의 폭주…
아베, 잘못 반복 말고 주변국과 협력해야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다.

아베 총리의 이름 중 ‘신(晋)’자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카스기는 아베의 고향인 조슈 출신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숨통을 끊어놓은 인물이다. 아베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상의 이름에도 ‘’자가 들어있다. 그에 대한 아베 부자의 존경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다카스기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일본을 제국주의로 몰아간 ‘정한론(征韓論)’ 주창자다. 아베 총리가 정한론자를 존경하는 것과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었다는 점은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하급무사 출신인 그는 견원지간인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이 오랜 반목과 불화를 넘어 동맹(삿초동맹)을 맺도록 하고, 메이지유신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그가 성사시킨 삿초동맹은 백제와 신라를 손잡게 하는 일에 비견할 만한 기적 같은 일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사는 가슴을 뛰게 한다. ‘서양 오랑캐를 내쫓고 국왕을 받들어 모시자’(尊王攘夷·존왕양이)는 대의명분 아래 수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그들의 헌신에 천운이 더해진 덕분에 일본은 주변국보다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중심의 봉건체제에서 일왕을 정점으로 한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이 한때 “우리는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이다”고 말한 데서 당시 메이지유신을 바라보는 조선과 중국 개혁가들의 선망 어린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 등 개명한 지사들은 일본의 근대화가 주변국과의 연대속에 진행되길 바랐다. 여론의 인정을 받는 좋은 정치를 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료마와 같은 개명파 지사들이 암살당하거나 메이지유신 이후 노선 투쟁에서 극우파들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아류 제국주의의 길로 폭주했다. 이는 일제의 침략으로 자주적 근대화가 좌절된 조선과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게도 불행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수백만의 ‘황군(皇軍)’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마리우스 잰슨의 분석은 명료하다.

그는 저서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유신’(푸른길)에서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이성적인 계획에 눈을 뜨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버렸던 메이지유신의 선각자들과, 입으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이성에 등을 돌리고 근거 없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의 불합리로 조국을 내모는 허망한 시도를 하면서 폭력에 호소한 후세의 아류들의 차이점을 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평가했다.

잰슨이 살아있다면 아베 총리에게 이런 충고를 할 것이다. 메이지유신 선각자들의 이상을 곡해한 채 ‘폭력에 호소한 후세 아류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주변국과의 협력을 통해 일본을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라고.

 

개인적으로 필자는 아베 총리가 요시무라 간이치로(吉村貫一郞)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펼쳐 보이길 기대한다.

그는 영화 ‘철도원’의 원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아사다 지로(淺田次郞)가 그의 장편소설 ‘임생의사전(壬生義士傳)’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이다. 아사다는 사료에 이름 정도 기록돼 있던 평범한 무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대의 명분의 기치 아래서 스러져간 민초들의 삶을 그려 보인다.

 

메이지유신 시대의 영웅전에 익숙한 독자라면 요시무라는 파격 무사다. 주군(또는 일왕)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앞세우며 시도 때도 없이 배를 그어대던 다른 사무라이들과 달리 그는 처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는 형식만 남은 껍데기 무사정신에 얽매이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목숨을 바칠 상대는 주군이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리는 백성이라고 외치면서. 사카모토나 요시무라 같은 무사들이 근대 일본을 주도했다면, 일본은 주변국의 존경을 받는 동북아 강국이 돼 있을 것이다. 아베 총리가 그런 나라를 만드는 데 힘쓰길 바란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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薩長さっちょう - 薩摩国와 長門国, 薩摩藩과 長州藩 
 - 사쓰마薩摩 번藩 , 현재의 가고시마鹿児島 현縣
 - 조슈長州 번藩, 현재의 야마구치山口 현縣
 
(*) てらうちまさたけ : 군인‧정치가, 육군대장‧원수, 長州藩의 武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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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아베 역사관의 뿌리 조슈長州를 가다

 

 - 중앙일보 2014년 1월 18일 
 

 

쇼인의 시골학당, 메이지유신 주역을 쏟아내다

 

 

(사진) ‘쇼인 신사’ 입구 간판. 요시다 쇼인(오른쪽)과 제자인 마에바라 잇세이 얼굴 그림. 그 앞이 필자인 박보균 대기자.

- 블로그 : http://blog.daum.net/johagnes/1893925 에서 사진 볼 수 있음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역사를 재구성한다. 침략과 팽창의 기억을 각색한다. 그 야심은 집요하다. 그의 역사 인식은 출신 지역과 엮여 있다. 그는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다. 야마구치는 일본 열도 혼슈(本州)의 남단이다. 야마구치는 옛 조슈(長州)번(藩)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일본 근대사다. 반전과 곡절의 드라마다. 그 드라마의 주요 연출·공급지가 조슈.

 

그 한복판에 불꽃의 29년 삶이 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59) -.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이론과 열정을 생산했다. 인물을 대거 공급했다. 정한론(征韓論)을 다듬었다. 이 대목에서 쇼인은 거부의 대상이다.
 
아베는 쇼인의 숭배자다. 아베가 흔드는 깃발은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재현이다. 복고(復古)의 우경화 깃발은 단순한 돌출이 아니다. 그 확신과 신념의 바탕은 무엇인가. 쇼인과 야마구치에 해답이 있다.
 

  
지난달 나는 야마구치에 갔다. 야마구치 역사의 심장은 하기(萩)시. 조슈 번의 도읍지였다. 야마구치현의 남쪽 끝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열차에 올랐다. 아베 총리의 지역구(중의원 7선)가 시모노세키와 나가토시다(야마구치 4구). JR 지방열차를 번갈아 탔다. 차창 밖에 우리의 동해가 나타난다. 2시간50분쯤 뒤 히가시하기(東萩)역에 내렸다. 인구 5만여 명. 작은 시골 도시다. 열차에서 사귄 50대 일본인 이시이(石井·사업가)씨는 단정한다. 그는 “쇼인 선생의 하기 이야기가 일본 근대사”라고 했다. 하기 관광 팸플릿은 “유신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을 소개한다. 나의 첫 추적 대상이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의 사설 학당이다. 그곳은 쇼인을 기리는 복합 공간이다. 역사관, 기념관(보물전), ‘쇼인 신사(神社)’로 짜여 있다. 경내 입구에 큰 돌비석이 있다. ‘明治維新 胎動之地’(태동지지)라고 새겨 있다. 메이지 유신 100주년 기념물이다. 글씨는 총리 시절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의 솜씨다. 사토의 고향은 야마구치다.

 

태동지는 쇼카손주쿠를 뜻한다. 메이지 유신(1868년)은 일본의 자부심이다. 일본은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다. 근대화에 성공했다. 시골 글방은 작고 조촐하다. 단층 목조다. 국가 사적지다. 돌 비석(天皇陛下 行幸啓)이 있다. 1994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방문 기념비다.
 
‘태동지’는 추앙의 표시다. 볼품 없는 글방에 그 용어가 달린 이유는 명쾌했다. ‘강의실’은 다다미 8장 반 크기(4.5평). 쇼인의 초상화, 얼굴상이 놓여 있다. 다른 벽에 얼굴 사진들이 세 줄로 걸려 있다. 쇼인과 12명의 문하생이다.
 
요시다 쇼인의 밀랍인형. 에도의 막부 감옥에 갇혔을 때다. 야마구치현 하기시 ‘요시다 쇼인 역사관’ 전시물. 그의 유언은 막부 타도의 이론과 결의를 주입했다.

 

 맨 윗줄은 구사카 겐스이(久坂玄瑞), 다카스기 신사쿠(高衫作). 대표 제자다. 오른편에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 기도는 메이지 유신의 삼걸(三傑) 중 한 명이다. 삼걸은 최고 공신이다.
 
 다음 줄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다. 메이지 시대 문무 핵심이다. 두 명 모두 총리를 지냈다. 그 옆으로 세 명의 대신(체신·내무·사법)이 이어진다. 이토는 한국 강점의 상징이다. 야마가타는 조슈 군벌의 총수다. 그는 한국 침략의 군사력과 인력을 가동했다.

 

 사진들을 살펴 가면 놀라움과 기이함이 겹친다. 메이지 유신 주역들이 쏟아져 나와 있다. 일본 근대사의 거물들이다. 일본 관광객들의 카메라 앵글이 감탄 속에 맞춰진다.

 

 쇼인의 사숙(私塾) 운영은 1년2개월. 감옥 강의까지 합치면 3년쯤(26~29세)이다. 문하생(92명) 중 대학 설립자, 철도, 선박 기술 선구자도 있다. 아베 총리는 “쇼인 선생은 3년간 교육으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작은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 태동지가 됐다”고 했다(2006년 의회 발언).

 

 이런 일이 가능할까. 호기심과 의문이 따른다. 시골 서당 한 마을 한 곳에서, 한꺼번에, 짧은 기간에, 20대 후반 스승에 의해. 쇼인의 독보적인 드라마다.

 

 천황과 쇼군(將軍) 사이, 막부의 쇼군과 번의 다이묘(大名·지방 영주) 사이, 번과 번 사이, 대외 개방과 폐쇄 사이-. 국론이 나눠졌고 사람이 갈렸다. 존왕양이(尊王攘夷·막부 타도로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친다) 기치는 거세졌다. 사무라이의 칼이 난무했다. 피가 피를 불렀다. 대란의 시대였다.

 

 메이지 유신주도 지역조슈와 사쓰마(薩摩)다. 사쓰마는 규슈 남쪽 가고시마(鹿兒島)현이다. 일본의 번들은 신무기와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인재를 경쟁적으로 키웠다. 그 모습은 조선의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달랐다. 조선은 위선적 담론, 인물 빈곤, 폐쇄, 문약(文弱)의 늪에서 허덕였다.

 

 쇼인하기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다. 수재였다. 11세 때 조슈의 번주(毛利敬親) 앞에서 병학을 강론했다. 그는 당대의 학자를 찾아 배운다. 그는 탈번(脫藩)을 했다. 번의 경계를 넘는 것은 중죄다. 그는 미국 밀항을 시도했다(24세). 실패했고 자수했다. 감옥에 갇혔다(14개월). 그는 6백 권의 책을 읽었다. 연마의 시기였다. 그는 하기의 감옥에서 『맹자』를 강의했다. 출옥 후 사숙을 열었다(28세, 1857년 11월). 소나무 아래 마을 글방(松下村塾 쇼카손주쿠)이 등장했다.
 
 쇼카손주쿠는 파격이었다. 사무라이 우선의 계급사회 시절이다.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문하생 신분은 다양했다.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문하생들의 신분 상승 의지로 작동했다. 그 시대 국민적 역량의 발굴과 확대였다. 이토 히로부미미천한 사무라이(이시가루·足輕)였다.

 

 경내 ‘지성(至誠)관’에 쇼인의 글씨가 진열돼 있다. 맹자의 가르침(至誠而不動者未之也)이 걸려 있다. ‘지성을 다하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 쇼인의 ‘지성’은 아베 총리의 좌우명이다. 쇼인은 동기 부여를 중시했다. “능력 차이가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장점이 있고 장점이 뻗으면 대성할 수 있다.

 

 쇼인은 조슈의 급진 존왕론을 발전시킨다.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으로 내세웠다. “나라는 군(천황)이 지배하며 백성은 군 아래서 평등하다”-. ‘천황 중심의 나라’로 개조하자는 것이다. 그의 막부타도론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다. 그의 사후 그 이론은 국수주의와 엮어져 악성 진화한다.

 

 
②③ 메이지 유신의 문무를 장악한 이토(위)와 야마가타 상(像). 하기시의 이토 옛집과 중앙공원에 각각 있다. ④ 지난해 8월 ‘쇼인 신사’에 참배하는 아베 신조 총리. 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걸려 있는 문하생 사진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로 차 있다.

맨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 둘째 줄 오른쪽에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맨 위 오른쪽이 기도 다카요시(유신 삼걸 중 한명).▷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858년 막부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불평등 조약이었다. 존왕양이파는 반발했다. 쇼인은 분노한다. 거사를 모의한다. 그는 역모에 연루된다. 다시 투옥된다(1858년 12월). 에도 막부로 끌려간다. 그는 암살 음모를 실토한다. 5개월 뒤 처형된다(1859년 10월, 29세). 안세이(安政)대옥(大獄)이다.

 

 그의 유서는 유혼록(留魂錄)으로 남아 있다. “몸이 무사시 들판에 썩어도 세상에 남겨지는 야마토 다마시(大和魂)”-. 야마토 다마시는 일본제국 죽음의 미학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절망적인 돌격 때 외친 구호다.

 

 유혼록은 궐기의 언어다. 비장미의 강렬한 주입이다. 제자들을 격동시켰다. 쇼인은 ‘초망굴기’를 외쳤다. 초망은 시골에 숨어 사는 필부를 뜻한다. 쇼인은 “민초의 필부여 일제히 일어서라”고 했다.

 

 그의 비원(悲願)은 열혈의 동력으로 퍼져갔다. 그의 수제자 네 명(四天王) 중 세 명은 칼에 맞거나 할복한다. 다른 한 명은 막부와 전투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막부 264년 지배가 종료됐다(메이지 유신). 그가 죽은 지 9년 뒤다. 역사소설가 후루카와 가오루(古川薰)는 『유혼록의 세계』를 썼다. 그 책은 아베의 애독서로 알려져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일 근대사 전문가다. 그는 쇼인 학당의 대량 인물 배출 이유를 이렇게 파악한다. “열린 교육의 힘이다. 조슈의 번주는 도쿠가와 막부에 쫓겨났다. 그 원한에다 가난한 하급무사들의 신분 상승 의지, 사명감의 집단적 공유 등이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쇼인은 신화가 된다. 일본 근대사에서 쇼인의 위상과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일본지역학) 세종대 교수는 “쇼인이 구축한 조슈 번의 사상적 토대가 메이지 체제의 근본을 만들었다. 그것이 1945년 패전 때까지 나라의 틀로 작동했다”고 평가했다.

 

 아베는 지난해 8월 쇼인 신사에 갔다. 참배 후 그는 “중의원 입후보의 뜻을 굳혔을 때도 참배했다. (앞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이태진 교수는 “쇼인은 우경화 국수주의의 원조다. 아베의 쇼인 신사 참배는 야스쿠니(靖國) 참배보다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아베 총리는 쇼인의 세계에 충실하다”고 했다. 그의 역사 도발에 쇼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쇼인의 세계는 아베 역사관에 접목됐다.

 

 2014년 아베 총리는 ‘강한 일본 되찾기,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제시했다(신년사). 그 국정 어젠다는 평화헌법체제의 개편이다. 아베의 다짐은 쇼인의 ‘초망굴기’를 떠올린다.

 

  나는 ‘요시다 쇼인 역사관’으로 들어갔다. 밀랍인형으로 쇼인의 드라마를 꾸몄다. 그의 생애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전시물이 눈길을 잡는다. '야마구치현 출신 총리대신들'이다.
 
 한쪽에 이토와 야마가타가 있다. 반대편 밀랍인형은 다섯. 가쓰라 다로(桂太郞),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가쓰라·데라우치·다나카는 조슈 군벌의 핵심이다. 쇼인 문하(門下)의 영향권에 있다. 쇼인의 영향력은 전율스럽다.
 
 아베까지 합해 야마구치 출신 총리는 8명(하기 고향 4명)이다. 전체 행정구역(47개 都·道·府·縣) 중 가장 많다. 역대 일본 총리는 57명(96대)이다. 관광 안내서는 “일본 역사의 굵직한 족적을 남긴 재상”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움찔했다. 그들은 한국과 악연과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태평양전쟁 후 총리는 기시와 사토다. 둘은 친형제다. 사토 총리 시절 한·일 신시대(1965년 국교정상화)를 열었다. 쇼인 역사관에 기시의 글씨가 걸려 있다. 쇼인이 읊은 시다. 그 글씨는 쇼인 비석(東送之碑, 萩往還공원)에 새겨져 있다. 아베는 기시의 외손자다. 기시의 정치는 아베의 롤 모델이다. 기시의 글씨, 사토의 유신 기념 글씨, 아베의 쇼인 신사 참배-. 쇼인의 그림자는 길고 짙다.
 
 야마구치 출신 거물들과의 악연은 한국 침탈이다. 이토(초대 조선통감)와 야마가타는 그 원조 격이다. 한·일 강제병합 때(1910년) 총리는 가쓰라, 데라우치초대 조선 총독(3대 통감)이다. 그들은 메이지 시대 원훈(元勳)으로 꼽힌다. 우리 망국사의 원흉(元兇)이다. 조슈의 성취는 나에게 미움과 허탈로 다가온다.
 
 조슈 인맥은 한반도 장악에 대거 등장한다.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조슈 출신이다. 조선 주재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이토의 하기 친구다. 후임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조슈의 육군 중장 출신이다. 그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도자다.
 
 정한론(征韓論)은 쇼인의 외정(外征) 구상이다. 그의 저서 『유수록(幽囚錄)』에 담겨 있다. 첫 감옥살이 때(25세) 쓴 책이다.
 
 “홋카이도를 개척, 오키나와(당시 琉球)를 일본 땅으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북으로 만주 점령, 남으로 대만, 필리핀 루손 일대를 노획한다.” “열강과 교역에서 잃은 국부와 토지를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쇼인의 한국 경멸은 오만과 야욕이다.

 

 쇼인의 외정론은 『일본서기』에서 출발한다. 신공(神功) 황후의 삼한 정벌, 임나(任那)일본부를 담고 있다. 왜곡과 과장, 허구와 가설들이다. 그는 『일본서기』에 심취했다.

 

  그의 외정론은 국가 어젠다가 된다. 제국주의 팽창과 침략의 이론이다. 대동아공영론으로 확장된다. 조슈의 후학들은 쇼인의 구상을 실천한다. 정한론을 기획, 음모했다. 조슈는 한반도 유린의 기지가 된다.

 

 정한론은 일본의 지정학적 본능이다. 쇼인의 작품만이 아니다. 임진왜란은 정한론의 실패한 시도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는 그 시대 계몽 사상가다. 그의 탈아론(脫亞論)은 정한론의 아류다. 그 본능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한국의 부국강병뿐이다. 리더십의 비전과 역사적 상상력, 국민의 지혜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기 관광상품은 조선 막사발 … "쇼인을 알아야 일본을 안다"


  야마구치 역사는 불편하다. 깊숙이 다가갈수록 불만스럽고 분노로 엮어진다. 조슈는 한반도 도래(渡來)인이 많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기구한 인연이 악연이 됐다. 역설로 작용한 세상사다.

 

 쇼인 신사 이웃에 이토의 옛 집이 있다. 누추하다. 그의 미천한 출신을 짐작하게 한다. 이토의 상(像)이 서 있다. 흙으로 빚었다. 그 옆에 도쿄에서 살던 집도 옮겨져 있다. 그 집에 유물·사진이 간략하게 전시돼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1909년)로 죽을 때까지 기록물이다.

 

 그 시대 이토를 능가했던 인물은 많았다. 대란의 비극은 요절과 횡사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67)는 도사(土佐)번 출신이다(지금의 고치현). 료마는 막부 타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삿초(薩長·사쓰마+조슈) 동맹을 맺게 했다. 료마는 암살당한다.

 

 유신 삼걸도 쓰러졌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와 오쿠보는 사쓰마 출신이다. 1877~78년 서남전쟁패배·자결(사이고), 자객 암살(오쿠보), 병사(기도)로 퇴장한다.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太郞)는 일본 육군의 기초를 닦았다. 오무라도 조슈 출신이다. 칼에 맞는다.

 

 이토는 그 공백을 차지한다. 권력 독주의 행운이다. 사이고 죽음 뒤 육군은 조슈, 해군은 사쓰마장악한다. 야마가타조슈 군벌 시대를 열었다. 야마가타는 오래 살았다(84세). 군부와 내각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하기100년 전 그대로라고 한다. 막부 시대 고지도가 통용된다. 성 밑 거리 조카마치(城下町)는 거의 바뀌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키(萩燒)는 대표적 관광상품이다. 하기에서 구워지는 조선 막사발이다. 그 유래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도공이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쇼인야마구치는 일본 근대사의 원류다. 아베가 주도하는 국수주의 우익 해부의 바탕이다. 역사의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절실하다. 진실과 논리에 익숙해야한다. 경계 때문만이 아니다. 일본과 친선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진정한 우호의 기반이다.

 

  일본 야마구치현 =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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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4) 가고시마에서 만난 마지막 사무라이
서울신문

입력 2005.01.17 10:34

 

온천욕을 즐기고, 골프 치는 곳으로 우리에게 제법 알려진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 지난해 1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가진 장소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정작 노 대통령이 바라보던 가고시마 해변이 일본 근대사는 물론이고 한・일 관계사의 엄청난 비밀을 안고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와 도공의 가업을 이어온 심수관은 인구에 회자되지만, 정작 한반도 식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한 사나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모른 척한다. 오늘도 검푸른 바다로 요동치는 현해탄 언저리 규슈 곳곳에는 바다를 통한 한반도 침략의 징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오늘의 바다 이야기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7〜1877)라는 가고시마 출신의 한 근대 인물에 할애하고자 한다.

 

메이지유신 기념해 만든 ‘레이메이칸

가고시마 시내의 야트마한 언덕 같은 시로야마(城山)를 오르면 지금도 뿜어져 나오는 활화산 ‘사쿠라지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웅장한 화산섬. 시로야마는 사이고가 마지막으로 자결한 ‘신성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그가 최후를 맞이한 동굴은 흡사 성지처럼 순례하러 찾아오는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시로야마 바로 밑은 이 일대의 문화 중심지. 데루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현립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이 모여 있다. 사이고의 동상과 그가 속했던 사쓰마번의 번주들 동상이 서 있고, 그 인근에 심상치 않은 건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레이메이칸(黎明館)이다.

 

역사 자료센터인 레이메이칸은 메이지 100년에 해당하는 1968년을 기념하여 1983년에 개관한 종합박물관이다. 여명이 밝아오듯 일본 메이지유신의 첫 장이 열렸음을 기념하는 곳이다. 정원에 세워진 ‘죽마고우들’ 동상에서 범상치 않은 인물군을 만나게 된다. 사이고는 물론이고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같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한데 어울려 있다.

 

사이고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1등 공신이다. 어떤 의미에서 1868년의 유신혁명은 사이고의 혁명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일본의 오늘은 메이지유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니, 일본 근・현대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가히 절대적이다. 명문이 아닌 하급 무사 출신이었던 사이고를 알려면 먼저 사쓰마번을 이해해야 한다.

 

사쓰마번주인 시마즈씨(島津氏)의 개화 조치일찍부터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모색했다. 막부의 쇄국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를 창구로 해상활동을 하고, 부단히 해외정보를 접하였다. 종자도(種子島たねがしま) 등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선진 무기들이 들어오는 등 각종 문물이 쉼없이 유입됐다. 중앙 정부가 요구해 오는 재정지출과 부역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번의 재정개혁을 성공시켰으며, 에도 말기에는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군주가 등장, 유신을 향한 에너지를 축적했다. 사이고 같은 인물은 이같은 현명한 군주들을 만남으로써 뜻을 펼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에서 사이고나 오쿠보 등 가고시마 출신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런 배경을 갖는다.

 

한반도를 정복하라 ‘정한론’ 대두

유신혁명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그 유명한 사초(薩長)연합이다. 오늘의 가고시마를 지배했던 사쓰마번과 시모노세키 근처의 조슈번이 극적인 연합을 이뤄낸 것이다. 사초연합군이 붕괴에 직면한 막부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조서를 손에 쥔 바로 그 날, 쇼군이 자진해서 3세기에 걸쳐 이어온 정권을 포기한다. 이로써 일본에서 봉건적 막부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근대의 시작인 메이지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런데 한반도 정벌을 둘러싼 인식차이로 인하여 심각한 내전이 발생한다. 일찍이 정한론을 제창한 이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그는 조슈번의 명문으로 비밀리에 사쓰마번과 막부 타도의 밀약을 맺은 자로, 사이고・오쿠보와 더불어 ‘유신 3걸’로 불린다. 그는 한말 대원군 시절, 조선 정부에 사절을 파견한 뒤 냉담했던 조선정부의 반응에 격분해 “실로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 도적들이다. 반드시 이들을 처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기선 군함도 필요없고 다만 무사들이 가벼운 배를 타고 해협을 횡단하도록 허락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이 주창한 한국 침략론은 드디어 사이고가 이끈 대사파견론, 즉 자신이 한반도 사절로 가서 최후의 담판을 짓겠노라는 정한론으로 발전하고, 이 정한론은 정부 수뇌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다. 결말은 사이고를 비롯하여 그를 지지하는 친구 이타키가 다시스케(板垣退助) 등 여러 사람들의 사직으로 일단락되거니와 그 여파는 사가(佐賀), 구마모토(熊本), 하기(萩)의 반란, 그리고 사이고가 주동이 된 세이난(西南戰爭・1877년)으로 발화되었다.

 

정한론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막부 체제가 끝나면서 일거리가 없어진 무사출신 낭인집단들의 반발을 해외로 돌리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외압이 강해지는 조건에서 일본과 가장 가깝고, 열강의 입김이 아직 충분히 미치지 않는 한국은 누가 보더라도 입맛 당기는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은 그들의 눈에 오로지 침략의 대상으로만 비쳤을 뿐이었다.

 

日 역사의 위대한 2명, 도요토미와 사이고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일파는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반대론에 패하여 하야했으나, 반대파들도 정한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의 생각이 사이고 등의 정한론과 근본적으로 대립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시기나 방법, 또 정한 주도권에 대한 반대에 불과했다. 오쿠보는 그의 유신혁명 동지이며 사이고의 출생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친구이자 동지였음을 기억하자.

 

사이고 등의 하야 후 약 반년이 지난 1874년 4월, 일본은 타이완에 출병했으며, 곧이어 1876년에는 강화도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은 일본에 개항하게 되며, 이로써 구멍 뚫린 댐처럼 식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한론 반대를 둘러싼 논쟁이 어디까지나 내부 시기조율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삿포로 농학교를 나와 미국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지식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함석헌도 감화를 받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문판 인물일본사(1894년 간행)를 펴보면 첫 장을 사이고가 장식한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2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사이고의 이름을 들 것이다. 둘 다 대륙 방면에 야망을 품고, 세계를 활동무대로 여겼다.” 그는 이어 “가장 위대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 사무라이지 않을까.”라고까지 했다.

 

오늘도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들이닥치는 규슈에서 ‘사이고’를 생각함은 매우 지난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작과 완결은 모두 가고시마라는, 변방 중의 변방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 레이메이칸 전시실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으니 정한회의도, 즉 ‘한반도 침략대책회의’란 그림이 그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인물은 물론이고 이토 히로부미도 함께 그려져 있으니, 그도 한반도에서 가까운 조슈번 출신이다.

 

사이고, 日선 영웅이나 우리에겐…

규슈는 본디 왜구들의 본거지였다. 왜구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오키나와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던 일군의 해상세력이었으니, 그들의 후손이 결국은 메이지유신도 성공시켰고, 끝내는 한반도 침략도 해치운 셈이다. 그들은 뿌리깊은 해상세력이었다. 중세의 국제 무역항이었던 하카다(博多)가 있는 후쿠오카에서 흑룡회 같은 대륙 낭인집단을 결성, 조선 일대와 만주 벌판을 누볐으며, 끝내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난도질하고 시간(屍姦)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이 섬이라면, 규슈는 섬 중의 또 다른 섬이다. 여말선초의 왜구로부터 임진왜란, 근세의 한반도 침략에 이르기까지 규슈 곳곳이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도 가고시마 시내의 유신기념관인 후루사토칸복판에 늠름하게 서 있는 이도 사이고다. 도쿄에 있는 우에노공원의 개를 끌고 서있는 동상도 바로 사이고다.1898년 동상이 세워질 당시, 제막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이고의 덕을 기리려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가고시마 시내에는 사쓰마 번주의 그림 같은 정원이 나오고, 슈우세이칸(集成館)이 세워져 있어 해외로부터 바다를 통한 근대를 모색했던 그들의 온갖 ‘실험’들이 형상화되거나 유물로 전시돼 있다. 가고시마 해변을 따라서 조금만 내려가면 지란(知覽)이 나오고 250여년 전에 조성된 무사마을을 만나게 된다. 이 마을은 일찍이 오키나와와 해상교역을 하던 출구였다. 지란에는 일제시대에 오키나와 바다로 출격했던 가미카제들의 흔적이 밴 곳이다.

 

가고시마현의 기리시마에 가면 가라쿠니다케(韓國岳)가 있다. 정상에서 바다 건너 멀리 한반도가 보일 정도로 높다고 하여 한국악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반도 바다의 관해觀海겠지만, 달리보면 한반도 침략의 대망을 키운 곳 아니겠는가.

 

고통스럽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가고시마

해변에서 마지막 사무라이를 떠올리면서 한반도와 일본 간의 바닷길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고통스럽지만 정작 정한론의 고장인 가고시마를 미워할 수만은 없음은 웬일일까.

 

일찍이 바다를 통한 부국강병의 길을 찾아내 이를 실천한 변방 사람들의 선진적 해양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서일 것이다. 게다가 가고시마 남방 60㎞ 지점에 떠있는 야쿠시마처럼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천혜의 비경을 훼손없이 간직한 그들의 바다자연을 아끼는 의지에도 또한 예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취재협조:한국학술진흥재단 21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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