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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오봉,여성봉) 가는 길에서

月波 2009. 3. 23. 07:59

 

도봉산(오봉,여성봉) 가는 길에서

 

 

 (1) 겨울의 침잠(沈潛)에서 깨어나며

 

엊그제가 춘분이었다. 밤낮의 길이가 균형을 이루는 시점이다.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굳이 자명종의 힘을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자연현상에 바이오리듬이 적응해가는 셈이다. 지난 겨울은 옥외활동을 자제하고 내면의 지적충만을 추구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해왔다. 이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력을 되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지난 주 열린 제80회 동아마라톤에서 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느리게 달리기 신기록이다. 가장 천천히, 가장 오래도록, 가장 많은 지인들을 만나며, 광화문에서 잠실까지 서울도심의 모습을 꼼꼼히 살피며 달렸다. 5시간 가까이, 42.195Km의 백오리 여행을 마치고 잠실운동장으로 들어서자 클럽멤버들이 이름을 연호하며 떠들석하다. 얼굴이 뜨거웠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빨리"를 추구하는 클럽멤버들이 "끝까지, 즐겁게" 완주한 이에게 보내는 갈채에 오직 감사할 뿐. 

 

마라톤 뒷풀이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이제 호남정맥을 시작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대간과 낙동을 했던 멤버들을 중심으로 쉽게 의견이 모아진다. 마침 4월 초에 호남정맥을 시작하는 산악회가 있으니, 이번에는 그 산악회에 합류하자고 결정한다. 그에 앞서 주말에 도봉산의 포대능선과 오봉, 여성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의 한줄기를 걸으며 체력점검 겸 결의를 다지자고 쉽게 의기투합한다.

 

 

 서울국제마라톤(제80회 동아마라톤)에서

 

(2) 나무의 물은 빛의 세상으로

 

이렇게 하여 일요일 아침 도봉산 망월사역에는 여섯명이 모여든다. 어렵사리 해장국 한 그릇 챙겨먹고, 원도봉 계곡을 따라 망월사를 오른다. 1년만에 이 길을 다시 걷는다. 엄홍길이 살았던 생가터는 산비탈의 좁은 땅에 여전히 폐가터로 남아있다. 계곡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다가 간밤에 내린 비와 꽃샘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그 옆에 생강나무가 노란 꽃술을 늘어뜨리며 봄은 자기 차지라고 우기는듯하다. 봄을 맞는 나무에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 물은 뿌리에서 나무밑동을 지나 나뭇가지로 솟구쳐 오른다.  땅속 어둠의 세상에서 밝은 빛의 세상으로 흐른다. 그것이 나무의 물길이다. 

 

 길은 최대한 직선을 지향한다
그러나 굽을 수밖에 없는 것이 길의 운명
길은 완만하게 몸을 틀고 그 굽이따라 물도랑도 휘었다


누가 봄볕에 이리도 잘 마른 길을 널어놓았을까
가랑잎이 바스락거린다
..........

나는 곧음과 굽음 사이에 난 길을 오르고
나무들은 길밖에 서 있다
나무를 만나면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 않고
나무를 타고 휘어진 길을 솟아오른다

물은 뿌리에서 나무밑동을 지나며,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세상으로 길을 건너고
...........

 

- 함민복 시인, <전등사 가는 길> 중에서 -

 

 

서두르지 앉고 쉬엄쉬엄 걸어 이마에 땀이 촉촉히 젖을 무렵 망월사에 도착한다. 해탈문에서 합장하고, 석간수 한 바가지 퍼 마시니 속이 절로 시원해진다. 망월사 선방으로 가는 길은 출입금지, 늘 세상과 절연한 채 굳은 마음의 수좌들만의 세상을 꾸리고 있다. 잠시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속인의 보잘것 없는 욕심일 뿐, 옅은 안개 속에 그 진리의 보물창고는 어제도 오늘도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 그 너머로 도봉산 포대능선의 암봉들이 안개속에 묻혀 있다.

망월사 선방 오르는길, 맑은 수좌들만의 거처이다

 

 

(3) 포대능선, 그 5감(五感)의 미학(美學)

 

포대능선에서 자운봉을 향해 암릉을 걷는다. 눈에 익은 길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한 무리 산객들이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산길을 앞서간다. 세상을 앞서가는 일이란 무엇인가? 빨리 가고, 먼저 오르는 길만은 아닐 것이다. 사물을 두루 살피는 다양한 안목(眼目), 사람을 폭넓게 만나의견을 듣는 귀(耳), 겉모습보다 상대방 마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후각(鼻),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남다른 생각(思) 등등, 그러한 일에서 앞서가는 5감(五感)의 미학(美學)을 배우고 싶어진다.

 

자운봉에 안개가 자욱하다. 예전이면 그 늠름함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겠지만, 그 옆에, 그 아래에 함께 호흡함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의 눈마져 안개가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니 ...... 도화지에 마음의 점 하나 찍고, 다시 암릉을 걷는다. 베네수엘라와의 야구경기(WBC) 중간소식이 들려온다. 선수들의 집중력이 돋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자질보다 태극기 아래 뭉친 그들의 무한능력에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애국심에 불을 지른 그대들이 있어 국민들은 한 없이 행복하노라.


 

 안개자욱한 포대능선에서

 

 

(4) 부끄러운 듯 살포시, 오봉과 여성봉

 

우이암과 오봉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택한다. 멀리서만 바라보던 오봉을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말로만 듣던 여성봉을 거쳐 송추계곡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걷고 싶다. 이 길 또한 한북정맥의 한 구간이니, 중도에  보류해둔 한북정맥은 이렇게 쉬엄쉬엄 꿰맞추기로 완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다. 오봉이 가까워진다. 끊임없이 비안개가 스쳐가고  오봉은 겉모습과 달리 숨은듯 내민듯 제 얼굴 내놓기를 부끄러워한다. 눈으로, 가슴으로, 카메라에 두루두루 담는다.

 

배고픔도 잊고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여성봉을 향해 총총히 걸음을 옮긴다. 주말의 근교산에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산인해다. 여성봉 가는 길의 숲속에 자리한 크다란 바위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사패산을 바라본다. 의정부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달리 송추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훨씬 기백이 늠름하다. 구름을 헤치고 나타난 햇살이 사패산 정상부의 화강암에 내리비친다. 그 찬람함과 황홀함이 과히 압권이다. 장수 막걸리 몇 통으로 목을 축인다. 

 

 오봉은 안개속에 숨바꼭질하고

 

 

여성봉에 닿으니 제법 햇살이 따뜻하다. 그 특이한 모습도 잠시, 뒤를 돌아 오봉을 바라본다. 여성봉에서 올려다보는 오봉은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듯 하다. 오봉을 배경으로 여성봉에 주저앉아 기념사진 한 장, 찰칵 ! 정산, 오봉도 여성봉도 둘다 잘 찍어야 하는거야. 알았제? 길을 돌리니 여성봉을 오르는 산객들이 줄에 줄을 이어 섰다. 이제 따뜻한 햇살아래 송추계곡으로 달려가는 하산길, 걸쭉한 하산주 한 잔이 기대된다.

 

구파발에서 종3(종로3가)으로 전철로 이동, 고등어 갈비에 막걸리 한 사발, 원각사지(탑골공원)에 청계천까지 배낭메고 돌아다녔다. 허허허, 서울생활 30년만에 처음으로 시내 한 복판을 배낭메고 돌아다녔으니 ....... 그제서야, 3월의 석양이 늬엿늬엿하다. 오랫만에, 멋진 하루! 동지들이여, 호남정맥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성봉에서 오봉을 배경으로 한 컷 !

 

 - 2009. 3. 22.(일)

 - 원도봉-망월사-포대능선-자운봉-우이암/오봉 삼거리-오봉-여성봉-송추계곡

 - 성원,정산,길원,성호,제용,월파

 

 

  역삼동 펜타빌에서

  월파 쓰다(사진 by 正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