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자리/* 여백(餘白)

오랜 친구, 화산(華山)에게

月波 2009. 3. 13. 00:43

 

[오랜 친구, 화산(華山)에게]

 

 

화산(華山),

 

오늘 오후는 뜻밖의 즐거움을 듬뿍 받은 시간이었다네. 바쁜 공무(公務)에도 불구하고 조세박물관을 직접 안내하며 자상한 설명을 곁들이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네.

 

<신라장적>과 <돌쇠의 발괄>에 대한 설명이 특히 인상 깊었다네. 통일신라 시대의 세세한 세원(稅源) 관리에 놀라고, 억울한 조세의 즉결처분이라는 조선의 위민(爲民) 정신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다네. <돌쇠의 발괄>이 이문열이나 김훈을 만나면 아마 장편소설로 환생하겠지? 이렇게 얘기하면 천기누설인가? 계영배(戒盈杯)의 세밀하고도 조심스런 시연(試演)과 박대통령이 내린 견금여석(見金如石)도 특별한 기억이 될거라 의심치 않네.

 

영화 <갈매기의 꿈> 주제가를 들으며, 영상에 비치는 갈매기들의 비상(飛上)을 함께 보았지.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 여기 이 자리에 왜, 무엇으로 있는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갈매기가 난다. 점점 빨리 난다. 빛의 속도로, 무한 속도로 날아간다. 갈매기라는 육체적 형상에서 차원(Dimension)을 달리하면 더욱 빨리, 빛의 속도로 날게 된다. 더 넘어 무한 속도로 날 수 있다. 갈매기가, 우리가 무한속도로 난다. 빔 프로젝트를 통해 자네의 블로그를 보며 일상에서 일탈하여 우리들만의 짧으나 의미있는 동행(同行)이었지?

 

나중에 내 손에 쥐어준 시집 한 권, 그 속에 자네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집에 돌아와 시집을 펼쳐들었단다.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몰고 갈 때, 시는 인간의 한계를 깨우쳐 준다. 권력이 인간의 관심 범위를 좁힐 때, 시는 인간 존재의 풍요함과 다양성을 깨우쳐 준다."  케네디 대통령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추모행사에서 행한 연설문의 일부를 시집 앞머리에 적어두었더구나.

 

한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는 권력을 창출하는 사람들의 기여가 불가결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기여도 불가결하겠지. 그 속에 도끼 상소를 올린 최익현의 정신이 묻어 있을터이니. 본인보다 조직을, 현재보다 미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정이, 눈앞의 5년보다 앞날의 100년을 걱정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마음으로 공감한다. 자네가 건네 주었던 시집에서 한 편을 골랐다. 읽고 힘이 되었으면 한다.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져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 이 외 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화산(華山),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오늘 차담(茶談)이 끝날 무렵 자네가 논문집 서두에 손수 적어 나에게 건네주었던 글귀를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 제 28장의 그 글을  두고두고 내 마음으로 새길 것을 다짐하네. 힘이 있어 그것을 알되 유연함을 지키면 천하를 감싸는 골짜기가 되지 않겠느냐? 고맙다, 친구야. 

 

그리고, 친구야. 자네도 위민(爲民)의 길에서 더욱 승승장구하게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면서 .........

 

 

     2009. 3. 12.

     역삼동 언덕에서

     월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