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눈
내리는 밤 옛글 뒤적이며
강천석 논설주간(조선일보)
입력 : 2005.12.23 19:33
남녘 눈소식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스무날 내리 퍼붓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있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올 한 해 덮어야 할 궂은 일이 그리
많았다는 뜻일까요.
올해의 마지막 해가 퐁당 하며 노을 아래로 가라앉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사는 눈에 갇힌 산골마을 마당으로 땅거미가 찾아들 테지요. 말동무라곤 밤새 우는 문풍지뿐인 그곳 모습이 금방이라도 눈에 밟힐듯 하네요.
마을 길이 끊기면 마음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자꾸 바깥을 두리번거리던 눈이 안으로 모아진다는 이치인가 봅니다. 마음 길 뚫는 데는 옛글만한 게 없습니다. 향내가 나지요. 향내 나는 뜻을 오래 머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정치나 경제 같은 세간사(世間事)는 잠시 밀쳐두는 게 상책(上策)입니다. 날뛰던 세상을 좇아 올 내내 함께 날뛰었던 마음을 쉬게 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으니까요. 순서를 밟아 읽어야 할 책도 피하는 게 좋습니다. 번거로우니까요. 그냥 펼쳤다 덮어도 되는 책, 언제 어느 대목을 불쑥 찾아가도 싫은 내색 없이 맞아주는 그런 책이 제격입니다.
논어(論語)가 그런 책입니다. 무심코 펼쳤다 만난 논어의 이 대목엔 지천명(知天命)의 마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합니다. "子 在川上曰(자 재천상왈) 逝者如斯夫(서자여사부)인저, 不舍晝夜(불사주야)로다." 우리 말로는 이렇게 새깁니다. "선생께서 흐르는 강물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세월은 이처럼 흘러가는가,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 톡 쏘는 맛이 아니라 담담한 맛으로 해서 찾게 되는게 논어입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의 두레박 크기만큼 옛사람의 지혜를 길어올릴 수 있는 우물이지요.
"子曰(자왈) 人能弘道(인능홍도)요, 非道弘人(비도홍인)이니라." 이웃나라에선 이 글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애써 정의의 길을 넓혀야 하건만 툭하면 정의를 들먹이며 다들 제 이름만 날리려고 한다." 논어의 지혜를 담아 올리려면 가방 끈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이 길어야 합니다. 재주가 출중(出衆)하다 해도 연륜이 익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내린 두레박은 물에 닿지 못합니다. 논어의 또 다른 묘미(妙味)라 할 수 있지요.
긴 겨울 밤 그만 논어에 물리면 채근담(菜根譚)을 꺼내도 좋습니다. ‘채근’은 나물 뿌리라는 뜻입니다. 책 이름대로 어디를 펼쳐 씹어도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오는 책입니다.
"오래 엎드린 새는 반드시 높이 날고, 앞서 핀 꽃은 홀로 먼저 지느니라. 이를 알면 발 헛디딜 근심을 면하고, 조급한 마음을 덜 수 있으리라." 빨리빨리 하며 공(功)을 다투는 요즘 세상에 쓰일 약입니다. 채근담의 미덕은 마음의 증상에 따라 거기 맞는 구급약(救急藥)을 고루 갖춰 놓은 데 있습니다.
"매(鷹)는 서 있으나 조는 듯하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걸어가니, 이것이 먹이를 낚아채고 사람을 무는 그들의 수단이다. 모름지기 총명을 덮고, 재주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쓰기에 따라 사람 마음을 벼리는 숫돌이 되기도 하고 나라의 대계(大計)를 다듬는 연장이 되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이젠 어엿한 4대 강국, 10년 후면 미국과 함께 세계의 양패(兩覇)가 되리라는 중국이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키운다"며 오랫동안 몸을 낮춰 웅크리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불(禮佛) 때를 알리는 범종 소리가 골짜기 따라 내려오는 곳에 묵는 이라면 2500년 전 부처님 말씀을 원음(原音) 그대로 담아 놓은 ‘숫타니파타’가 아쉬워질지도 모르겠네요. 얼결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휘둘렸던 묵은해의 허물을 털고 새해에는 ‘내 걸음’을 잃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게 하는 말씀들이 ‘숫타니파타’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정치와 경제는 잠시 밀쳐두자 했지만 어디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입니까. 생각은 돌고 돌아 결국 우리 사는 나라로 돌아오고 말지요. "사람은 제가 스스로를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법이고, 집은 스스로 헌 다음에야 남이 허무는 법이며, 나라는 제 몸을 스스로 친 다음에야 남이 치는 법이다."
옛사람이 이 나라 이 국민의 새해맞이를 위해 미리 맞춰 둔 경계(警戒)의 말을 꺼내 건네주는 듯합니다.
옛글은 가슴속 용광로에서 끓이고 끓여 진국을 우려내야만 자기 것이 된다고 합니다. 자, 이제 아궁이에 불을 지필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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