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젖은 두물머리에서
어둠 짙은 새벽 창가에 봄비가 내린다. 이 비에 함초롬히 젖어 있을 강가에 서고 싶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맑은 날의 새벽 물안개보다 촉촉한 비안개가 더욱 가슴을 적시지 않을까?
모두들 잠든 새벽 네시, 슬금슬금 찾아오는 봄비 속에 그 곳으로 간다. 석병의 산과 석개의 고개로 향하던 길은 새삼스레 멀어지고 가까운 그 곳으로 달려서 간다. 날을 바꾸어도 이런 날 다시 맞이할 수 있으려나 싶고, 옆에는 30년 벗이 함께하니 저절로 편안하다. 그의 뜻이기에 더욱 그렇다.
북한강을 따라 천천히 새벽 드라이브에 나선다. 어느 감각있는 건축가의 작품인지, 제법 독특한 건물에 오래도록 넋을 판다. 서종갤러리에도 들러 찾아오는 봄내음을 깊숙히 들이킨다. 두물머리는 빗속에 봄을 맞이하고 있다. 자욱한 비안개는 모든 것을 감싼다. 새로운 경험이다. 코흘리개 초등학교 입학날처럼 가슴은 그저 으쓱거리고 쿵당거린다.
두물머리에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4계절의 이름 가운데 봄만 한 글자로 단촐하다. 누구는 어~ 하는 사이 휙 지나간다고 짧은 이름을 붙였는가 했지만, 군더더기 없는 그 이름이 오히려 낫다. 단 한 글자이지만 외롭지 않고 정감어린 많은 뜻을 담고 있다. 봄은 부드럽고, 그윽하고, 포근하다. 꽃처럼 예쁘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계절이다. 그래서 그립고, 보고 싶어 눈물이 나는 이름이다.
두물머리에 찾아드는 봄의 소리를 듣는다. 묵은 단풍잎에 맺힌 빗방울이 새로돋는 꽃망울과 어울려 봄을 노래하고 그 속에 봄을 맞는 시인의 노래가 울려 펴진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나무가지 스치며 소리없이 봄은 온다. 아침 강가에 자욱한 안개 속으로 스며들듯이 봄은 온다. 다산(茶山)의 향기 가득한 양수리의 봄도 그렇게 찾아오고 있다.
돌아오는 길, 기와집 순두부보다 겨우 비가릴 정도의 허름한 집의 브랜드없는 수제 찐빵이 더 맛있더라. 셋이라 둘이 나누면 눈치싸움이 날 법도 하련만 하나로도 넉넉하다. 그저 그 옆집의 민물고기 파는 아저씨의 인심이 야박하고, 시퍼런 칼날 앞에 목숨이 경각이었던 붕어 몇 마리를 살리지 못함이 안타까웠을 뿐, 걸림이 없는 아침나절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생각을 나눈 정산(正山),
조선후기 실학사의 다산(茶山), 한국경제사의 아산(峨山), 한국정치사의 거산(巨山)이 모두 우뚝한 뫼(山)이지만, 바른 뫼(正山)인 자네의 감성도 결코 허명(虛名)이 아님을 알고 있다네. 함께한 시간 즐거웠다네. 고마우이, 친구야.
2008년 3월 23일 아침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마종기>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구상, 1977>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정약용(丁若鏞)
爾紀爾善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음이
至於累牘 여러 장이 되는구려
紀爾隱慝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將無罄竹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爾曰予知 네가 말하기를
書四經六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했으나
考厥攸行 그 행할 것을 생각해 보면
能不愧忸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爾則延譽 너야 널리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而罔贊揚 찬양이야 할 게 없다
盍以身證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以顯以章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斂爾紛紜 너의 분운함을 거두어 들이고
戢爾猖狂 너의 창광을 거두어 들여서
俛焉昭事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乃終有慶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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