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 13 - 다시 잇는 낙동, 할미꽃 수줍어하고
(1) 할미꽃 수줍게 핀 산길로
다시 낙동 길에 나선다. 12차 산행이후 거의 3개월만이다. 일상의 바쁜 일에 발목이 잡히는 일이야 그렇다하더라도 추위와 폭설은 핑계인 것을 알면서도 짐짓 무덤덤한 척 시간을 보냈다. 성원 정산 오언 성호와 월파 다섯이 오랫만에 뜻을 모은다. 단촐해서 좋지만, 후미대장 길원이 함께 못하는 아쉬움에 제용의 합류불발까지 겹쳐 안타까움을 더한다.
오랫만에 산으로 드는 마음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지난 2월 초 폭설에 파묻혀 있던 주왕산 질고개는 지금쯤 봄꽃이 만발해 있겠지? 그런데, 오랫만의 장거리 산행에 체력이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도 잠시, 나의 애마(愛馬)는 초고속으로 질주를 거듭한다. 중부내륙 고속도로는 거침이 없고, 넷이 곤히 잠든 사이 혼자 느끼는 속도감이 짜릿하다.
성법령에 애마를 두고 택시로 질고개로 이동하려던 계획은 택시기사가 가사령으로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그 곳에 승용차를 두고 질고개로 간다.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를 접어들면서 잠깐 딴생각에 길을 지나치고, 성법령은 택시기사가 길을 놓치고 ...... 차로 알바했으니 산길에서 알바하는 일은 없겠지 .......
길을 잘 안다던 택시기사는 우리를 태우더니 어디가 질고개인지 몰라 헤매고, 동료기사와 수차례 통화한 후에야 어렵사리 질고개에 내려 놓는다. 시간지체에 대한 요금할인은 커녕 약정했던 요금보다 더 달라는 경우는 또 뭐람? 아뭏던 길을 찾았으니 기분좋게 요금을 더 치루고, 산으로 든다.
들머리의 무덤위에 핀 할미꽃이 수줍은 듯 그 솜털을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이름이 할미일 뿐 그 볼의 수줍음은 새색시를 능가한다.
(2) 무명(無名)이라 호젓한 산길에서
질고개를 출발하여(10:10) 첫번째 봉우리에서 만난 산불감시초소의 수더분한 할아버지, 사람이 반가운듯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정겹다. 피나무재에서 출발한 정맥돌이들이 벌써 1시간 전에 지나갔다고 하니 우리는 꽤 늦은 셈이다. 그래도 길을 서둘 일은 없다. 형편되는 대로 하자. 대구에서 왔다는 4명의 산꾼들을 만나 잠시 동행하다가, 청송과 포항이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에서 앞질러 나간다.(11:30)
785봉에서 간장현으로 향하는 숲길에는 이제서야 진달래가 피고 있다. 철쭉은 아직 물 오르는 느낌이 없으니 여전히 겨울나무이다. 북쪽 서울의 진달래 꽃이 진지 이미 오래인데 남녘 산에는 이제서야 봄이 시작되고 있다. 햇살바른 곳에는 노랑제비꽃이 앙증맞게 피어 해맑은 웃음을 보내고 있다. 병아리의 노란 깃털같은 귀여움에 행여 밟기라도 할까 걸음이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다.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반겨주니 내 마음 설레고 발걸음 가볍지만, 한편으로 나 또한 너희들 아끼는 마음에 발걸음 조심스럽구나.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때가 있는 것이니 너 모습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싶구나. 설령 때가 되어 너희가 낙화(落花)가 된들 바람을 탓하거나 달리 아쉬움이야 있으랴마는 그 때까지는 오로지 너희를 마음에 두고 싶구나.
간장현은 옛고개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12:38). 옛고개는 옆으로 난 신작로(新作路)에 자리를 내어주고, 신작로는 다시 새로 뚫린 터널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옛 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대관령 옛길이 그러하고 죽령이나 조령 옛길이 그러하다.
이와 같은 고개의 윤회처럼 계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화하며 스스로의 자리를 물려준다. 꽃들도 때가 되면 떨어져 새잎과 열매를 위해 자리를 물려주고 제 갈길을 간다. 사람의 삶도 때가 되면 거침없이 제 자리를 비울 줄 알아야 한다. 그 때를 알아야 한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읊조리며 간장현을 지나 산비탈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분분한 낙화(落花) .......... /
지금은 가야 할 때, /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중에서
미처 세 시간도 걷지 않았는데 우려했던대로 몸이 점점 무거워져 온다. 통점재를 앞두고 소나무 그늘 아래 터를 잡고 점심에 막걸리를 곁들인다. 송운(松韻)을 즐기며 먹는 산행식은 언제나 산행의 묘미를 최고조로 이끌고, 몸과 마음을 회복시킨다. 40여분의 휴식 덕분에 사뿐한 걸음으로 통점재에 내려선다.(13:50)
통점재에서 1시간 가량 오르내렸을까? 가사봉(744.6m) 분기점이다(14:47). 낙동정맥에서 보현/팔공지맥이 가지치는 곳이다. 잠시 휴식한다. 맞은 편에도 우람한 산줄기가 북동으로 뻗어가고 있다. 내연산을 거쳐 영덕오십천으로 이어지는 내연지맥의 산세인듯하다. 다시 잠시 내리막 길을 걸으니 가사령이다(15:12). 아침에 세워둔 승용차가 반기는 듯.
잠시 망설이다 당초 계획대로 709.1봉을 향해 산행을 계속한다. 성호가 혼자 산악마라톤으로 달려 709.1봉을 찍고 성법령에 갔다가 도로를 따라 가사령에 되돌아가 승용차를 회수하여 성법령으로 되돌아오기로 하고, 나머지 넷은 쉬엄쉬엄 걷는다.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있을까?
산아래에는 가사령에서 성법령으로 이어지는 자동차 도로가 한눈에 들어 온다. 709.1봉에서 성법령으로 진출하니(16:15), 앞서 달려갔던 성호가 벌써 가사령의 자동차를 성법령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도 Sub3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모두 박수, 짝짝짝 !!!! 여세를 몰아 서울까지 달려라, 달려.
(3) 또 다른 낙동의 맛을 기대하며
오늘의 산행구간은 산(山) 이름이나 봉(峰)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은 하나도 없고, 무심히 오르내린 숱한 무명봉과 고개로만 이어지는 특이한 구간이었다. 정맥꾼이외에는 인적이 드문 재미없는 곳이지만, 일반인의 발길이 많이 미치지 않으니 오히려 그 호젓함에 매력이 더하는 산길이었다. 오랫만에 나선 산행이라 체력을 걱정했지만, 운행거리가 17Km에 불과해 잘 마칠 수 있어 다행이다.
또한 이번 구간에서 정맥길은 포항으로 접어들어 남진하기 시작했다. 낙동의 진수였던 경북의 3대 오지 청송, 봉화, 영양의 깊고 으슥한 지역을 벗어나 낙동정맥의 후반부 산행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번 구간으로 태백의 매봉산 분기점에서 부산 몰운대까지의 419Km중에서 208Km를 남진했으니 다음 구간에서 낙동의 하프라인을 통과할 것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낙동은 또 다른 맛이다. 올망졸망 유무명봉을 오르내리다가 영남알프스의 웅장한 산군을 만나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몰운대로 향하는 것이다.
성법령에서 포항으로 길을 향하는데 길가에는 어린 배나무에 하얀꽃이 피어나고 있다. 2년 전 윤지미산 가던 길, 북상주 나들목 연봉배밭의 눈송이 같던 배꽃이 떠오르고, 판화가 이철수의 10여년 전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저 배꽃 하얗게 지는 밤이면 세상의 근심걱정도 하얗게 털어버릴 수 있을지? 봄속에서 겨울을 만난듯 하얀 눈 송이같은 배꽃이 끝없이 밀려왔다가 산탄처럼 흩어진다. 배꽃 하얗게 지는 밤에 번뇌망상도 함께 버릴 수 있었으면 오죽 좋으랴? 이것조차 욕심이려니 ............
2008년 4월 21일
역삼동 펜타빌에서
월파(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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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지>
2008년 4월 20일(일) 당일산행,
권오언 김성호 박희용 송영기 이성원,
승용차 이용, 대치동-중부/영동/중부내륙/경부/포항 고속도로-지방도
0510 대치동 출발
1010 질고개
1130 포항시계 끝지점
1150 785봉, 헬기장
1200 785봉 출발
1238 간장현
1258 소나무 숲, 중식
1338 중식후 출발
1350 통점재
1428 776.1봉
1447 가사봉(744.6m), 보현/팔공지맥 분기점
1507 임도
1512 가사령
1530 599.6봉
1545 630.5봉
1550 안테나
1607 709.1봉, 헬기장, 비학/내연지맥 분기점
1615 (진출)성법령
(포항 기계 - 저녁)
23:00 역삼동 도착
보현지맥 166.8Km, 팔공지맥 120.7Km, 비학지맥 44.4Km, 내연지맥 42.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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