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사리 예담촌의 고가(古家)
거제도에 볼 일이 있어 불원천리 길을 나선다. 작년 겨울이래 두어달에 한번 꼴로 거제도를 찾는다. 비지니스의 무거운 짐이 있으나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마음의 여유로움이 있다. 서울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는 길은 늘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백두대간 남덕유산을 가로지르는 육십령터널을 지나면 지리산 자락이 어머님의 품처럼 한눈에 다가오고, 경호강과 남강 줄기를 따라 엑셀을 밟지 않아도 절로 달리는 내리막 길에 핸들만 잡고 있으면 고향땅 진주가 맞이한다.
어머님의 가슴처럼 후덕한 지리산 자락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늘 마음은 훈훈하다. 산청 단성을 지날 무렵 길을 돌린다. 거제도에서의 약속시간에 2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잠시 지리산의 들머리 산청 단성의 남사리 고가촌(古家村)을 둘러보기로 한다. 원정매(元正梅)가 피었나 궁금하여 잠시 들렀던 지난 3월 초의 아쉬움을 오늘은 모두 풀고 가리라. 단성 나들목에서 불과 5분 거리이니 멀지도 않다.
따뜻한 봄햇살에 오래된 마을의 묵은 나무에서도 봄맞이 채비가 한창이다. 지난 3월 초, 700년된 홍매(紅梅)의 향이 그리워 겨울의 끝자락에서 찾았던 남사마을과 분위기가 사뭇 대조적이다. 고목에 잎이 나고 있으니 기왓장에도 윤기가 난다. 유명한 단성의 단감나무에도 새순이 돋고 있고, 마을을 감싸 흐르는 사수(泗水)의 물줄기도 신바람이 났다.
남사리(南沙里)는 500여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조선조의 전통적인 고택이 많으며 이 마을에는 매화와 고목이 많기로 유명하다.
(2) 이씨고가(李氏古家)와 회화나무
예담촌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이씨고가(李氏古家)를 찾는다. 성주 이씨 경무공파 이제(李濟)의 후손이 대대로 살아온 고택이다. 고가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오래된 회화나무가 고가의 내력을 말해주는 듯하다. 회화나무 고목의 그림자가 늦은 오후 햇살에 길게 드리우고 있다. 이태수 시인의 노래처럼 <회화나무 그늘>이 내 마음 잘 대변하고 있다.
길을 달리다가, 어디로 가려하기보다 그저 길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다가, 낯선 산자락 마을 어귀에 멈춰섰다. 그 순간, 내가 달려온 길들이 거꾸로 돌아가려 하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 길을 붙들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 백 년 정도는 그랬을까. 마을 초입의 회화나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오가는 길들을 끌어안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 따라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나처럼 뜬금없이 머뭇거리기도 했으련만, 두껍기 그지없는 회화나무 그늘.
그 그늘에 깃들어 바라보면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며 펄럭이는 바람의 옷자락. 갈 곳 잃은 마음은 그 위에 실릴 뿐, 눈앞이 자꾸만 흐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는지, 이름 모를 새들은 뭐라고 채근하듯 지저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여태 먼 길을 떠돌았으나 내가 걷거나 달려운 길들이 길 밖으로 쓰러져 뒹군다. 다시 가야 할 길도 저 회화나무가 품고 있는지, 이내 놓아줄 건지. 하늘을 끌어당기며 허공 향해 묵묵부답 서 있는 그 그늘 아래 내 몸도 마음도 붙잡혀 있다.
****** 이씨 고가(李氏古家)******
조선 태조 이성계의 셋째 사위였던 경무공 이제의 후손이 살아온 고택이다.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으로, 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 곳간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곳간채 뒤에 있는 사당은 보이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들보 5량으로 조성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일자형이며, 건넌방 툇마루는 대청보다 약간 높게 만들어졌고 그 밑에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당은 안채 부엌의 반대 방향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고택의 경우 같은 방향에 있다.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들보 5량으로 조성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청이 방 사이에 1칸을 차지하고 있는데, 안채와 마찬가지로 주거 용도가 중시되고 있고 평면도 안채와 비슷하다. 수장기능을 할 수 있게 방의 뒤 툇간을 넓게 잡아 집의 구조가 겹집형식으로 되고 있다.
경무공 이제(李濟)
1352년(공민왕 1년) 좌대언(左代言)·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했다. 이성계(李成桂)의 셋째 딸 경순공주(慶順公主, 神德王后 강씨 소생)와 혼인했으며, 1392년(공양왕 4)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정몽주(鄭夢周) 격살에 참여했고, 장인인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피살되었다. 세종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성주 이씨 경무공파의 중시조이다.
(3) 최씨고가(崔氏古家)
전주 최씨 고택으로 후손 최재기씨가 살고 있다. 사랑채만 개방되고 사랑채 좌우의 중문은 개방되지 않아 안채와 익랑채를 살펴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 고택 또한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으로,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 좌우에는 중문이 두 곳 설치되어 있다.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 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을 지날 경우 'ㄱ'자 담으로 차단되어 안채와 익랑채가 보이지 않게 되어 있는 구조로, 유교전통에 따라 남녀 생활공간의 분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고, 들보 5량으로 조성된 높은 8작지붕 건물이다. 뒤 툇간은 폭이 넓어 수장기능의 벽장이 설치되거나 방으로 분할되고 있다. 건물의 사용 자재들은 견실하고 이중 방문의 조각 장식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들보 5량으로 조성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채와 마찬가지로 겹집형식을 취하고 있다.
(4) 오천고가(烏川古家) - 연일정씨(延日鄭氏) 고택
남사리의 사양정사(泗陽精舍)를 비롯한 오천고가(烏川古家)는 연일정씨 후손의 고택이다. 사양정사는 한말의 유학자 계제(溪濟) 정제용(鄭濟鎔, 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산청 단성 남사로 이사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정사(精舍)로 1920년대에 지어졌다. 정제용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연일 정씨 지주사공파), 한말의 유학자인 후산(後山) 허유(許愈)와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利長書)를 작성한 면우(免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사양정사란 '사수(泗水)'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란 뜻이다. 여기서 '사수'란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를 감싸고 흐르는 개울을 사수라 부르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정사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건립이후 주로 자손을 교육하고 문객을 맞아 교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사양정사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서 천장이 높고 부재가 튼실하며 치목이 정교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하였으며 또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재료인 유리를 사용하여 근대기 한옥의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4칸의 광을 넣어 7칸의 장대한 규모로 구성한 대문채에는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 넣은 솟을대문을 달아 사양정사의 품격과 풍부한 경제력을 나타내었다.
****** 오천(烏川)은 포항 영일의 옛 지명인 연일(延日)의 본 마을 이름으로, 한때 연일정씨 또는 오천정씨로 불렸으나 오늘날 연일정씨로 통칭하고 있다. 그래서 남사마을의 연일정씨 고택에는 오천고가(烏川古家)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5) 하씨 고가(분양고가, 汾陽古家)
진앙 하씨가 32대 살아온 하씨고가는 '분양고가(汾陽古家)'로 불린다. 이 집은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 1303~1380)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그는 21세 때인 1324년에 급제하여 경주부윤, 문화찬성을 거쳐 진천부원군에 이르렀다. 이 집은 동학란 때 소실되어 그의 31대손인 하철이 새로 집을 짓고 '汾陽古家'라는 액자를 걸어 엤 명문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고택의 뒤뜰에는 원정매(元正梅)라 불리는 고매(古梅)가 있는데 고려시대에 원정공 하즙(河楫)이 심은 것으로 수령이 700여년이나 된다.
이집 뒷뜰에는 조선조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선생이 심었다는 수령이 600여년이 넘는 감나무도 있어 정취를 더한다. 지난 3월초 찾았을 때 원정매의ㅡ 옛등걸은 고사(枯死)하는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600년 감나무에는 새잎이 돋아나고 있다.
원정공은 다음과 같은 영매시를 남겼다.
舍北曾栽獨樹梅 집 양지 일찍 심은 한그루 매화
臘天芳艶爲吾開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피었네
明窓讀易焚香坐 밝은 창에 향불 피우고 글 읽으니
未有塵矣一點來 한 점 번뇌도 오는 것이 없어라
진양 하씨 대동보에 의하면 1377년 이후에 원정공은 몇간의 집을 짓고 '송헌'이라 이름하엿으며, "일찍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다"라고 적혀 있으며 그의 손자가 심은 감나무가 600년이 되었음을 볼 때에 매화는 수령이 630년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고매의 옛등걸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여 고사하고 옆에 새로운 싹이 나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분양고가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
600년 감나무(사양정사 앞 담장너머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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