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산악마라톤 대회의 자원봉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함께 해 온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클럽멤버들과 이웃 클럽을 위해 1년에 한 번씩 청계산을 달리는 행사를 준비해왔다. 금년으로 세 번째다.
아침 일찍부터 청계산을 달릴 달림이들이 속속 모여든다. 모두 출발시키고 본부에서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는데 늦게 도착한 참가자가 있다. 그의 마음은 초조하고 초행이라 달리는 주로도 서툴단다. 카메라를 챙기고 자전거에 몸을 싣고 그를 앞장선다. 시민의 숲을 통과하는 구간까지 그를 안내하고 돌아서며 다시 단풍숲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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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도시의 길거리에 쌓인 낙엽을 구경하기 어렵다. 떨어지기 무섭게 쓸어치우는 진공청소차가 등장하고 나서 더욱 그렇다. 좀 더 여유롭게 보아주고, 기다리면서 즐기는 운취가 있을 법도 하련만, 그럴만한 낙엽길을 도시에서 찾기란 쉽지않다. 다행히 오늘 그 복을 양재 시민의 숲에서 누린다. 늦게 도착한 달림이 덕이다.
시민의 숲에는 늦단풍이 제철이고 형형색색의 잎들이 떨어져 만화(萬花)를 이루고 있다. 삶이 비록 각박하다하더라도, 떨어진 단풍을 좀 오래두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조화석습(朝花夕拾),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고 한 중국의 문인 노신(魯迅)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오늘 밤에는 그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도종환, 단풍드는 날 중에서 -
2007. 11. 17.
양재 시민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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