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체스키크룸로프
시곗바늘이 멈춰선 중세풍의 낭만 도시
밤새 차를 달려 새벽 무렵, 쌀뜨물에 잠긴 듯한 그곳의 안개 속에 완전히 갇혔을 때, 고백하자면 나는 일말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사방은 적요하고, 도시는 하얗게 표백되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릴 듯 흐릿했다. 만약 소리없이 실종된 영혼들이 일시에 돌아올 수 있다면 분명히 이런 순간, 이런 공간에서 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팔뚝에 소름이 돋던, 그 안개의 견고한 성벽이 그토록 쉬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아침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 도시가 무슨 디즈니랜드도 아닌데 꽃과 적갈색 지붕, 아기자기한 상점과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거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1. 말랑하고 나른한, 꿈 속의 도시
프라하에서 서남쪽으로 200㎞, 블타바 강이 말굽 모양으로 휘돌아 흐르는 체스키크룸로프. 이곳은 번잡한 수도인 프라하보다 훨씬 작고 아담하지만,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 하나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봉인된, 중세의 도시 그대로의 풍경을 가졌다. 시계는 멈춰서 있고 바람과 햇살과 전설은 그 골목과 창가에 세월의 윤기를 더했을 뿐이다. 매끄러운 돌길 끝에서, 나무 대문 뒤에서 난쟁이나 도끼를 든 대장장이가, 푸른 수염의 거인이 불쑥 튀어나온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곳. 체스키크룸로프는 그렇게 곧바로 16세기 어디쯤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캐슬타워에서 내려다본 체스키크룸로프의 전경
나는 은발의 할머니들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을 지나 라트란 거리로, 이발사의 다리를 향해 걸었다.
옛날 체코의 대영주 루돌프 2세의 아들은 정신질환이 있어 요양하려고 체스키크룸로프 성에 왔다가 이발사의 딸에 반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딸은 목졸려 죽은 채 발견되고, 루돌프 2세의 아들은 광기가 들어 아내를 죽인 범인이 잡힐 때까지 마을 사람들을 한 명씩 죽여 나갔다. 그 끔찍한 일을 보다 못한 이발사는 스스로 딸을 죽인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을 해 사위의 어리석은 처형을 멈추게 했다.
그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발사를 추모하며 세운 다리가 바로 이발사의 다리, 라제브니키 다리다. 브레히트는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고 했지만, 누가 가장 강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 권력을 가진 자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태양은 멀리 망토 다리 위에서 숨바꼭질하듯 내려다보고 있었고, 금발의 꼬마들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발사의 다리 아래 흘러가는 강물을 손짓하며 무어라 떠들어댔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 강물과 카페와 사람들과 하느작거리는 나무들에 손짓해보았다. 플라타너스처럼 하느작거리며 그 골목길로, 길이 데려다 주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보헤미안 성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체스키크룸로프 성에 다다랐고, 둥근 계단을 올라 성탑 꼭대기에 섰고, 풍경에 얼굴을 묻었고 머리를 헹궜다. 그리고 먼 숲을 돌아온 바람이 내 온몸을 통과하도록 기다렸다. 이런 날은 구멍 뚫린, 나달거리는 영혼도 저절로 나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영혼은 영영 낫지 않길 바란다. 영원히 너풀거리면서 살아도 이곳에서는 아프지 않을 듯하다.
이발사의 다리에서 본 체스키크룸로프 성
다리 위에는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와 성 요한 네포무츠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 실레의 영혼이 속한 도시
강변을 따라 실레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보니 꼬마들이 기슭에서 낚싯대를 걸어놓고 있다. 물살이 약한 지점에 와선 카약을 탄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물고기처럼 통통 튀어 오르기도 했다. 말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카페의 웨이터들이 싱글거리며 자꾸 말을 걸어오고 하늘 높이 열기구가 떠다니는, 말랑하고 나른한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연한 의지를 품은 사람처럼 에곤 실레 아트센터로 향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인 실레. 그가 그렸던 체스키크룸로프의 풍경들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내가 처음 에곤 실레를 흠모하게 된 것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미술관에서였다. 적나라하고 날카로운 누드 스케치들과 그가 그린 죽은 클림트, 아내, 그리고 그의 데드 마스크를 보고 난 후였다.
스페인 독감으로 수천만 명이 죽었던 그해, 빈에 머물던 그들도 그 죽음의 바이러스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승이며 친구였던 클림트가 죽은 후 달려가 그 모습을 그렸고, 배속에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죽어버린 그의 아내를 그렸다. 그리고 사흘 후, 그도 스물여덟의 나이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체코의 전통빵 트르델니크를 만들어 파는 가게의 모습
봉에 끼워 구운 빵에 계피설탕을 뿌려 먹는다.
나의 열정만큼 성실하지 못한 내가 나를 괴롭힐 때, 충격과 슬픔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었을 아픈 그와, 그의 참혹한 강박, 그 예술혼을 생각하면 얼음 강에 빠진 듯 온몸이 시려왔다. 에곤 실레 아트센터에는 그를 이 도시에서 쫓겨나게 한 소녀들의 누드를 비롯한 많은 작품과 그가 직접 만들어 쓰던 검은 침대와 책상, 거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에곤 실레를 들여다보았다.
제 심연 속의 욕망과 허무를 들여다 본 자의 상처받은 얼굴.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인간과 삶, 그림에 대한 애착을 놓지 못했던 사람.
그 얼굴의 그 사람이 비쳤다.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연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이 도시에서 음란한 그림쟁이라고 쫓겨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실레는 일기에 그렇게 기록했다. 체스키크룸로프는 그의 어머니가 태어난 도시이고, 그가 세상에서 고립되었다 느꼈을 때 쫓기듯 숨어든 도시이고, 쫓겨난 도시이고, 영원히 머물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세상 어느 곳엔가 당신의 영혼이 속한 곳이 있고, 에곤 실레에겐 체스키크룸로프가 그곳이었을 거다.
나는 미술관을 나와 뒤편의 놀이터에서 신발을 벗고 모래에 발을 파묻었다. 잘 마른 모래는 햇볕 냄새를 풍겼고 발등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 옆 강변에는 래프팅과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생을 사랑한다고 외쳐댔다.
나는 홀린 듯이 일어나 계획에도 없던 뱃놀이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노를 저을 줄 모르는 탓에 강나루의 뗏목을 타기로 하고 매표소에서 표를 샀다. 물이 깊지 않은지, 스물이 갓 넘은 어린 가이드는 긴 통나무 막대 같은 걸로 강바닥을 짚으며 뗏목을 몰았고 서툰 영어로 이 도시의 전설과 유래들을 들려 주었다.
“아호이! 아호이!” 이건 그가 가르쳐준 뱃사람들의 인사. 체코어로 안녕이란 뜻이기도 하고, ‘신의 영광이 당신에게’란 뜻도 있단다. 뗏목을 함께 탄 사람들이 서로에게 아호이, 아호이 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또 다른 뗏목의 사람들에게도 아호이, 아호이 하고 소리쳐 인사한다. 뗏목은 블타바 강의 여울마다 빙글빙글 흔들리면서, 출렁이면서 떠내려갔다.
그때마다 초록 숲이, 붉은 지붕의 집들이, 하늘을 가린 망토다리와 분홍빛 성탑과 전설 속의 다리가 출렁, 왔다가 달아났다.
큰 여울에서 뒤집힌 카약에서 남자애 둘이 낄낄거리며 물 위로 솟아올랐고, 강변에서 젖은 등을 내놓고 말리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뗏목은 블타바 강을 따라 도시를 한 바퀴 돌고 멀찍이 둔덕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허기지고 노곤해진 나는 귀여운 뗏목 가이드가 알려준 체코 전통 식당을 찾아가 매캐한 연기 속에 앉아 화덕에서 구운 고기와 흑맥주를 마셨고, 노랗게 익은 달빛이 그 골목의 반질반질한 돌길 위에서 반짝이는 걸 보았다.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붉어진 얼굴로 많이 웃었다.
누군가 부르는, 가사를 알 길 없는 노래가 들려왔고, 여운이 긴 후렴구처럼 잊히지 않을 체스키크룸로프의 밤이 깊어갔다.
이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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