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 기자의 나무기행] ⑦부산 등나무 군락지 등운곡(藤雲谷)
• 나무도 때론 전쟁을 한다
발행일 : 2008.12.18 / 주말매거진 D4 면 기고자 : 송혜진
산다는 게 때론 전쟁일 때가 있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뒷자락에 위치한 등나무 군락지 '등운곡(藤雲谷)'. 봄이면 등꽃이 보랏빛 안개처럼 피어오른다는 숲이건만 입구에서 우릴 맞아준 건 팔을 벌리고 선 채 시체로 굳어버린 느티나무 한 그루였다. 주검으로 남은 고목(枯木) 위엔 흰 곰팡이와 무성한 독버섯이 소름처럼 돋아 있었다. 나무연구가 윤주복씨는 "등나무의 공격을 견뎌내며 겨우 버텼지만 끝내 숨을 삼킨 녀석"이라고 설명했다.
"여긴 아직 전쟁 중입니다. 다들 살기 위해 싸우는 중이죠."
나무들의 전쟁(戰爭). 등운곡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참혹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나무들을 만났다.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난 널 껴안았다… 등나무의 변명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등운곡의 첫 번째 쉼터인 '휴(休)' 근처에서 우리는 애써 몸을 틀어 올린 커다란 서어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몸통엔 거대한 구렁이가 휘감겨 있다.
맙소사, 눈을 비볐다. 구렁이는 다시 보니 등(藤)나무였다. 허리부터 목까지 서어나무를 압박하고 있다. 어찌나 세게 짓눌렀는지 거대한 등나무 줄기가 납작했다. 서어나무는 제 몸 위를 올라탄 등나무를 이겨내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틀며 팔을 하늘 위로 뻗어 올렸다. 빛 한 조각이라도 더 흡수해 살려고 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등나무는 아시다시피 홀로 설 수 없는 덩굴나무잖아요. 큰 나무줄기를 보통 이렇게 친친 감고 올라가는데, 이렇게 되면 제 아무리 덩치 큰 녀석이라도 목을 졸린 것처럼 서서히 죽어가죠. 서어나무나 졸참나무 같은 활엽수는 그래도 좀 오래 버티는 편인데, 소나무는 등나무를 쉽게 이기지 못하더라고요." 윤주복씨의 설명이다.
등나무가 제 몸통으로 팔을 뻗을 때부터 서어나무는 밤마다 악몽을 꾸어야 했을 것이다. 온 몸이 납작해질 때까지 등나무는 친친 몸을 늘이며 서어나무를 껴안고 놔주질 않았으니까.
참으로 잔인한 동거(同居)지만, 등나무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의 목을 조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등나무의 업보. 숲 곳곳엔 껴안을 나무를 미처 찾지 못한 등나무 가지들이 자기끼리 몸을 꼬면서 길게 그네처럼 늘어져 살아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우리는 만났다, 고로 갈등한다
전쟁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윤주복씨는 온 몸으로 얽힌 두 덩굴을 가리켰다.
"여기 작은 털이 난 녀석은 칡입니다. 매끈한 건 등이고요. 등과 칡이 이렇게 만나는 바람에 사랑도 미움도 시작됐겠죠."
갈등(葛藤)이란 말도 바로 여기서 나왔다. 칡 갈(葛), 등나무 등(藤). 등과 칡이 얽히고 설킨 모습을 보면서 옛 사람들은 복잡한 사정이나 부조화, 제대로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떠올렸던 것 같다.
한데 역설적이게도 등나무는 유서 깊은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날 어느 동네에 서로 짝사랑하던 총각과 처녀가 살았단다. 서로 고백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총각은 화랑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얼마 후 총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녀는 연못에 몸을 던졌다. 총각은 살아 돌아왔고 처녀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 뒤따라 연못으로 들어갔다. 훗날 연못가엔 팽나무 한 그루와 등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고, 등나무는 으레 그렇듯 팽나무를 온 몸으로 감싸 안았으며 자라났다고. 사랑과 갈등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뜻일까. 우리는 다시 또다른 상흔(傷痕)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싸워라… 그건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리 서로 미워해도 한쪽이 죽으면 싸움은 끝나기 마련이겠죠. 그게 세상 이치니까요."
윤주복씨의 말을 들으며 멈춰선 자리엔 시체가 즐비했다. 등나무들이 죽어 떨어진 모습이다. 그렇게도 괴롭히고 싸웠던 소나무나 참나무가 미처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면 끈덕지게 붙어 있던 등나무는 야멸치게 다시 다른 나무를 향해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왜 가끔 너무 미워했던 상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극심한 미움이나 처절한 싸움은 그래도 상대가 살아있을 때 가능한 것이니까. 사랑이 끝날 때도 사람들은 절망하지만 때론 미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아플 수가 있겠죠. 살아있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겨울바람이 휘휘 불었다. 나무들은 팔로 하늘을 가린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살아야 한다. 싸우는 게 지겨워도 목구멍이 포도청 같아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 등나무가 그렇게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게 인생이니까. 아니, 그게 산다는 증거니까.
●주소: 부산 금정구 청룡동 산2-1번지, 문의 (051)508-3122
●찾아가는 길: 부산역→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 5·7번 출구→범어사행90번 버스→범어사 입구로 가다 왼쪽 ‘등나무 군락지 등운곡(藤雲谷)’
도움말='나무해설도감'저자 윤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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