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06 - 낙동에서 하는 태극종주
(1) 낙동의 오지, 저시마을을 향하며
낙동의 오지마을을 향하여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떠나는 마음은 언제나 설레인다. 험난한 길에서는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에서는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 이외수 시인, 그를 생각한다. 버리고 너그러워지느냐, 채우고 옹졸해지느냐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다.
오늘은 한티재에서 검마산, 백암산을 거쳐 아랫삼승령까지 30.7Km의 장거리 산행이다. 경북의 깊숙한 산간이라 진출입이 여의치 않고 비상탈출로도 멀어 하루에 걷기가 만만치 않지만, 이 30Km의 구간은 태극모양의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환종주 코스를 한 번에 걸어보자는 생각이 강행군을 하게 한다. 또한, 하산길에 심산유곡의 오지마을인 저시를 둘러볼 수 있다는 기대가 더욱 장거리산행을 부추긴다.
태극모양을 하고 있는 낙동의 환종주 코스(한티재-덕재-검마산-백암산-아랫삼승령)
마침 산행에 참가하는 멤버도 정예그룹 7명으로 단촐하니, 중간탈출이나 낙오자 없이 모두 완주가 가능하리라는 확신이 선다. 오로지 산행 종료지점인 아랫삼승령까지 우리를 태울 버스가 올라올 수 있느냐가 걱정이다. 비포장의 좁은 임도로 버스가 올라오지 못하면, 추가로 두세시간 더 걸어서 하산하는 부담이 있다. 버스 기사에게 지도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한티재에서 새벽 3시를 지나 어둠속에 산으로 든다.
어둠 속에 한티재에서 산으로 들며 - 사진 김길원
(2) 무명(無明)을 밝히며 걷는 숲길
잠시 급한 오르막을 타지만 이내 길은 편안해진다. 짙은 어둠 속에 적막한 숲길을 걷는다. 헤드랜턴의 작은 불빛에 의존해 조심스레 걷는다. 깊은 잠에 빠진 숲속의 미물들이 놀랄까봐 숨소리조차 줄인다. 세상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이마의 랜턴이 진리의 깨달음에 목마른 자의 무명(無明)까지도 밝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숲길을 걷는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숲 사이로 밝은 불빛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우천마을의 불빛이리라. 온통 산으로 둘러 싸인 깜깜한 숲속의 몇 줄기 밝은 불빛은 도시의 타워팰리스를 연상하게 한다. 비록 작은 불빛이라도 어둠이 짙으니 더 밝고 강하게 다가온다. 고추밭가에 심겨진 옥수수, 생긴대로 피어난 야생화, 아침이슬에 젖은 거미줄이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반긴다.
우천마을 삼거리에서 어둠속에 우리를 반긴 털복숭이
다시 한 시간 가까이 어둠 속에 숲길을 걸으니 자그마한 임도가 나타난다. 추령(497m)이다. 짙은 안개 속에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 선답자들의 사진에서 보았던 쉼터같은 움막은 흔적도 없고, 그들이 남긴 형형색색의 표지리본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간과 정맥길에서 이렇게 많은 리본은 처음이다.
덕재로 가는 숲길은 동네 뒷산같은 느낌이다. 도회에서는 멀어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속의 섬같은 곳이다. 능선에 집터의 흔적이 있고 가까이 샘이 있를 법한 느낌이 든다. 모두들 피곤한지 덕재에서 벌렁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데, 북진하는 정맥돌이를 만난다. 사흘째 산행중이라는 그는 지도를 목에 걸었으나 현위치가 어디인지 별무관심인듯하다. 겉으로 풍기는 그 편안함이 부럽다.
약속이라도 한듯 덕재에 드러누워 잠시 눈붙이는 일행들
(3) 검마산, 그 이름에 얽매이지 말라
"검마산을 오르려면 땀 좀 흘릴겁니다" 하는 그 산꾼의 말씨에서 묻어나는 동향인의 음색(音色)에서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끼며 검마산으로 향한다. 검마산 휴양림 갈림길, 갈미봉(918.2m), 검마산, 검마산 주봉 ..... 덕재에서 3시간여 숨가쁘게 오른다. 산에서도 서서히 폭염이 찾아들고 이마에 흐르는 땀은 온몸을 적신다.
오르는 봉우리마다 그 곳이 검마산인듯 여겨진다. 아니,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이 빚어내는 환영이요, 착각이다. 갈미봉(918.2m)에 올라 검마산이라 착각하고, 지형도상의 검마산(1014.2m)에 세워진 검마산 안내간판을 보고 진짜인 줄 알았더니, 바로 다음에 삼각점과 표지석이 있는 진짜 검마산 주봉(1017.3m)을 만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뭐 그리 이름이 중요한 것도 아닌데, 허명(虛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던 방증일거다. 검마산을 지나 임도로 내려서니 선두조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 산행은 장거리이니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함께 가자는 배려이다. 그렇다. 봉우리의 이름에 얽매이지도 말고, 속도에 집착하지도 않고 걷는 길이라면 무엇을 더 원하랴?
영양군에서 세운 (가짜) 검마산 정상의 표지판
(진짜) 검마산 정상(주봉)에 세운 검마산 표지석과 부산 낙동산악회의 표지기
(4)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7월의 태양아래 대지는 폭염으로 찌들지만 숲길은 산꾼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비록 숲에 가려 조망이 어렵지만, 보이지 않기에 더욱 숲에 젖어들 수 있다. 언뜻언뜻 숲 사이로 멀리 보이는 산, 그 산도 다른 산에 둘러싸여 있다. 이렇게 산이 다른 산을 감싸고 있다.
목월(木月)의 시를 읊조리며 백암산을 향해 걷는다.
산이 날 에워싸고 /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 아들 낳고 딸 낳고 /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 ..........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청록파 시인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인간다운 삶을 본다. 씨 뿌리며 밭 가는 삶, 들찔레와 쑥대밭을 가까이 하는 삶, 구름이나 바람과도 어울리는 삶이다.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 더불어, 자연과 일체화되는 삶의 모습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꾸밈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순수한 서정이 돋보이고, 자연에 대한 뜨거운 향수와 열망을 느낀다.
뿌연 안개속에 산은 겹겹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5) 백암산 정상을 다녀오며
백암산 갈림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백암산 정상을 다녀온다. 백암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전망을 기대했는데 옅게 드리운 안개속에 아쉬움만 삼킨다. 멀리도 걷고, 빨리도 가고, 많이도 보겠다는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 욕심이요, 그 욕심이 늘 아쉬움을 부른다. 백암산에 올라 가슴을 드러내놓고 숨을 크게 들이쉰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바와 다름이 없거늘 .......
백암산 정상에서의 세러머니
백암산 갈림길로 되돌아오는데 갑자기 습한 안개가 몰려든다. 순식간에 숲을 뒤덮는 안개에 몽유도원의 환영(幻影)을 본다. 운무가 짙어지니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자리하고, 실체보다 분위기에 더 젖어든다. 산 너머에 저녁노을만 진다면 연하(煙霞)의 선경(仙景)이 따로 없지 싶은데, 안개를 뒤따라 온 것은 노을이 아니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라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었다.
백암산 갈림길에 짙게 드리우는 운무, 결국 폭우로 변한다
(6) 천둥번개와 함께한 삼승령길
다시 돌아온 백암산 갈림길, 오후 1시가 가까워 온다. 새벽 3시부터 10시간 가까운 산행을 한 셈이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한 여름의 장시간 산행으로 몸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하지만 세시간 정도의 산길을 더 걸으면 아랫삼승령에 당도할 것이니 오늘의 대장정은 성공이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한 줄기 섬�한 바람이 스친다.
오후에 경북의 북부지방에 20mm~70mm의 장마비가 올 것이라던 일기예보를 떠올린다. 비를 대비하여 부지런히 배낭을 다시 꾸리고 신발끈을 묶는데 우두둑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온 산을 씻어 세상의 묵은 때를 몽땅 벗기려는듯 장대비가 마구 쏟아진다. 급히 배낭 속에 챙겨넣은 카메라가 걱정이지만, 후줄근히 비를 맞는 것이 폭염속에 걷는 것보다 한결 후련하다.
천둥번개와 우박을 몰고 올 조짐이 백암산 길에 짙게 드리운다
윗삼승령을 거쳐 아랫삼승령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원없이 비를 맞는다. 비옷이 있어도 이미 때가 늦었고, 그냥 그대로 걷고 싶다. 그 빗물이 폐부를 찌르고 뼛속 깊숙히 파고든다. 쏟아지는 빗속에 몸을 맡기고 묵었던 세상의 때가 말끔히 씻겼으면 한다. 천둥번개가 치고 숲속으로 벼락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맑아져 온다.
이어서 숲속에는 한 바탕 얼음잔치가 벌어진다. 얼음조각같은 큼직한 우박이 떨어져 숲길에 딩굴기 시작한다. 그래도 특별히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 무서운 것은 천둥번개나 우박이 아니다. 우리가 걷는 정맥의 마루금은 길을 잃고 헤맬 염려도 없고, 계곡의 급류에 휩쓸릴 위험도 없다. 그런데, 긴 시간 비를 맞은 몸은 서서히 얼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저 체온증이란 이런 것일까?
아, 한 여름에도 이렇게 몸이 얼어가는구나. 어두운 그림자가 이마를 스친다. 여름철의 저체온증 사고가 이렇게 나는구나. 비상조치를 해야 한다. 윗삼승령에서 가서야 배낭속의 고어텍스 자켓을 꺼내 입는다. 한결 안온하다. 체력이 고갈된 와중에서도 아랫삼승령까지 1시간여의 길을 빗속에서 쉬엄쉬엄 걷는다.
아랫삼승령에는 우리를 태울 노란색 버스와 누군가 예쁘게 가꾼 들꽃들이 반겨주고 있다. 원두막처럼 생긴 그늘집에는 버스기사가 알아서 준비한 따뜻한 라면국물이 몸을 덥혀주고...... 휴, 이제 살았다는 확신이 선다. 기사 아저씨, 감솨 !!!
아랫삼승령의 멋진 쉼터, 비도 잘 피하고 몸도 덥히고 깔끔히 청소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아랫삼승령에서 저시마을을 거쳐 버스로 1시간여 빠져나오니, 31번 국도에 닿는다. 그 천혜의 청정계곡이 벌써 그리워진다. 다음 산행은 다시 아랫삼승령에서 이어갈테니, 그 때는 하루 먼저 도착하여 계곡에서 야영하며 하룻밤 묵으며 여름하늘의 별을 헤아릴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했던 쇠나드리의 밤처럼 낙동의 추억을 새길 것이다.
상경 길에 봉화에서 들렀던 시골 된장집과 그 산나물, 영양고추장으로 비빈 비빕밥이 벌써 그립다. 다음 산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그 집의 비빔밥과 아낙의 구수한 농담 속에서 오늘 낙동 태극의 환종주를 다시 되돌아볼 것이다. 이번 구간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오랜 추억의 낙동길이 될 것이다. 낙동의 태극종주는 오래도록 가슴에 진한 여운으로 남을 것같다.
구수한 된장에 비빔밥이 띵호와, 봉화 강순화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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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일시] 2007년 7월 28일(토)-29일(일) 무박2일
[산행 구간] 한티재-추령-덕재-검마산-백암산(정상 왕복)-윗삼승령-아랫삼승령-(하산 : 저시마을)
[산행 거리] 30.7Km(백암산 정상왕복 1.5Km 별도)
[산행 시간] 12시간 42분(식사및 휴식 1시간 42분 포함, 백암산 왕복 30분 포함)
[산행 참가] 7명 (권오언,김길원,김성호,남시탁,박희용,이규익,이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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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행 기록]
2226 개포동 출발
0250 한티재(430m, 88번 국도) 도착
0308 한티재 출발
0414 우천마을(496m, 4분 휴식)
0503 추령(497m, 6분 휴식)
0528 635.5봉
0615 631.4봉(휴식및 간식 10분)
0700 덕재(임도, 16분 휴식)
0800 검마산 휴양림 갈림길
0846 갈미봉(918.2m, 헬기장터, 14분 휴식)
0930 검마산(1014.2m, 정상 안내판, 식사및 휴식 30분)
1019 검마산 주봉(1017.3m, 삼각점 병곡401)
1103 임도 / 차단기(10분 휴식)
1125 778.9봉(삼각점 병곡403)
1213 백암산 갈림길
1228 백암산 정상
1243 백암산 갈림길(12분 휴식및 간식)
1305 888봉
1350 942봉
1448 윗삼승령(임도))
1820 747.3봉(굴바위봉, 삼각점), 삼승바위
1550 아랫삼승령 도착
1620 아랫삼승령 출발
1630 기산리 저시마을
1700 송하리
1710 가천리
1720 삼거리(31번 국도)
1907 봉화 강순화 된장(918번 지방도, 저녁식사후 출발)
2015 풍기 IC
2050 제천 IC
2210 개포동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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