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자리/* 여백(餘白)

만추(晩秋)의 제주

月波 2005. 11. 28. 14:15

 

아직도 제주는 가을이었다. 입동(立冬)이 지난지 오래지만, 겨울이라 부르기에는 이른 계절이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은 쪽빛바다와 그 푸르름을 다투고 있었고, 그 하늘 아래 잎새로 떨어지기에 차마 이른듯 단풍나무 몇그루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억새는 제주의 산야를 은빛물결로 만들고 있었다. 바람에 하얀 속살을 내놓고 웃고 있는 모습은 가을이 주는 허허로움을 사람사는 세상의 다정함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새의 몸짓 하나하나는 묘하게도 제주가 안고 있는 역사적 아픔을 담아내고 있었다.

 

억새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름 그대로 정말 억세게 살아가는 초목이다.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땅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탓하지 않고 어디든 몸붙이고 살아간다. 정성들여 가꾸거나 길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어울리며 제 몸을 가꾸어간다. 가을 제주는 억새의 천국이었다.

 

그기에, 계절을 잊고 피어난 노란 금계국(金鷄菊)이  늦은 봄을 생각하게 하는가하면, 잔디 사이로 철모르고 돋아난 민들레 또한 금계국(金鷄菊)에 질세라 바람 앞에 노란 꽃잎을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활짝 핀 동백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었다.

 

억새(1)
억새(2)
억새(3)
Emerald 4
Emerald 3
Emerald 7
Emerald 8
억새(4)
Emerald 6
Emerald 6, 7
금계국
민들레(?)
동백꽃(1)
동백꽃(2)
TOPAZ 9

 

[억새, 그 아픈 몸짓의 의미]

 

가을은 억새로 시작해서 억새로 끝난다. 어디든 빈곳이면 어김없이 숨어들어, 모른 척 어울려 살다가 결국 가을이면 들통이 난다. 솟구쳐 오르는 희열에 속옷을 헤집고 허연 살을 드러낼 수밖에. 몰래 숨어 해오던 사랑이 임신으로 드러나듯이.

 

억새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 곡식을 심고, 나무나 풀이 차지하고 남은 땅에 자리탓하지 않고 이름처럼 억세게 살아간다. 곡식은 거름을 준다, 잡초를 뽑아준다, 가지를 쳐준다, 야단들이지만 억새는 발붙일 틈만 있으면 그만이다. 사랑하다 집 쫓겨난 연인(戀人)들이 방 한 칸 있으면 그만이듯이.

 

억새는 저들끼리 어울려 피어난다. 바람이 불면 저들끼리 누웠다 저들끼리 일어선다. 찬이슬 내리는 새벽이나 서리 내리는 밤에도 불평 않고 묵묵히 이겨낸다. 누구 하나 상대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서걱이는 소리도 요란하게. 저들끼리 놀고 저들끼리 어울리다 보면 벌 나비가 없어도 외롭지 않다. 같이 사는 두 사람 스스로 꽃과 나비가 되듯이.

 

이제 억새는 잘 익은 씨앗을 달고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정착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곳을 찾아 하나둘 비상(飛翔)의 나래를 편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 억새는 낙하산을 타고 겨우내 대지 위를 떠돌 것이다.

 

          --- 김창집, [억새, 그 아픈 몸짓의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