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 03] 진달래 밭에서 행복했노라
1. 산행 개요
1) 일 시 : 2010년 4월 18일(일) 무박산행
2) 구 간 : 낙남정맥 제 3구간(우곡사 갈림길 - 천주산 - 마재고개), 도상 거리 21.9 Km, 진입 0.7 Km 별도, 알바 2 Km 별도
3) 시 간 : 8시간 45분(알바 1시간 및 식사, 휴식 포함), 진입 20분 별도
4) 참 가 : 좋은 사람들 41인, (6인의 동행자 : *원, *파, *언, 길*, *호, 은*)
2. 산행 후기
(1) 산 들머리의 우곡사
새벽 3시 45분, 아직은 어두운 새벽이다. 우곡사의 벼락 맞은 은행나무를 잠시 살핀다. 500년 풍상(風霜)을 견딘 그 삶이 돋보인다. 수차례의 빙하기를 견디고 살아난 은행나무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도량석(道場釋)이 들릴 시간인데, 절간은 아직 고요하다. 앞마당의 약수 한 모금 입에 축인다. 폐부를 찌르는 그 물맛이 “이 물은요, 떠놓고 한 달이 지나도 괜찮심더." 하던 어느 보살의 얘기를 떠올리게 한다.
절간을 나서니 일행들은 벌써 산으로 들었다. 마루금으로 오르는 산길은 가파르다. 잠시 주춤하지만 입산(入山)하는 순간 평소의 내공에 스스로를 위탁한다. 감내할 체력이 든든한 시간이니, 일행의 꼬리가 안보여도 마음은 가볍다. 산행 초입의 마음 상태가 중요하다. 육신의 편안함은 근력의 단련 정도로 그 실상이 드러나지만, 정신의 안락함은 내면의 수련 정도로 본 모습이 드러나기에.
20분 가까이 땀을 흘리니 마루금에 몇 사람이 쉬고 있다. 그들을 추월해 곧바로 가파른 계단을 혼자 오른다.
우곡사의 벼락맞은 은행나무
(2) 초승달이 낫과 같아
첫 봉우리에 오른다. 산에는 어둠이 짙은데, 바로 아래 창원은 불야성(不夜城)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탄생한 계획 도시의 위용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저 벌판에서 이루어지는 산업 활동이 GNP의 몇 %나 되는가! 산업화를 성공시키고 정보사회, 지식사회를 선도한 이들에 대한 평가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능선을 걷는다. 바로 앞에 길*이 걷고 있고, 저 앞 암봉에 헤드랜턴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다.
정병산가는 길의 가파른 암봉에는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다. 자연 훼손에 대한 가차 없는 비난도 있고, 안전과 편익에 대한 최소한의 주장도 있다. 그대는 어느 쪽인가? 굳이 편을 가르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삶의 본질적인 화두(話頭)에 몰입할 시간이다. 새벽 산길에서는 시공(時空)을 초월해 오로지 <이 뭐꼬?>하며, 화두에 매달려야 한다. 홀연히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나뭇가지엔 그 흔적조차 없다.
정병산에 오른다. 하늘을 본다. 초사흘 아미월(蛾眉月)은 잠자리에든지 오래다. 그렇지, 초승달은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지. 저 멀리 낮게 이어지는 산마루를 본다. "초승달이 낫과 같아, 산마루의 나무를 벤다."고 했던, 곽말약(*)의 시가 떠오른다. <낫처럼 생긴 초승달이 산마루의 나무를 벤다.>는 그 기막힌 시적 은유(隱喩)에 새삼 감탄하며, 기다리던 일행과 만나 소목고개로 수직 활강한다.
(*) 곽말약(郭沫若, 1892-1978) 중국의 시인이자 사학자 (**) 新月如鎌刀(신월여렴도) 斫上山頭樹(작상산두수)
초승달이 낫과 같아(新月如鎌刀)
(3) 非山非野, 산도 들도 아닌 것이
소목고개를 지나면 마루금은 더 이상 높은 곳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고고함을 버리고 사람사는 세상으로 내려와 대나무 숲과 탱자나무 울타리를 벗삼는다. 도로를 건너고 마을을 지난다. 제 몸이야 할퀴고 찢어질지언정 낮은 세상과 한판 어우러진다. 창원(昌原), 이름 그대로 넓은 벌판이다. 그 벌판에 공장이 들어서고, 사람사는 집과 장터가 들어섰다. 마루금은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이어진다.
고개, 고개 또 고개를 건넌다. 이름하여 부치, 신풍, 굴현이라 한다. 그곳을 지나는 마루금은 종종 안개처럼 희붐하다. 뚜렷한 흔적이 없을 뿐더러 헝클어지기도 한다. 굳이 그 길에 얽매이려 않는다. 밭, 언덕, 과수원이 마을과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며 이리저리 앞으로 나아간다. 산도 아니요, 들도 아닌 非山非野의 길을 간다.
그 길에서 산을 생각하고 들꽃을 만난다. '산(山)이 산(山)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꼭 높아야 하고 험해야 하는 것인가? '꽃이 꽃답다'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예쁘고 고운 향기가 있어야만 꽃인가? 생김새든 향이든, 각각의 성품(性品)이 따로 있지 않은가? 신풍고개의 막걸리 한 사발과 굴현고개의 만개한 벚꽃에 잠시 취했다가 천주봉으로 향한다.
신풍고개 근처의 非山非野의 허수아비
(4) 복사꽃은 멀리서, 배꽃은 가까이서
천주봉 오르는 길에 진달래가 한창이다. 중간의 큰 바위에 올라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신풍고개에서 나지막한 북산을 넘어 굴현고개까지 마루금이 선명하다. 누구나 잘 아는 동요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 선생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창원 소답동으로, 그 작품의 무대이다. 그 길에 복숭아나 살구꽃이 피기 시작하고, 진달래는 피었다가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고 있다.
굳이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를 읊지 않더라도 충분히 선경(仙境)이련만, 이제 그 주변은 자연을 많이 잃고 인공의 흔적이 강해 아쉬움이 크다. '고향의 봄'을 흥얼거리며 천주산으로 향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
봄의 꽃들은 기별 없이 왔다가 기약 없이 가는 것인가? 법정(法頂)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가,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보기에 좋다. 복사꽃은 멀리서,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자태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고. 이어서 님께서 묻는다. "그대는 이 봄에 어떤 꽃을 피우는가?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스스로 어떤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는가?"
꽃마다 자태가 다르듯 사람도 각자의 인품이 다르지 않은가 ! 그대는 어떤 인품의 씨앗을 뿌리고, 그 꽃을 가꾸고 있는가? 님은 가셔도,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님의 말씀은 추상(秋霜)같은 경책(警策)으로 살아있다.
굴현고개의 벚꽃
(5) 달천동(達川洞)을 굽어보며
천주산으로 향하는 전망대에서 잠시 북쪽의 달천동(達川洞)을 굽어본다. 남인(南人)의 거목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체취가 농후한 곳이다. 멀리서 보아도 연분홍 봄꽃이 장관이다. 선비들이 좋아했던 매화대신 벚꽃이 달천동을 덮고 있는 듯하다. 그곳 달천정(達川亭)에서 허목이 눈앞의 천주산 자락을 쳐다보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얼마 전 다시 읽었던 책 한 권이 뇌리를 스친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역사학자 이덕일이 10년 전에 쓴 책이다. 그때 <이덕일>은 나에게 생소했고, 역사를 풀이하는 그의 논법 또한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대충 읽다가 접었던 책이다. 그러나 10년이 흐르는 동안 소위 문사철(文史哲)이 가슴으로 다가왔고, 단숨에 다시 읽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대척점에 섰던 남인(南人) 허목도 그 속에 있었다.
어느 시대이든 이념과 가치의 대립이 있다. 그것이 정치다. 이념이 가치를 승(勝)하면 민중은 고달픈 법이다. 이념이든 가치든 명리에 얽매이면 민중은 더욱 고달프고, 실용을 살피면 백성의 아픔은 덜했다. 그러나 유학(성리학, 주자학)에 근거했던 조선의 정치는 늘 명리가 실학을 뒤덮었다. 그래서 사대부와 달리 백성은 지독하게도 불행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숨 막히도록 답답했던 그 시절의 역사를 반추하게 했을 때, 그 동안 우리는 척화론(斥和論)의 가치에 매몰된 학습을 얼마나 했던가하고 자성을 했었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역사나 가치관은 실용보다는 명분에 방점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삶은 실용가치가 더욱 승(勝)했다. 그래야 우리 세대는 오늘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역사가 될 우리의 오늘이요, 현실이었다.
천주산에서 굽어보는 정맥길, 왼쪽 아래로 달천동(達川洞)이 있다
* 허목(許穆, 1595년~1682년) - 조선 숙종 때의 문신, 호는 미수(眉叟)
조선 붕당정치사에서 남인(南人)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인조반정으로 북인(北人)이 몰락하자 남인에 편입한 근기남인(近畿南人)이다. 조식(曺植)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 한강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다. 예송논쟁으로 서인(西人)인 우암 송시열과 대립했던 청남(淸男)이다.
(6) 알바, 알바, 진달래 밭에서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잠시 정신줄을 놓았나 보다. 천주산 정상에 머물던 일행은 벌써 천주산을 떠날 태세다. 얼른 사과 한 쪽 챙겨먹고 일행을 따라 하산을 서두른다. 그 아래 천주산 북서쪽 계곡은 천길이나 깊어 보이고, 외줄기 신작로는 실날처럼 가늘게 뻗어 있다. 천주산을 내려선다. 걷는 길은 갈수록 편안하다. 산행이 마무리에 접어든다는 생각에 한결 여유롭다. 이 방심(放心)이 초래할 뒷일을 그때는 몰랐다.
갈림길 하나를 만나, 직진하여 계속 능선을 따라 하산한다. 활짝 핀 진달래가 제 얼굴 보고 가라고 유혹하고, 그 옆의 넙적 바위가 제 품에 잠시 쉬었다 가라고 손짓한다. "그렇지. 그냥 지나가면 자연에 몰인정한 사람이 되는 거야." 명분은 또 있다. 천주산을 내려오다 만난 또 다른 일행도 따라오질 않고, 후미 산행대장도 뒤에 있다. 진달래 밭에서 풍성한 과일파티가 열린다.
천주산을 내려서는데 실날같은 도로가 .....
다시 얼마나 신나게 걸었을까? 숲길 양옆에 진달래가 활짝 핀 꽃 터널을 만난다.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일행들이 모여 진달래와 하나되고, 사진 찍느라 산길이 시끌벅쩍하다. 천주산 주변의 진달래가 추위에 화들짝 놀라 잔뜩 움츠린 샌님이라면, 여기 진달래는 연분홍 곤지 찍은 새 색시의 고운 얼굴이다. 사람이든 꽃이든 제 세상을 만나면 저렇게 활짝 피어나는 것이리니 .....
아 ! 그러나, 여기까지가 진달래 밭의 행복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불현듯 찾아오고, 펼쳐진 지도에는 '알바'라는 글자가 어른거린다. 천주산 정상을 향해 길을 되돌리는 아픔은 그나마 진달래 터널이 상쇄시켜 준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하는 자연의 가르침이다. 갈림길에 회귀하니 정확히 1시간의 알바다.
이제부터는 산악마라톤이다. 425봉을 가볍게 넘고 중지고개, 송정고개를 가로질러 마재고개까지 숲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3시간에 걸을 거리를 2시간에 달렸다. 다행히 제한시간에 마재고개 도착이다. 휴 ! 그리고, 이렇게 종점의 노래를 부른다.
"알바. 알바 ! 진달래 밭에 빠졌노라. 그래서 행복했노라." "달리고 달려 ! 양탄자 같은 숲길을 달렸노라. 그래서 더욱 행복했노라."
알바한 줄도 모르고 진달래 터널에서 행복했노라
2010. 4. 19. 월
알바의 추억을 되새기며
月波
[추신] 산에서 내려와 슬픈 소식을 접합니다. 서둘러 상경하여 조문했지만,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ㅈㅇ 아우님 !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마음 잘 추스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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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시간] 2010년 4월 18일(일)
0352 우곡사 (진입)
0412 우곡사 갈림길(마루금)
0430 전단산
0510 정병산
0530 소목고개
0600 창원CC, 대나무 숲, 탱자 울타리
0640 신풍고개 (10분 휴식)
0710 국도, 고속국도
0730 북산
0747 굴현고개
0810 천주봉 전 바위 전망대
0820 천주봉
0832 천주봉 돌탑(식사 30분)
0939 천주산 도착
0944 천주산 출발
1000 갈림길(알바 시작)
1010 진달래 바위(간식 10분)
1030 진달래 터널
1035 갈림길로 복귀 결정(알바 확인)
1100 갈림길 복귀
1135 425봉
1208 중지고개
1220 송정고개
1257 마재고개
1300 마재고개 출발
1400 식당 출발
1820 서초동 도착
1840 역삼동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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