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제주는 가을이었다. 입동(立冬)이 지난지 오래지만, 겨울이라 부르기에는 이른 계절이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은 쪽빛바다와 그 푸르름을 다투고 있었고, 그 하늘 아래 잎새로 떨어지기에 차마 이른듯 단풍나무 몇그루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억새는 제주의 산야를 은빛물결로 만들고 있었다. 바람에 하얀 속살을 내놓고 웃고 있는 모습은 가을이 주는 허허로움을 사람사는 세상의 다정함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새의 몸짓 하나하나는 묘하게도 제주가 안고 있는 역사적 아픔을 담아내고 있었다.
억새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름 그대로 정말 억세게 살아가는 초목이다.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땅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탓하지 않고 어디든 몸붙이고 살아간다. 정성들여 가꾸거나 길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어울리며 제 몸을 가꾸어간다. 가을 제주는 억새의 천국이었다.
그기에, 계절을 잊고 피어난 노란 금계국(金鷄菊)이 늦은 봄을 생각하게 하는가하면, 잔디 사이로 철모르고 돋아난 민들레 또한 금계국(金鷄菊)에 질세라 바람 앞에 노란 꽃잎을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활짝 핀 동백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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