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자리/* 심향(心香)

꽃과 잎의 침묵에서 듣겠습니다

月波 2010. 3. 13. 02:25

 

꽃과 잎의 침묵에서 듣겠습니다

  - 법정(法頂) 스님을 추모하며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이 새벽 잠자리에서 깨어납니다. 님이 길을 떠나시는데 편히 잠들 수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두렵습니다. 님이 가까이 안계시면, 무소유의 삶을 일깨워주시던 그 경책(警策)을 게을리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누구든 님을 쉽게 놓아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서재(書齋)의 창가에 앉습니다.

님이 전해주신 수많은 가르침이 서가(書架)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허전한 마음이 쉽게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母音>, <무소유>, <텅빈 충만>, <말과 침묵>,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에는 꽃이 피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홀로 사는 즐거움>, <아름다운 마무리>, <인연 이야기> 등이 서가에 가지런합니다.

원시경전인 <숫타니파타>. 비유 속의 이야기 세계 <화엄경>, 진리의 말씀 <법구경>,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등  님이 몸소 역경(譯經)하신 경전(經典)이나 주해(註解)하신 선서(禪書)도 서가의 한 켠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제 글을 통해서만 님의 숨결을 느껴야 합니다. 님이 들려주는 영혼의 모음을 이제 글로써 느끼고 새겨야 합니다. 지난 가을 성북동 간송미술관 가던 길에 길상사(吉祥寺)로 달려갔던 적이 있습니다. 문득 님의 법문이 그리워졌기 때문입니다. 님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서였습니다. 안거(安居)의 결제와 해제에는 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는데, 안타까웠습니다. 곧 쾌차하시리라 믿었습니다.

 

 

32년 전의 일입니다. 님을 처음 뵈었던 1978년 여름의 송광사, 그 7박8일 동안의 수련회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보조국사 지눌이후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僧寶)사찰답게, 그때 송광사는 효봉(曉峰)스님의 선풍(禪風)이 성성(星星)했었지요. 효봉스님의 큰 상좌인 구산(九山)스님께서 선법문(禪法問)으로 용맹정진의 화두(話頭)를 주시고, 막내 상좌인 님께서 아침나절에 불일암에서 본사(本寺) 수련회에 오셔서 경전 강론으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셨지요. 그렇게 참선과 염불로 철야 용맹정진하던 스무살 푸른 시절의 염원은 님이 계셨기에 지금까지 그 간절함을 잃지않고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새벽에는 삼일암(三日庵)의 구산스님 앞에서 먹을 갈고, 낮에는 불일암(佛逸庵) 가는 길 산죽(山竹)의 바람소리에 귀를 씻던 그 시절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질텐데, 오래 전에 구산스님이 입적(入寂)하시고 이제 님마져 가시면 이 일을 어찌합니까? 그 여름 새벽에 먹을 갈아 구산스님이 써주신 '佛' 字만이 저의 서재에 걸린 채,  석류 익어가던 그 해 여름철(戊午 榴夏)의 일을 일깨워줍니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글을 쓰시는 법정스님(1990. 12.) / 조선일보 DB 

 

 

작년 4월 셋째 일요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의 봄 정기법회에서 하신 님의 법문(法問)이 떠오릅니다.

자리에 앉으시면서, " 모두가 한 때이기에, 언젠가 내가 이 자리를 비우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더 오늘의 만남이 고맙고 기쁘게 느껴진다" 면서 법문을 시작하셨지요. 돌이켜보면, 님은 오늘의 일을 예비하셨지 싶습니다.

 

그리고 봄날에 피는 꽃과 잎들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요. 그 때의 말씀을 반추해봅니다.

"꽃과 잎은 우연히 피는 것이 아니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피어난다. 온갖 악조건을 견디고 시절인연을 만나야 꽃으로, 잎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이어서 말씀하셨지요. 그러하듯 "우리의 삶도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되돌아보라 "고. 봄꽃을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꽃으로 피어날 씨앗을 제대로 뿌리고 가꾼 적이 있느지 반문하라 "고 하셨지요. 이어서  "험난한 세월을 살면서 인고하며 가꾼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보시라"고 당부하셨지요.

 

그날 법문의 마무리가 기억에 또렷합니다.

"눈부신 봄날도 덧없이 갑니다. 오늘 미처 드리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는 꽃과 잎들을 통해, 그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들으시라"고.

어쩌면 그 말씀이 오늘의 작별을 예비하셨던 것인지요? 자꾸만 눈자위가 시큰해짐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제 꽃과 잎들의 침묵을 통해 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겠습니다. 꽃과 잎의 침묵에서 듣겠습니다.

 

길상사에서 행전을 묶는 법정스님(2009. 2) / 동아일보 이종승 기자

 

 

오늘 송광사에서 다비를 하면, 우리는 님의 육신과 작별합니다.

님께서 입적(入寂)하시기 얼마 전, <육신을 태워 남은 재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 뜰 앞의 철쭉나무 아래에 뿌려달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봄마다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꽃나무에 대한 보답이라시며 .........

 

이제 철쭉 피기를 소망하며 간절히 기다릴겁니다. 그리고 철쭉이 피었다는 소식 들리면 그 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철쭉이 산야를 붉게 물들이면, 님의 환생으로 여겨 님 만난 양 삼배하고 반기겠습니다.

 

님이시여,

육신의 병이 깊어 얽매였던 몸은 다비의 장작위에 떨치시고,  이제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훨훨 날으소서.

우뢰와 같은 침묵을 보이시고, 이제 <어린왕자>가 사는 그 별나라로 가소서

그리고, 왕생의 소식을 전해주소서.

 

 

2010. 3. 13.

월파(月波)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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