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집에선 산을 그리고 산에선 가족을 찾는다
정승권 칼럼
정승권 - 암벽등반가, 정승권등산학교 교장
입력 : 2007.05.11 23:12
사람들은 산악인이 왜 산에 가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30년간 산을 오르며 암벽등반을 해온 나 역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묻고는 한다. 그러나 무엇이 어려운지 시원하게 대답해내질 못했다. 대답은 간결하고 명료해야만 듣는 이도 감탄하지 않겠나 싶어서, 뭘 좀 멋지게 꾸미려고 해도 잘 되질 않는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기엔 산의 세계가 너무 깊고 넓어서일까? 아니면 숭고한 알피니즘의 세계를 감히 논하기가 두려워서 일까?
알래스카의 매킨리봉 남벽 6000m 지점에서 친구와 둘이 5일 동안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300m가 넘는 수직의 국내최대 토왕성 빙벽을 밤새 혼자 오르며 영화에서나 봤던 러시안 룰렛 게임 같은 미친 짓을 해보기도 했다. 한편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서기도 했고, 남미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암봉(岩峰) 세로토레를 48시간 동안 잠 안자고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산은 항상 나에게 도전과 욕망의 대상이었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이라는 수직 고도 1000미터의 암벽이 있다. 암벽등반을 좀 한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10년 전 어느 날,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두 살 아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 미국에 등반하러 안 와요?” 뜻밖의 안부전화였다. 그 후배가 미국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속사정을 전화로 알아볼 수는 없는 일. 우리는 엘캐피탄 암벽을 함께 올라보자는, 서로 지키지 않아도 될 가벼운 인사로 대화를 마쳤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됐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하던 일 모두 팽개치고 산으로 내빼는 버릇이 어디 가랴. 이유야 어쨌든 간에 어느 날 갑자기 운전면허가 취소됐다. 가중한 벌금과 제한된 생활로 인한 짜증스러움은 나를 산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한달 정도 등반하고 오면 나을까 싶었다. 아이들은 어려서 아빠가 집을 비워도 먼데 일하러 간 줄 알지만 아내의 눈치는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남편이 암벽등반을 가르치는 직업 산악인이니 아내는 그렇게 산으로 떠나는 남편을 매번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 ▲전북 고창군 선운산 암벽을 등반하고 있는 산악인 정승권씨.
등반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뒤부터는 초초해진다. 아니 마음이 스산해진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것은 등반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 아니라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에서 오는 중압감이다. 내가 없는 빈자리를 아내가 잘 채워주리라는 미안함 섞인 믿음으로 나는 등반을 떠났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마음 속에 꽉 차있던 중압감이 줄어들었고, 집 걱정은 이내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랜만에 미국에서 만난 후배의 속사정은 이러했다. 그도 나처럼 미국의 산으로 도망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처럼 일상적인 속상함이 아닌 크나큰 괴로움을 마음속 가득 품고 있었다. 아내와 이혼한 것이다. 그 속사정을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오를 등반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고, 필요한 식량과 장비를 준비했다.
과거 총각시절 북한산 인수봉을 함께 오를 때처럼 히죽거리며 거대한 엘캐피탄 암벽에 매달렸다. 등반만 8일쯤 걸리고,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소문난 ‘꿈의 바다(Sea of Dreams)’ 루트.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까마득한 벽을 미세한 바위 틈새를 따라서, 체중을 실으면 곧 바위조각이 깨져나갈 것 같은 얇은 바위 덧장을 잡고 올랐다. 물 30?과 식량 20㎏, 그리고 예비 등반장비를 포함해서 약 100kg의 짐을 끌어올리며 벽에 매달려 자고, 먹고, 다시 자며, 미친 듯 벽을 올라야만 했다. 우리는 물이 부족할까 봐, 장비가 부족할까 봐 걱정했으며, 혹시 모를 추락으로 인해 발생할 서로의 부상을 걱정할 뿐이었다.
‘꿈의 바다’라는 루트 이름처럼 우리의 등반은 마치 아무도 없는 거칠고 막막한 바다를 통통배를 타고 항해하는 듯 했다. 볼이 패여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수염이 덥수룩한 서로의 몰골이 마치 해적처럼 바뀌었다. 더위와 땀에 찌든 몸에서 쉰 냄새가 풀풀 나도 정상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제약된 공간에서 어디 한곳 편히 발 붙이고 쉴 수 있는 곳이 없었고, 지친 몸과 손으로 바위와 장비를 억세게 움켜진 까닭에 몸통은 경련이 일었다. 손끝은 신발 끈조차 묶기 어려울 정도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때쯤이면 이미 등반은 즐거움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탈출이 되며, 저 밑의 맨땅이 그리워지고 계곡에 흐르는 물이 야속해 보인다. 그리고 집이 그리워진다. 집에 가면 아이들과 잘 놀아줄 것을 하늘을 향해 맹세하고,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루트가 그려진 종이 뒷면이 편지지가 되었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 그 편지지는 손때가 잔뜩 묻어 꼬질꼬질하게 변한다.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바뀌는 것이다.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며 드디어 엘캐피탄을 탈출하여 정상에 섰을 때 우리는 두발로 뛰었다. 평지의 고마움과 폭발하는 생의 환희를 느끼며, 그리고 서로의 눈에 고인 감격의 눈물이 속죄(贖罪)의 눈물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며칠 전 그 후배는 내가 운영하는 등산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다.
‘당신은 모를 것이다. 부모란 직업이 솔로 클라이밍(단독등반)이나 A5(인공등반의 최고 어려운 등급)를 하는 것보다 더 무섭고, 5.14(자유등반의 매우 어려운 등급)보다도 더 지루하게 그레이드(암벽등반의 어렵기를 나눈 등급)를 올려야 하고, 히말라야 14좌(8000m 이상의 산)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아직도 나에게는 끝나지 않은 암벽의 꿈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것들은 집에 돌아와야 찾을 수 있다. 나의 가족. 한 가족을 위해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세상의 등산가들, 이 모든 영웅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그 등반 이후 후배는 재혼을 해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안정된 가정도 꾸렸다.
- ▲정승권 암벽등반가·정승권등산학교 교장
시간은 우리를 그대로 있게 두지만은 않는다. 나는 후배에게 이런 답글을 남겼다.
‘위대한 사람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고, 위대한 어머니 뒤에는 분명 위대한 남편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지, 항상 건승하길 바란다.’
우리는 집에서 산을 그리워했지만, 그 그리움은 반대로 산을 찾아 집에 대한 더 많은 그리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 이 결론이 요즘 내가 산에 가는 이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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