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가 이삭을 피우고
공기가 서늘해졌다 싶더니, 드디어 억새 이삭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아직은 연약하여 하얗게 머리를 풀고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는 품새는 덜해도 분위기는 제법 그럴 듯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거지요. 이 때쯤이면 나그네 병이 도지고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 늘 다니는 별도봉과 사라봉으로 운동 겸 산책길에 나섰다가 이 녀석들과 조우했습니다. 바다가 있고, 한라산이 보이고, 산이 있고, 들꽃이 있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이 산책길을 그래서 좋아합니다. 어제만 해도 여기서 쑥부쟁이의 명멸함을 보았고, 솔새 사이로 피어나는 수크렁을 보았습니다. 늦은 저녁 시간에는 반딧불이와 조우할 수도 있습니다.
♧ 권경업 시인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자(字)는 여광(汝廣) 호(號)는 소산(小山), 대정(大鼎), 또는 관악재(觀嶽齋)랍니다. 1970년대 부산지역을 대표하던 전위 산악인의 한사람으로, 많은 암벽과 빙벽(岩氷壁)을 등반하고 개척했고, 1990년 10월부터 백두대간 남녘 약 1600여 ㎞를 80여 일 동안 종주하며 월간 '사람과 산'에 백두대간 연작시 60여 편을 연재했습니다.
현재 부산 시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다음과 같은 시집을 냈습니다. '백두대간'(1991), '삽당령'(1993), '내가 산이 될 때까지'(1995), '산정노숙'(1996), '잃어버린 산'(1998), '자작 숲 움틀 무렵'(1999), '어느 산 친구의 젊은 7월을 위해'(2000), '오래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습니다'(2001), '사랑이라 말해 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2002)
♧ 억새꽃 - 권경업
서그럭서그럭
흔들리는 너, 긴 사색(思索)의
배경(背景)이고 싶다, 나는
뉘 삶인들 다를까만
치밭목 무성하던 상수리 숲처럼
우여(紆餘)와 파란(波瀾), 서서히 줌 아웃되는
모습 뒤의 그림자이고 싶다, 나는
한 드라마의 라스트 신에
오버랩
되는 추억이고 싶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회갈색(灰褐色) 풍경(風景) 속
여백(餘白)같은 사람아
차마, 우리 삶을 다 깨달았다 해도 쓸쓸할
쑥밭재 노을 걸리는 저물 녘
잔잔한 배경 음악의 조개골
물소리
나는 너의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사람아
아! 억새꽃 한아름 같은 사람아
♧ 억새꽃 · 1 - 권경업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뚜렷한 흔들림이었다
핏기라곤 없지만
툭, 건드리면 부러질 몸매에
아니다 아니다,
차가운 계절을 향한
처절한 부정(否定)의 몸짓이었다
겨울이었다, 그것도 앙칼진
소한(小寒) 무렵
어둠이 화선지의
수묵처럼 번지는 장당골
보았다, 견고한 세상의 떨림을
또한, 제 몸에서 끊임없이 억센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그 바람
청솔가지 끝에 매달려 아우성 치자
비탈의 등 굽은 굴피나무와 개옻나무
마른 물푸레, 참싸리, 개울가의 꽃버들까지
봄을
위하여, 여린 싹을
그 겨울의 어둠 속에서 품게 했다
그리고 남김없이 바람이 되었다
또 다른 흔들리지 않는 언덕, 세상을
위하여
봄이 가면 다시 함성으로 일어설,
진정 아름답기에 향기 품지 않은 꽃
억새꽃 흔들리던 그 해 겨울은
오월이었다
♧ 억새꽃 · 2 - 권경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가 누구인 줄 나는 모릅니다. 다만
싱겅싱겅한 가을산을 밀치며
다소곳 쑥스러워 하던,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미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둠이 어둠이 덮는
치밭목의 밤 환하게 밝히던
꾸밈 없는 억새꽃
한아름의 미소 말입니다
♧ 억새꽃·3 / 권경업
-갈라섬이 하나보단 못하느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섬뜩하도록 텅 빈 세상
무리무리 함성으로 일어나는 꽃
이른 새벽
하얗게 풍화(風化)하는
이 땅의 선한 백성 같은 꽃
시들어 꽃잎 지지 않는,
참으로 아름답기에
향기 품지 않은 꽃
*베드로 전서 4장 8절.
♬Don`t Worry, Be Happy / Bob Ma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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