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 3백리 호남정맥을 시작하며
(1) 다시 새로운 길에 들며
다시 길을 나섭니다. 묵묵한 산을 만나러 또 다른 길에 듭니다. 늘 그랬듯이 산에서 무언의 침묵을 배우고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려 합니다. 때로는 숲길을 걸으며 스치는 바람에 세진(世塵)을 씻으려 합니다. 산 정상에 서서 좁고 치우친 시야를 벗어나 넓고 다양하게 보는 법을 익혀보려 합니다. 혹여 백골처럼 반짝이는 암봉을 만나면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고뇌의 본질을 살피려 합니다.
호남의 산으로 갑니다. 산과 강과 들, 그리고 사람이 올망졸망하게 어우러진 1천 3백리 호남의 마루금에서 길의 의미를 되새기려 합니다. 높고 험한 길보다 낮고 아늑한 길에서 넉넉함과 후덕함의 가치를 깨쳐보려 합니다. 그 길에서 이 나라 이 땅에 대한 숙명적 사랑을 읊은 시인들의 노래를 불러보렵니다. 풀잎하나 돌멩이 하나에서 삶의 진한 여운을 느껴보려 합니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
- 조태일, <국토서시, 國土序詩> 중에서
(2) 몸이 머물게 될 길은
여암 신경준(1712~1781)은 산경도(山經圖)에서 이 땅의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번 길은 산경표상의 13정맥 중 2개의 정맥(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과, 통칭하는 호남기맥을 이어서 걷게 된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출발하여 주화산(조약봉)까지의 금남호남정맥, 조약봉에서 광양 백운산까지의 호남정맥, 백운산에서 광양 망덕포구에 이르는 호남기맥을 걷는 길이다. 이 마루금을 총 24구간으로 나누어 한 달에 두 차례, 1년에 걸쳐 걸을 것이다.
호남정맥은 섬진강 수계의 분수령을 따라 걷는 490.6km의 대장정이 될 것이다. 길의 왼쪽에 섬진강을 두고, 오른쪽으로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의 물줄기가 분기하는 정맥, 기맥, 지맥의 수분점을 통과하게 된다. 섬진강은 북쪽 장안산 자락의 원류에서 시작하여 구례에서 남쪽의 보성강과 합류하여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마루금을 따라 달라지는 풍습과 물산을 살피고, 말투와 기질의 변화를 살피게 될 것이다.
호남정맥에서는 전라도의 명산을 두루 섭렵하여 답사하는 즐거움을 갖게 될 것이다. 시작지점에 가까운 장안산(1237m), 종착지점에 가까운 백운산(1218m)을 비롯해 중간지점인 무등산(1187m)을 오른다. 또한, 마이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존제산, 조계산 등 호남의 명산을 두루 거치며 그 비경에 빠져들 것이다. 더불어, 명산이 품은 내장사, 백양사, 송광사, 선암사 등 숱한 명찰(名刹)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
아울러 다양한 산하 풍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장안산 부근의 첩첩산촌을 살피고, 오봉산의 옥정호, 추월산의 담양호, 무등산의 동복호, 조계산의 주암호 등 숱한 내륙호수를 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암산, 일림산에서는 다도해의 멋진 풍경을 점점이 볼 수 있을 것이고, 봇재 부근에서는 짙푸른 녹차 밭을 보며 다향에 젖을 수 있을 것이며, 광양 백운산에 이르면 섬진청류의 은빛 물결에 탄성을 지르며 망덕포구까지 걸을 것이다.
(3) 마음이 머무는 길을 찾아
새 길을 나서며 지나온 대간과 낙동의 길, 그 길을 찬찬히 되돌아봅니다. 길에 대해 절절하게 화두를 던졌던 경봉선사의 말씀이 다가옵니다. 몸이 머물렀던 눈앞의 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사무칩니다. 앞으로 걸을 호남정맥의 길에서도 몸이 머무는 눈앞의 길보다,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가야할 마음의 길을 따라 길의 끝에 당도하고자 합니다.
저 길의 끝은 길의 끝이 아니라 다만 마음 끝이라
돌아온 길을 돌아보듯 네 마음을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돌밭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시밭길이 있었음을
네 마음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가시에 찔려
덧난 상처가 많이 있었는가를
다만 길의 끝에 머문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
- 경봉선사 법어집, <꽃은 져도 향기는 그대로일세>중에서
호남정맥 출발에 앞서
2009. 4. 4.
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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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호남 65.5km + 호남정맥 395.8 km + 호남기맥 29.3 km = 490.6km(도상거리)
* 금남정맥,모악지맥,영산기맥,병풍지맥,땅끝기맥,사자지맥,고흥지맥,여수지맥 분기점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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