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展을 보고
화맹(畵盲)인 셈이다.
그런데, 오랫만에 미술 전시회를 다녀왔다.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타이틀처럼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이 많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클리브랜드 미술관 소장의 인상주의부터 2차대전직후 아방가르드미술 시대까지 화가들의 작품전이다.
시대구분에 따라 미술사를 살피기 쉽도록 전시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둘러보기로 했다.
작품세계를 이해하기보다 그저 보이는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사진을 보듯 화폭의 앵글이나 구도라도 보이겠지하는 마음으로.
정산(正山)과 동행하니 마음은 편안하다.
기억나는 작품들만 생각을 정리, 메모해본다. 비망록 쯤이라 여기고.
[#1 인상주의 시대] - 정확한 사물
카미유 피사로,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화가다.
그의 그림에는 잔잔함속에 느껴지는 바람의 숨결이 느껴진다.
3분할 수평구도가 돋보이고 오른쪽 화폭을 꽉채운 나무가 포인트를 잡아준다.
사진을 찍으면 저런 구도가 나올까? 채우지 않고 자꾸 공간을 비우는 나로서는 힘들거다.
카미유 피사로 - 퐁투아즈의 수문, 1872
베르트 모리조, 그도 처음이다.
양산과 부채가 널부러진 줄도 모르고 여인은 독서 삼매경이다.
책읽는 여자는 왜 위험하다고 했을까? 그 책 한 번 읽어 봐야지. 생각의 집중이 아직 안된다.
배경의 푸른색과 흰 드레스, 오른쪽 옆구리의 붉은 빛 등 색채의 대비가 깔끔하다.
베르트 모리조 - 독서, 1873
구스티프 쿠르베, 1800년대 중순의 사실주의 화가다.
강렬한 터치로 사회비판적인 리얼리즘이 드러나는 그의 그림이 떠오른다.
놀랄만한 사실은 은밀한 곳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세상의 근원>, 파리 오르세박물관을 가보시라.
이번에 전시된 알프스 경치는 그의 유작으로 미완성인 것 같다. 그래서, 아쉬움이 있다.
정산이 묻는다. 저기 다녀왔니? 응, 아니야. 가 봐야지. 내게 알프스는 아직 꿈으로 남아있다.
구스타프 쿠르베 - 알프스의 파노라마 경치, 1877
르누아르 -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기분좋고, 예쁘고, 흥겹고 .....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불행이나 고통의 잔영을 찾을 수 없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고흐나 피카소보다 르누아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사과장수>와 <로맨 라코양의 초상>에서 서로 다른 색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뭐랄까? 색의 조화가 있고 자유로운 질서(?)가 있다.
두 작품의 인물에는 눈빛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각자 어울림이 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사과장수, 1890 및 로맨 라코양의 초상, 1864
르누아르 - 로맨 라코양의 초상, 1864
르누아르의 사과장수를 다시 보자.
르누아르 - 사과장수, 1890
르누아르에 빠져있다가 "빛은 색채이다"라고 한 마네를 건너뛰어 모네에게 간다.
모네부인의 초상이 강렬히 불렀기 때문이리라.
마네가 빠지면 인상파라 할 수 있나?
모네가 그린 자기 아내의 초상,
창 너머에서 새하얀 커텐 사이로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는 주인공,
이목구비를 확연히 안그리고도 얼굴에서 애절함이 묻어난다. 점 하나, 선 하나면 충분히 생생하다.
누구는 빨간 스카프가 오히려 더욱 더 슬퍼보인다고 했다.
빨강과 검정, 흰색의 대비가 절묘하다.
클로르 모네 -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 1868-78
티소를 모른다. 이 그림도 처음이다. 그런데, ......
창살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뒤로 받으며 요염하게 앉은 모델, 은근한 매력이 넘친다.
바람둥이 여인, 역광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대한 정산의 설명이 곁들여진다.
누가 살갑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돌을 던지랴? 그러나, 그 때는 그랬다.
나는 오로지 창살을 비집고 들어온 역광이 빚어낸 은빛 레이스의 눈부심을 쫓을 뿐이다.
티소 - 초상화의 견본
[#2 후기 인상주의] - 평행의 조화
빈센트 반 고흐,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쿵쾅거린다.
오늘 드디어 그를 만나는구나. 교과서나 책이 아닌 원화의 강한 질감을 통해 그를 만나는구나.
고흐의 플라타너스에서 강렬함, 생동감을 맛본다.
물결치듯 살아있는 나무, 그 황금빛은 사람의 시선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물감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것 같다. 반짝반짝 윤이나는 캔버스를 들여다 본다.
나무에도 근육이 있어 살아 움직이며 제 감정을 쏟아내는 듯하다.
빈센트 반 고흐 - 큰 플라타너스 나무, 1889
애들린 라보양의 초상에는 고흐 특유의 터치가 배어난다.
노랑색으로 거칠게 덧칠하여, 강한 질감이 느껴진다. 흰색 장미꽃에서도 터프한 느낌이 살아있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여인의 얼굴에는 고흐 스스로의 감정이 그대로 이입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세들어 살던 시골 여인숙의 열세살 난 딸이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 애들린 라보양의 초상
생 레미의 포플러는 색채와 구도가 좋다.
화폭과 수직이 맞지 않는 두 그루 포플러 나무가 특이하다 .
비스듬히 그려놓은 나무에서 고흐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읽는다고 정산(正山)이 말한다.
그래. 그렇지?
정신병원을 넘나드는, 그렇게 미치도록 빠져야 예술은 잉태되는 것인지?
불광불급(不狂不及)인가? 미쳐야 미친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참된 예술가는 전부 미치광이야.
빈센트 반 고흐 - 생 레미의 포플러, 1889
초록빛이 차갑게 느껴지지만, 눈에 설지않게 다가서는 화가, 고갱을 만난다.
고흐의 황금빛과 고갱의 초록빛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Contrast !
역동성도 돋보인다.
폴 고갱 - 파도속에서, 1889
조르주 쇠라, 그를 잘 모르겠다.
검색을 해보니, 점묘화법과 신인상파가 키워드인듯 한데, 아주 작은 작품이었다는 기억만 있다.
그러고 보니, 점묘화법은 어럼풋이 기억이 난다. 시험문제 달달 외우던 ....... 더 느껴봐야지.
조르주 쇠라
앙리 루소 - 호랑이와 물소의 싸움
로댕 - '나는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내부의 감정을 표현하려 애쓴다'
오귀스트 로댕 - 생각하는 사람, 1880년경, 브론즈
로댕의 또 다른 작품, 청동시대. 무수한 논란이 있었다는 작품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틀에 넣은거 아니냐? 혹은 모델을 그대로 본뜬게 아니냐?
눈을 의심할 만큼 정말 완벽하다. 기술이 뛰어나면 예술이 된다?
오귀스트 로댕 - 청동시대
브론즈만 보다가 대리석을 보니 신선하다.
그런데, 천사의 추락은 관심있게 보지 못했다. 몰려 온 단체 관람객에 밀려.
간혹 버리고, 잊고,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괜찮은거야.
오귀스트 로댕 - 천사들의 추락, 1890-1900, 대리석
파블로 피카소 - '나는 보는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파블로 피카소 - 부채, 소금상자, 멜론, 1909
모딜리아니, 자주 듣던 이름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 그는 그런 여인들을 많이 그렸다
붉은색과 황금색의 절묘한 배합, 눈가에 우수가 배어있는 여인을 본다.
또 다른 여인도 인물만 다를 뿐 이미지는 동일하다. 모딜리아니의 전매특허다.
다음에 사진 찍을 때, 저 포즈 한 번 잡아봐야지.
목 쭉 빼고, 고개 오른쪽으로 살짝, 그런데 저 우수에 찬 표정은 어쩌지?
앙리 마티스, 그도 잘 모른다. 색의 마술사라고 불린다는 것 밖에.
이 그림에서 명실상부한 그를 만난다.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마술처럼 색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런데, 자꾸 보면 감흥이 떨어징 것 같아 자리를 옮긴다.
정산, 자네가 뭐라고 얘기했는데, 그 때 들리지 않았어. 다음에 복습해.
앙리 마티스 - 니스의 꽃 축제, 1923
막스 에른스트, 그도 나에게 생소하다.
다만 <풀밭위의 점심>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마네의 그림,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어떻게 다른가?
마네의 그림에 나오는 나체여인 대신에 복어를 형상화 했다고 누가 평하던데, 연결이 쉽지 않다.
풍자가 신기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참신하지는 않다는 야그일거다.
마네 - 풀밭위의 점심식사
가브리엘 뮌터 - 미래(스톡홀름 여성)
노르웨이 화가 뭉크, 그의 작품에서 불안한 눈빛과 마주친다.
정신착란증이 있었다는 그의 내면이 석판화에 제대로 프린팅된듯하다.
젖가슴이 아니라 눈빛이 작품의 포커스다. 그런데, 느낌이 별로다. 꺼림칙하다.
여인의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야릇하다. 공포에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함이 담겨있기도 하고.
뭉크의 애인인지, 직업모델인지는 관심밖이다.
눈에는 슬픔의 한이 담겨있고, 입가에는 씁쓰레함이 감돈다. 스토리라인이 어렵다.
몬드리안, 구면이다.
이 그림도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그림인가, 도형인가? 그러나, 낯설지 않다.
선과 면 그리고 빨강, 노랑, 파랑과 검정으로 이루어진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다.
뭘 모르는 나에게는 도형놀이에 불과하다.
그의 구성은 소위 신조형주의다. 가장 보편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을 조형적으로 나타낸다.
몬드리안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종종 눈에 띈다.
일상 생활에서도 몬드리안이 보인다. 생활가전이나 주방가구 디자인에서도 본 것 같고,
옛날 옛적 미술시간에 이론적으로는 많이 들었는데 .....
수평과 수직의 만남, 평온함과 역동성의 교차. 누가 몬드리안을 더 설명해 줄 사람, 없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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