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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만나다 -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

月波 2013. 6. 16.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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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조선 왕가의 `神의 정원` 세계인을 사로잡다 [40기 위치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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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 - 종묘ㆍ왕실생활 - 창덕궁 이어 사후세계까지 인정
다음달 12일까지 무료 개방 … 태릉사격장ㆍ선수촌은 철거
2009.06.30.
 

◆조선왕릉 40기 세계문화유산 등재◆

조선 왕릉은 왕족 시신을 묻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산줄기 풍수 명당에 자리 잡은 이 무덤들에는 조선 역사, 건축양식, 철학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끌어들여 인공적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아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까지 흐른다. 따라서 이들을 `신(神)의 정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왕가 `신의 정원`이 세계인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서울 경기 강원도 일대에 있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유산이 됐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리고 있는 제33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The World Heritage Committee)는 26일(현지시간) 한국 `조선왕릉군(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519년간 이어진 조선 왕조는 27대 왕과 왕비, 사후 추존 왕과 왕비 무덤 42기를 남겼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북한에 있는 제릉(태조 비 신의왕후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 능)을 제외한 40기를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이후 실사를 맡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등재 권고` 판정을 내리면서 조선 왕릉 등재는 거의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네스코는 등재 평가 보고서에서 "한 왕조 무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라는 점과 유교적ㆍ풍수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건축양식 등으로 볼 때 세계유산적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조선왕릉 전체를 정부가 통합 보존ㆍ관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한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등과 같은 사회ㆍ지역 공동체가 보존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조선왕릉은 한국이 보유한 9번째 세계유산이 됐다. 현재 한국은 석굴암ㆍ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1995), 창덕궁, 수원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2000) 등 문화유산 7건과 자연유산인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특히 조선 제례 공간(종묘)과 왕실 생활문화 공간(창덕궁), 사후세계 공간(조선왕릉)이 완벽하게 세트를 이루어 세계유산이 됐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며 "조선 시대 문화적 우수성과 독창성이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점을 입증한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조선 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산업과 국가 이미지 제고 활동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청장은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종묘 창덕궁 등과 함께 조선왕조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여 관광산업 발전에 크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제주도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관광객이 20% 늘었으며, 베트남 하롱베이는 1996년 세계자연유산 등재 이전에는 연간 관광객이 23만6000명이었는데 2005년에는 거의 6배 이상인 150만명까지 늘어났다. 또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유산이 위험에 처했을 때 유네스코에서 기술과 재정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이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세계유산이라는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유적을 보존하고 각종 보호정책을 펴는 등 꾸준한 사후 관리가 필요하다. 관리를 소홀히 하면 이번 회의에서 자격을 박탈당한 독일 `엘베계곡`처럼 등재가 취소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일부 훼손된 능역을 원형 보존하고 △개발 압력을 막기 위한 완충구역을 마련하라는 방안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능역이 분할된 서삼릉 주변 토지를 확보해 일대를 원상태로 회복하고, 태릉 사격장과 선수촌도 유네스코 측에 약속한 시점까지 철거하는 등 조선왕릉 복원정비에 본격 나설 계획이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번 승인을 기념해 앞으로 2주 동안 조선왕릉을 무료로 개방한다. 또 다음달 15일에는 종묘에서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음을 알리는 고유제와 대국민 보고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손동우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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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사적 208호) :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

 
▲서오릉(사적198호) :

     △경릉 : 제9대 성종사친 덕종 및 소혜왕후 한씨.

     △창릉 : 제8대 예종 및 계비 안순왕후 한씨

     △명릉 : 제19대 숙종 및 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익릉 : 제19대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

     △홍릉 : 제21대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 


▲서삼릉(사적 200호) :

     △효릉 : 제12대 인종 및 비 인성왕후 박씨.

     △예릉 : 제25대 철종 및 비 철인왕후 김씨.

     △희릉 : 제11대 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온릉(사적 210호) : 제11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

 
▲광릉(사적 197호) : 제7대 세조 및 정희왕후 윤씨.

 
▲동구릉(사적 193호) :

     △건원릉 : 제1대 태조.

     △현릉 : 제5대 문종 및 현덕왕후 권씨.
     △목릉 :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휘릉 : 제16대 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

     △숭릉 : 제18대 현종 및 명성왕후 김씨.

     △혜릉 : 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

     △원릉 : 제21대 영조 및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수릉 : 추존 문조 및 왕후 신정왕후 조씨.

     △경릉 : 제24대 헌종 및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태강릉(사적 201호) :

     △태릉 : 제11대 중종계비 문정왕후 윤씨.

     △강릉 : 제13대 명종 및 인순왕후 심씨.

 
▲홍유릉(사적 207호) :

     △홍릉 : 제26대 고종 및 명성황후 민씨.

     △유릉 : 제27대 순종 및 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

 
▲사릉(사적 209호) :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헌인릉(사적 194호)

    △헌릉 : 제3대 태종 및 원경왕후 민씨.
    △인릉 : 제23대 순조 및 순원왕후 김씨.

 
▲선정릉(사적 199호)

    △선릉 : 제9대 성종 및 계비 정현왕후 윤씨.
    △정릉 : 제11대 중종.

 
▲융건릉(사적 206호)

    △융릉: 추존 장조(사도세자) 및 헌경왕후 홍씨.
    △건릉 : 제22대 정조 및 효의왕후 김씨.

 
▲파주삼릉

   △공릉(사적205호) : 제8대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
   △순릉 : 제9대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
   △영릉永陵 : 추존 진종眞宗 및 효순왕후 조씨.

 
▲(파주) 장릉長陵(사적 203호) : 제16대 인조 및 인열왕후 한씨.
▲(김포) 장릉章陵(사적 202호) : 추존 제16대 인조부 원종 및 인헌왕후 구씨.

 
▲의릉懿陵(사적 204호) : 제20대 경종 및 계비 선의왕후 어씨.

 
▲영릉英陵(사적 195호) : 제4대 세종 및 소헌왕후 심씨.
▲녕릉寧陵 : 제17대 효종 및 인선왕후 장씨.

  
▲(영월) 장릉莊陵(사적 196호) : 제6대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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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경종(景宗) 의릉(懿陵)
능호 : 의릉
위치 : 서울 성북구 석관동 산1-5번지
지정번호 : 사적 제204호
조성시기 : 1724년(영조 1)
능의구성 : 의릉은 20대 왕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능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고,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규모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봉분에는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경종 능의 망주석 세호는 왼쪽은 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오른쪽은 아래로 내려오게 조각되어 있다. 이와 달리 계비 선의왕후 능의 망주석 세호는 경종 능과 반대로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은 지붕이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숙종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문무석인은 전체적으로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가 경직된 느낌이다.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 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석물들의 배치 또한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능의역사 :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사적 20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 내에 자리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가면서 1996년 5월 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20대 경종(景宗)
생몰년도 : 1688년 ~ 1724년
재위기간 : 1720년 ~ 1724년
생애이야기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르렀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 사건으로 사사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여,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가 대신하여 세자대리청정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720년 6월 13일 경덕궁 숭정문에서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간의 재위시절에도 신하들의 당쟁에 시달려 재위기간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1724년(경종 4) 8월 25일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일화
1721년(경종 즉위)과 1722년(경종 2) 신축, 임인 두 해에 걸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위험한 당쟁이 계속되던 때였는데,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1721년(경종 즉위) 8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노론 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하였다.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고변을 기점으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의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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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장릉(章陵)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元宗)과 부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3년(인조 10)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그의 능을 장릉으로 불렀다.


능호 : 장릉(章陵)
위치 : 경기 김포시 풍무동
지정번호 : 사적 제202호
조성시기 : 1627년(인조 5)

능의구성 : 장릉(章陵)은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호석(護石 : 봉분 주위를 둘러 막는 돌)만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묘제를 따른 것이다.
문석인은 머리에 복두를 착용하고 공복을 입은 채 석마와 나란히 서 있으며, 무석인은 장군의 형상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다. 문무석인 모두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이 서려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인 참도가 다른 능과는 달리 약간의 경사진 계단식 형태이다. 정자각이 상대적으로 조금 높은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자각 동측에 자리한 비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으로, 비문을 통해 능의 주인공과 그의 생전 행적을 알 수 있다. 홍살문 안의 비면에는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左)’라고 쓰여 있으며, 1753년(영조 29)에 세워졌다.
근처에는 장릉의 원찰인 금정사(金井寺)가 자리하고 있다.
 
능의역사 : 원종은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2월에 양주군 곡촌리에 장사지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큰 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대원군에 봉해졌으며,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26년(인조 4) 1월 14일에는 경희궁 회상전에서 원종의 부인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같은 해 5월 18일 김포 성산의 언덕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흥경원을 이곳 성산으로 천장하여 쌍릉을 조영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칭하게 되었다. 1632년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다시 원종으로 추존하여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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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장릉(長陵)
사적 제203호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조선 16대 인조 및 인열왕후 한씨의 묘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1595~1646)와 인열왕후의 합장묘이다. 인조의 능은 원래 인열왕후 능이 있는 파주 운천리에 있었는데, 영조 7년(1731)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과 정묘·병자호란을 겪었고 특히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두 왕자를 인질로 청에 보내는 치욕을 겪은 왕이기도 하다. 능역에는 처음 조성된 석물과 이장할 때 새로 만든 석물이 함께 있어 17, 18세기 석물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성역으로서의 권위와 엄숙성이 느껴지는 왕릉”

조선의 왕릉은 봉분이 있는 ‘성역공간’과 정자각 등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들이 있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진다. 두 공간은 높낮이로 구별할 수 있다. 봉분이 있는 공간은 높아서 이 곳에 서면 제향공간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제향공간에서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등의 부속건물이나 위쪽 능침이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성역이 권위있고 엄숙한 영역으로 느껴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상세설명

조선 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와 부인 인열왕후(1594∼1635)의 무덤이다. 인조는 광해군 때 인조반정(1623)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시련이 있었고,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자 강원도에 대동법(1623)을 실시하였다. 장릉은 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정한 파주 북운천리에 있었으나,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 형태이다. 전통적인 십이지신상이나 구름무늬가 아닌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병풍석이 무덤을 두르고 있다.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돌로 된 등인 장명등에도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 있는데 이는 17세기 석물문양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이다.
※(장릉 → 파주 장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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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이야기

 

추존왕의 능
장릉(章陵)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추존왕(追尊王)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왕을 말한다. 어떠한 인물들을 왕으로 추존하는 것일까? 조선의 추존왕은 모두 9명이다. 이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이다. 왕으로 추존된 이들은 종묘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세자나 대군묘의 예로 조영된 능을 왕릉의 상설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제외한 조선의 추존왕은 다음과 같다.

 

(*)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장릉에 잠들어 있는 추존왕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9년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선왕인 광해군이 폐위된 터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 동생의 아들로 인해 추존된 진종(眞宗)
    진종은 영조의 맏아들로 1719년 태어나 1724년 경의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효장세자로 봉해졌다. 후에 그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그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이 22대 임금 정조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유언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고,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였다. 1899년에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정조의 친아버지 장조(莊祖)
    장조는 형인 효장세자가 죽자 1736년 세자로 책봉된 후 대리청정을 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으나, 당쟁의 희생양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1762년 28세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1776년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후 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으며, 1899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었다.

 

(*) 헌종의 아버지 익종(翼宗)
    익종은 순조의 아들로, 태어난 지 3년만인 1812년(순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827년(순조 27)에는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아버지인 순조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1830년 효명세자로 추존되였다. 1834년에는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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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장릉(莊陵) : 사적 196호 단종의 릉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 133-1번지
전화번호033-374-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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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 (사적 195호) : 제4대 세종 및 소헌왕후 심씨.


(여주) 영릉寧陵 : 제17대 효종 및 인선왕후 장씨.

 

 

(파주) 영릉永陵 : 진종眞宗과 효순왕후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파주 삼릉 내)
 * 진종眞宗-영조의 장자長子로 영조 즉위년에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나이 10세에 죽었다. 죽은 후 시호는 효장孝章세자로 봉해졌다.
   그 후 사도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어 한 때 영조의 대리청정까지 했으나 결국 왕이 되지못하고 뒤주에 갇혀 죽은 후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니 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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