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자리/* 여백(餘白)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展을 보고

月波 2007. 3. 23. 20:55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展을 보고

 

<반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3월 28까지 전시하고
소마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겨 5월 20일까지 전시를 계속 한다

 

   솔직히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화가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화맹(畵盲)인 셈이다.

   그런데, 오랫만에 미술 전시회를 다녀왔다.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타이틀처럼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이 많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클리브랜드 미술관 소장의 인상주의부터 2차대전직후 아방가르드미술 시대까지 화가들의 작품전이다.

   시대구분에 따라 미술사를 살피기 쉽도록 전시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둘러보기로 했다.

   작품세계를 이해하기보다 그저 보이는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사진을 보듯 화폭의 앵글이나 구도라도 보이겠지하는 마음으로.

   정산(正山)과 동행하니 마음은 편안하다.

 

   기억나는 작품들만 생각을 정리, 메모해본다. 비망록 쯤이라 여기고. 

   나중에 소마미술관으로 옮겨 전시하면, 시간 갖고 다시 가보기로 하고.
 
  
 

[#1  인상주의 시대] - 정확한 사물

 

인상파, 짧은 순간 시각적으로 처음 지각한 사물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미술사조다.
짧은 순간에 느낀 인상, 그래서 인상파라 이름지어 부르겠지.
사진에는 질감을 느끼기 어려운데, 그림에는 강한 터치가 있다.
느끼는 그대로의 사물을 그린 인상파 작품들은 생각보다 쉽게 적응이 된다.
 

 

     카미유 피사로,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화가다.

     그의 그림에는 잔잔함속에 느껴지는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3분할 수평구도가 돋보이고 오른쪽 화폭을 꽉채운 나무가 포인트를 잡아준다.

     사진을 찍으면 저런 구도가 나올까? 채우지 않고 자꾸 공간을 비우는 나로서는 힘들거다.

 

카미유 피사로 - 퐁투아즈의 수문, 1872

 

 

     베르트 모리조, 그도 처음이다.

     양산과 부채가 널부러진 줄도 모르고 여인은 독서 삼매경이다.

     책읽는 여자는 왜 위험하다고 했을까? 그 책 한 번 읽어 봐야지. 생각의 집중이 아직 안된다.

     배경의 푸른색과 흰 드레스, 오른쪽 옆구리의 붉은 빛 등 색채의 대비가 깔끔하다. 

 

베르트 모리조 - 독서, 1873

 

 

     구스티프 쿠르베, 1800년대 중순의 사실주의 화가다.

     강렬한 터치로 사회비판적인 리얼리즘이 드러나는 그의 그림이 떠오른다.

     놀랄만한 사실은 은밀한 곳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세상의 근원>, 파리 오르세박물관을 가보시라.

 

     이번에 전시된 알프스 경치는 그의 유작으로 미완성인 것 같다. 그래서, 아쉬움이 있다.

     정산이 묻는다. 저기 다녀왔니? 응, 아니야. 가 봐야지. 내게 알프스는 아직 꿈으로 남아있다.

 

 구스타프 쿠르베 - 알프스의 파노라마 경치, 1877

 

 

     르누아르 -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기분좋고, 예쁘고, 흥겹고 .....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불행이나 고통의 잔영을 찾을 수 없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고흐나 피카소보다 르누아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사과장수>와 <로맨 라코양의 초상>에서 서로 다른 색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뭐랄까? 색의 조화가 있고 자유로운 질서(?)가 있다.

     두 작품의 인물에는 눈빛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각자 어울림이 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사과장수, 1890   및  로맨 라코양의 초상, 1864    

 

 

     라코양의 초상을 다시 본다. 르누아르가 불과 23살 때 그렸다고?
     라코양의 얼굴과 순백색 드레스를 비추는 빛이 환상이다.
     긴장한 듯 가지런히 모은 두 손, 단호한 표정, 흔들림 없는 눈빛이 화폭에서 달려나올 것 같다.
 
     오늘 만난 초상중에서 가장 영롱하고 살아있는 눈빛이다. 살짝 머금은 미소가 은은하다.
     르누아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절로 업(Up)된다.
     정산과 한참이나 라코양을 만나고 있었다.

 

르누아르 - 로맨 라코양의 초상, 1864

 

 

     르누아르의 사과장수를 다시 보자.

     르누와르의 부인과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림에 온화한 기운이 퍼져있고, 행복이 절로 묻어난다.
     세밀한 터치가 아닌데도, 전체적인 이미지만으로 표현하고 싶은 느낌을 잘 담았다.
     꼭 꼬집지 않더라도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반증이다. 그렇지, 정산?

 

  르누아르 - 사과장수, 1890   

 

 

     르누아르에 빠져있다가  "빛은 색채이다"라고 한 마네를 건너뛰어 모네에게 간다.

     모네부인의 초상이 강렬히 불렀기 때문이리라.

     마네가 빠지면 인상파라 할 수 있나?

 

     모네가 그린 자기 아내의 초상,

     창 너머에서 새하얀 커텐 사이로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는 주인공,

     이목구비를 확연히 안그리고도 얼굴에서 애절함이 묻어난다. 점 하나, 선 하나면 충분히 생생하다.

     누구는 빨간 스카프가 오히려 더욱 더 슬퍼보인다고 했다. 

     빨강과 검정, 흰색의 대비가 절묘하다.

 

클로르 모네 -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 1868-78

 

 

     티소를 모른다. 이 그림도 처음이다. 그런데,  ......

     창살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뒤로 받으며 요염하게 앉은 모델, 은근한 매력이 넘친다.

     바람둥이 여인, 역광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대한 정산의 설명이 곁들여진다.

     누가 살갑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돌을 던지랴? 그러나, 그 때는 그랬다.

     나는 오로지 창살을 비집고 들어온 역광이 빚어낸 은빛 레이스의 눈부심을 쫓을 뿐이다.

 

 티소 - 초상화의 견본

 

  

[#2  후기 인상주의] - 평행의 조화

  

     빈센트 반 고흐,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쿵쾅거린다.

     오늘 드디어 그를 만나는구나. 교과서나 책이 아닌 원화의 강한 질감을 통해 그를 만나는구나.

 

     고흐의 플라타너스에서 강렬함, 생동감을 맛본다.

     물결치듯 살아있는 나무, 그 황금빛은 사람의 시선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물감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것 같다. 반짝반짝 윤이나는 캔버스를 들여다 본다.

     나무에도 근육이 있어 살아 움직이며 제 감정을 쏟아내는 듯하다. 

 

빈센트 반 고흐 - 큰 플라타너스 나무, 1889

 

 

     애들린 라보양의 초상에는 고흐 특유의 터치가 배어난다.

     노랑색으로 거칠게 덧칠하여, 강한 질감이 느껴진다. 흰색 장미꽃에서도 터프한 느낌이 살아있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여인의 얼굴에는 고흐 스스로의 감정이 그대로 이입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세들어 살던 시골 여인숙의 열세살 난 딸이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 애들린 라보양의 초상

 

 

     생 레미의 포플러는 색채와 구도가 좋다.

     화폭과 수직이 맞지 않는 두 그루 포플러 나무가 특이하다 .

     비스듬히 그려놓은 나무에서 고흐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읽는다고 정산(正山)이 말한다.

 

     그래. 그렇지?

     정신병원을 넘나드는, 그렇게 미치도록 빠져야 예술은 잉태되는 것인지?

     불광불급(不狂不及)인가? 미쳐야 미친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참된 예술가는 전부 미치광이야.

 

 빈센트 반 고흐 - 생 레미의 포플러, 1889

 

 

     초록빛이 차갑게 느껴지지만, 눈에 설지않게 다가서는 화가, 고갱을 만난다.

     고흐의 황금빛과 고갱의 초록빛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Contrast !

     역동성도 돋보인다.

 

폴 고갱 - 파도속에서, 1889 

 

 

     조르주 쇠라, 그를 잘 모르겠다. 

     검색을 해보니, 점묘화법과 신인상파가 키워드인듯 한데, 아주 작은 작품이었다는 기억만 있다.

     그러고 보니, 점묘화법은 어럼풋이 기억이 난다. 시험문제 달달 외우던 ....... 더 느껴봐야지. 

 

조르주 쇠라

 

 

     전시장 한 벽을 다 차지할 만큼 큰 그림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눈에 확 들어온다.
     앙리 루소의 호랑이와 물소의 싸움이다. 누가 이길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그림은 사실화? 아니면, 상상화인가?
 
     루소는 열대우림에 가보지도 않고, 여행집이나 사진을 보고 이렇게 정글을 표현했다는데 ......
     바나나는 그림에서의 모양과 달리, 열매가 하늘을 바라보고 열린다고 하더라고.
     아뭏든 호랑에는 날렵함이 넘쳐 흘렀다.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다. (후기) 인상파 맞어?

 

앙리 루소 - 호랑이와 물소의 싸움

 

  

[#3  근대조각의 선구자] - 인간들이여! 나는 아름답다.

  

     로댕 -  '나는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내부의 감정을 표현하려 애쓴다'

 

     그의 조각에는 감정이 들어가 있다.  생각이 있고, 희노애락이 담겨있다.
     내 안의 자아를 고민하는 로댕이 브론즈에 철철 묻어난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이 문득 생각났다.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려는 부처님의 사유가 담겨있는 .......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로댕에서 느끼는 존재의 고독감, 반가사유상의 넓은 품. 서양과 동양. 동양적인 포근함이 그립다.
 
     정산, 반가사유상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함께 박물관으로 가보자.

 

 

오귀스트 로댕 - 생각하는 사람, 1880년경, 브론즈

 

 

     로댕의 또 다른 작품, 청동시대. 무수한 논란이 있었다는 작품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틀에 넣은거 아니냐?  혹은 모델을 그대로 본뜬게 아니냐?

     눈을 의심할 만큼 정말 완벽하다. 기술이 뛰어나면 예술이 된다?

 

 오귀스트 로댕 - 청동시대

 

 

     브론즈만 보다가 대리석을 보니 신선하다.

     그런데, 천사의 추락은 관심있게 보지 못했다. 몰려 온 단체 관람객에 밀려. 

     간혹 버리고, 잊고,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괜찮은거야. 

 

 오귀스트 로댕 - 천사들의 추락, 1890-1900, 대리석

 

 

 

[#4  20세기 아방가르드] - 나를 놀라게 해봐!
  
     아방가르드,'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미술에서도 쓰이지만 여러 곳에서 쓰이는 말이다.
     아방가르드 시대를 연 사람이 피카소란다.
 

     파블로 피카소 - '나는 보는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현실을 넘어선 곳을 바라본 피카소를 만난다. 그러나, 그 세계에 닿기 어렵다.
     눈으로 보이는 것도 소화히기 어려운데 그 정신세계까지 들여다보기는 아직 역부족이다.
     수없이 들었던 그의 입체주의가 마티스의 색체혁명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가?
     피카소에 가는 감흥이 적다는 것은 스스로 구세대, 쉰세대라는 걸까?

 

파블로 피카소 - 부채, 소금상자, 멜론, 1909

 

 

     모딜리아니, 자주 듣던 이름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 그는 그런 여인들을 많이 그렸다

     붉은색과 황금색의 절묘한 배합, 눈가에 우수가  배어있는 여인을 본다.

 

     또 다른 여인도 인물만 다를 뿐 이미지는 동일하다. 모딜리아니의 전매특허다.

     다음에 사진 찍을 때, 저 포즈 한 번 잡아봐야지.

     목 쭉 빼고, 고개 오른쪽으로 살짝, 그런데 저 우수에 찬 표정은 어쩌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 여인의 초상, 1917-18년경
 
 

     앙리 마티스, 그도 잘 모른다. 색의 마술사라고 불린다는 것 밖에. 

     이 그림에서 명실상부한 그를 만난다.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마술처럼 색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런데, 자꾸 보면 감흥이 떨어징 것 같아 자리를 옮긴다.

     정산, 자네가 뭐라고 얘기했는데, 그 때 들리지 않았어. 다음에 복습해.

 

 앙리 마티스 - 에트루리아 화병이 있는 실내, 1940
 
 
     마티스의 다른 작품, 구도가 좀 다르다.
     그의 그림에 담긴 의도를 잘 모르겠다. 특별한 느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화사한 색채는 확실히 눈길을 끈다.
     형상으로 이미지를 표출하기보다 그는 색감으로 이미지를 나타낸다.
 

앙리 마티스 - 니스의 꽃 축제, 1923 

 
 

     막스 에른스트, 그도 나에게 생소하다.  

     다만 <풀밭위의 점심>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마네의 그림,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어떻게 다른가?

 

     마네의 그림에 나오는 나체여인 대신에 복어를 형상화 했다고 누가 평하던데, 연결이 쉽지 않다.

     풍자가 신기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참신하지는 않다는 야그일거다.

 

 막스 에른스트- 풀밭위의 점심, 1944
  
     에른스트 풍자의 대상이 된,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찾아 다시 보았다. 이번 展示에는 없다.
     남자는 입히고, 여자는 벗기고. 대담한 시도다.
     나체여인 뒤에 앉은 남자의 검은 색 정장이 나체 여인의 살결을 더욱 뽀샤시하게 만든다.
     빛과 색의 앙상블이라고나 할까?
 

 마네 - 풀밭위의 점심식사

 

 

 

[#5  북유럽의 빛] - 북유럽과 영국의 모더니즘
 
 
     바실리 칸딘시키 -'예술은 우리 사고의 어머니이며 우리 시대의 아들이다'
 
     가브리엘 뮌터, 그녀는 누구인가? 바실리 칸디시키의 부인이었다.
     화가들은 아뭏든 독특하다.
     아내가 자기보다 그림 잘 그린다고 위기의식을 느껴 결별했다고?  미친 넘! (나 혼자 소리)
 
     뮌터의 작품, 미래(스톡홀름 여성)에는 밝은 색채가 돋보인다.
     그런데 채도가 낮아 주인공의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누구는 뮌터의 우울한 심리상태가 투영되었다고 하던데, 호사가들은 또 뭐라고 할까?
     뮌터의 미래가 자꾸 눈길을 끌게한다. 카메라에서도 채도를 달리하며 셔터를 눌러봐야겠다.
 

 가브리엘 뮌터 -  미래(스톡홀름 여성)

 
  

     노르웨이 화가 뭉크, 그의 작품에서 불안한 눈빛과 마주친다.  

     정신착란증이 있었다는 그의 내면이 석판화에 제대로 프린팅된듯하다.  

     젖가슴이 아니라 눈빛이 작품의 포커스다. 그런데, 느낌이 별로다. 꺼림칙하다.

 

     여인의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야릇하다. 공포에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함이 담겨있기도 하고.

     뭉크의 애인인지, 직업모델인지는 관심밖이다.

     눈에는 슬픔의 한이 담겨있고, 입가에는 씁쓰레함이 감돈다. 스토리라인이 어렵다.

 

에드바르트 뭉크 - 죄,1901
 
  

     몬드리안, 구면이다.

     이 그림도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그림인가, 도형인가? 그러나, 낯설지 않다.

     선과 면 그리고 빨강, 노랑, 파랑과 검정으로 이루어진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다.

     뭘 모르는 나에게는 도형놀이에 불과하다.

 

     그의 구성은 소위 신조형주의다. 가장 보편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을 조형적으로 나타낸다.

     몬드리안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종종 눈에 띈다.

     일상 생활에서도 몬드리안이 보인다. 생활가전이나 주방가구 디자인에서도 본 것 같고,

 

     옛날 옛적 미술시간에 이론적으로는 많이 들었는데 .....

     수평과 수직의 만남, 평온함과 역동성의 교차. 누가 몬드리안을 더 설명해 줄 사람, 없수?  

 

 

피에트 몬드리안 - 빨강, 노랑, 파랑의 컴포지션, 1930
 
 
     전시장을 돌아나오려는데, 북유럽의 모더니즘에는 어두운 빛이 지배한다.
     강렬한 인상과 달리 선뜻 다가서기에 주저함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르누아르파인가봐. 
 
 
     전시장을 나온다. 마음이 편안하다. 
     오랫만에 최고의 ‘안복(眼福·-눈 호사)’을 누렸다.
     세잔느의 시냇물, 쿠르메가 그린 알프스 파노라마 경치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나올걸 그랬나?
     아니, 로맨 라코양의 그 청초함과 반짝이는 눈매를 가까이서 더 봤어야 하는데 ........
     조명아래 빛나는 유화의 그 하얀색 터치란 잊을 수 없다.
 
     문화산책을 하려면 돈과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 볼 수 있는 눈높이를 갖춰야 하는데 .......
     저녁에는 코가 삐뚜러지게 금문곡주와 벗했다. 퓨전이다.
     간혹 이렇게도 해야한다고, 정산?
     즐거운 하루! 
 
     2007. 3. 23.
     월파(달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