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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04] 짧은 산행 긴 여운

月波 2010. 5. 2. 22:02

 

[낙남정맥 04] 짧은 산행 긴 여운

 

 

1. 산행 개요

 

  1) 일 시 : 2010년 5월 2일(일) 무박산행

  2) 구 간 : 낙남정맥 제 4구간(마재고개-무학산-대산-광려산-한티재), 도상 거리 15.6 Km

  3) 시 간 : 6시간 10분(휴식 60분 포함)

  4) 참 가 : 좋은 사람들 35인 (8인의 동행자 : *원, *파, *언, 지*,  *호, 은*, 제용, 재훈)

                - 제용과 그 아들 재훈이 처음으로 동행했다. 재훈은 중학교 1학년인데 아빠보다 더 잘 걸어 기우(杞憂)를 말끔히 씻었다.

 

2. 산행 후기

  

(1)  지령(指令)대로 산으로 들라! - 마재고개에서

 

" 5번 국도의 신호등을 횡단하여 그 옆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라! 이어서 우측 30여 미터를 걸어 1004번 지방도를 가로질러라!

  건너편에 시멘트 방벽이 있을 것이니 지체 없이 그 위쪽으로 올라가 경전선 철길을 넘어 산으로 진입하라! "

 

길과 길이 중첩된 마재고개의 낙남 4차 들머리 진입에 대한 지령(指令)이다. 그러나  버스가 대신 그 길을 건넜으니 첩보전 없이 어둠속에 조용히 산으로 든다. 숲 너머 서쪽 하늘엔 열 여드렛날의 달이 아직 잠들지 않고 새벽을 지키고 있다. 산으로 드는 마음을 다진다. 스스로 마음의 지령을 내리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체면이다.

 

" 희붐하지만 새벽이 밝아오니 이마의 랜턴은 굳이 밝히지 마라! 차라리 어둠에 빠져들어 목전(目前)의 길에 집중하라!

  어슴푸레함을 오히려 즐기며 스스로 마음의 불을 밝혀라! 그 속에 빛이 있고 길이 있나니 묵묵히 마음의 도(道)를 닦아라! "

 

그렇게 산으로 든다. 무학산 오르는 길에서 보이는 마산항 야경, 그 휘황찬란함에 잠시 넋을 잃는다. 무학산을 1Km 정도 앞둔 능선에서 진달래 밭이 시작된다. 그 꽃술 따다 입에 물고 길을 걷는다. 오르막에서 흘린 땀으로 지칠만하지만 새벽을 깨우는 야경에 힘든 줄 모른다. 한결 심신이 개운하다. '마음이 맑아지면 도(道)가 멀지 않다'는 얘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일출 직전의 무학산

 

 

(2) 마산(馬山)의 사람들 - 무학산(舞鶴山)에서

 

그렇게 새벽은 밝아오고 무학산(761.4m)은 가까이 그 속살을 드러낸다. 아침의 산은 언제 만나도 상큼하다. 동행하는 제용 아우가 "마산에 유명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 글쎄? 물산(物産)이 아니라 마산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서 답을 찾아본다. 최치원, 정구, 장지연, 이은상, 김춘수, 천상병, 김주열, 문신 ..... 도시의 역사가 길지 않아 문화적 유산은 덜하지만 근세의 인물들의 면면은 제법이다.

 

최치원, 학이 춤추는 형상이라 일컬었던 무학산(舞鶴山) 작명(?)의 원조다. 그가 남긴 흔적은 어딜 가든 있으니 산수 유람이 본업이었을까?

정구(鄭逑), 조식(曺植)에게 배운 남인(南人)으로 무학산 아래 그가 주인으로 모셔진 서원(書院)이 있다. 그의 유향(儒香)은 아직 살아있다.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사설로 목 놓아 통곡하게 했던 그의 무덤이 마산에 있다. 비록 역사의 평이 엇갈리지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로 시작되는 <가고파>의 노산 선생, 그의 향수(鄕愁)는 우리 모두의 향수이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의  시인. 잠시 마산중학에서 교편 잡으며 천상병을 가르쳤다.

천상병,  마산중학 재학시절 스승 김춘수를 만나 시재(詩才)가 발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일찍 저 세상으로 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라고 읊은 대로. 

 

김주열, 자유! 민주! 정의! 꺼지지 않는 민주함성에 불꽃을 당긴 3 15의 열사다. 그가 지핀 정신은 민주화의 도화선으로 길이 기억되리라. 

문   신, 마산이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로 마산과 서울에 그의 작품을 전시한 문신 미술관이 있다.

 

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제용 아우와 무학산을 오른다. 정상에서 때를 기다려 장엄한 일출을 맞이한다. 마산항의 불빛도 무학산의 일출도 마산과 함께한 그들이 있어 오늘 새벽 더욱 찬란했지 싶다. 그들의 면면을 되새겨 본다. 살아간 시대와 지향한 바가 달라도 마산에는 그들이 하나로 다가설 것이다. 시작과 끝에서, 겁과 순간으로 모두 만날 것이다. 

 

 무학산의 해돋이

 

 

(3) 진동리에 대한 파란 색 기억 - 대산(大山)에서

 

날이 밝았다. 다시 산길을 간다. 대곡산(516.1m)을 지나 쌀재고개로 내려섰다가 바람재를 거쳐 대산(608m)을 향해 걷는다. 569봉 이후는 좌측(남쪽)이 마산 진동면이다. 대산의 남쪽인 그곳에 진동고개라 부르는 곳이 있다. '진동리'에 대한 여러 기억이 되살아나고 제용 아우에게 그 기억을 들려주며 편안히 길을 걷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수년전의 일이다. 이념이 다른 양쪽이 진동고개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한쪽은 그 고개를 넘으려하고, 다른 한쪽은 사력을 다해 막으려했다. 한쪽이 고개를 넘으면 파란 세상이 빨간 세상으로 바뀌는 판국이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다른 한쪽이 파란 세상에 대한 신념으로 그 고개를 지켜냈다.

 

한국전쟁 때의 진동리 전투 얘기다. 진동고개를 방어했기에 마산, 진해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대한민국을 파랗게 지켰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진주에서, 전쟁의 상처가 미처 아물기 전에 태어난 나는 진동고개 전투 얘기를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3개월간의 적군 점령 하에 있었던 고향은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어야 했다. 파란 색 선호는 그 때 생긴 믿음이다.

 

서울에 30년 단골인 생선회집이 있다. 진동회집이다. 진동의 바닷가에서 잡은 생선을 매일 공수해 사시사철 입맛을 돋운다. 광어나 도다리보다 잡어들이 더 싱싱하고 맛있다. 규모가 커져 초기의 오붓함이 사라져 아쉽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그리워 종종 들른다. 무상한 세월에도 그 집의 맛은 여전히 파란 색이다. 믿음이란 그 한결같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대산에서 이어지는 광려산 능선

 

 

 

(4)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은?  광려산(匡廬山)에서(1)                                                    *  (바룰 광), (오두막집 려)

 

<광려산 정상>이라 팻말이 붙은 곳에서 일행이 모여 사진을 찍고 다시 능선을 걷는다. 광려산(匡廬山, 720.2m, 삿갓봉)에 이르러 넓은 벤치에 앉아 광려산(匡廬山)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중국의 여산(廬山)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개 속에 잠긴 중국 여산(廬山)의 아름다움은 인구에 회자되는데 소동파(蘇東坡)는 여산에 반해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다. 

 

     橫看成嶺側成峯  (횡간성령측성봉)   이쪽을 보니 고갯마루요 저쪽을 보니 봉우리일세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저마다 같지 않구려
     不識廬山眞面目  (불식여산진면목)   여산의 참모습은 제대로 알 수 없구나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다만 내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로고

 

우리가 흔히 쓰는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너무도 그윽해 그 참 모습을 알 수 없다>는 절구(絶句)는 이 시에서 유래한 것일 게다. 그렇다. 여산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리 보면 이렇고 저리 보면 저렇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고,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안을 보고 밖을 보면 모두 보았다고 하겠지만, 밖에서 보는 순간 안에서 본 것은 이미 다른 모습이 아닌가! 안과 밖, 옆과 곁,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을 한눈에 보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참모습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 그럴듯할 수밖에.

 

 광려산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지도상의 광려산은 화개지맥 분기점인 삿갓봉이다)

 

 

(5) 지금 있는 곳이 참 여산(廬山)일세  광려산(匡廬山)에서(2) 

 

그러나 어찌하랴? 산 속에 있어 여산(廬山)의 참모습을 알 수 없다면 산 밖에 나간들 여산의 참모습을 볼 수 있으랴. 하지만 소동파여. 그대가 본 것이 바로 여산의 참모습인 줄 어찌 모르는가? 그래서 현세의 학인 황보 문촌(文寸) 선생은 소동파의 '여산진면목'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더라. 지금 그대가 머무는 곳이 바로 참 여산이라고.

 
     成嶺成峯外廬山  (성령성봉외여산)   고갯마루 봉우리는 밖에서 본 여산이며

     高低不同內廬山  (고저부동내여산)   높낮이 같지 않음은 안에서 본 여산일세

     何識廬山眞面目  (하식여산진면목)   여산의 참모습을 어찌 알겠는가?

     只今身在眞廬山  (지금신재진여산)   다만 지금 나 있는 곳이 참 여산일세  

 
그렇다. 바로 이 자리, 내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참 여산이 아니겠는가. 산 아래 광산사(匡山寺)를 잠시 살핀다.  광산(匡山)이 곧 여산(廬山)이니 겉과 속이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알리며 오늘도 풍경소리 은은할 것이다. 그렇게 광려산(삿갓봉) 벤치에서 30분 가까이 한시와 한문을 논하며 시간을 보낸다.  함께 듣던 중1 재훈의 눈망울도 반짝인다. 영어보다 한시가 더 쉽지, 재훈아? 응, 아니라고? 오늘 산행 솜씨를 보니 금년 여름 일본 북알프스 종주팀에 동행해도 되겠더라. 함께 가자, 재훈아.

 

  광려산(삿갓봉)의 화개지맥 분기점, 여기가 지도상의 광려산이다

 

 

(6) 짧은 산행 긴 여운 - 한티재에서

 

광려산(삿갓봉)에서 낙남정맥은 화개지맥을 분기시키며 급전직하로 길을 낮춰 한티재로 이어진다. 마루금의 북쪽은 함안 땅이다. 낙남 서진이니 좌 마산 우 함안이다. 함안은 역사적으로 가야국 중 아라가야(阿羅伽倻)가 터 잡았던 곳이다. 그 옛터의 흔적은 다음 산행에서 더듬기로 하고 한티재에서 산행을 종료한다. 땀을 씻고 옷 갈아입으니 아침 10시가 조금 지났다, 산을 시작할 시간에 산에서 내려온 셈이다.

 

후미를 기다리며 잠시 한티재 마루금의 충렬공 이방실 장군의 태역비를 살핀다. 장군은 고려 공민왕 때 20만 무리를 이끌고 수도 개성을 침공한 홍건적을 평정한 인물이란다. 함안에서는 을지문덕과 이충무공에 필적하는 인물로 장군을 떠받든다고 하니, 함안 이씨의 중시조로서 손색이 없다. 맥주 한 잔하고 있는데 후미가 도착하고, '진동리' 바닷가로 이동해 생선회와 '화이트'로 목을 축이고 귀경한다.

 

오늘 산행을 되돌아본다. 산을 오르내리고 산에서 피고 지는 꽃을 보았지만 마음은 산 아랫마을과 그 사람들에 머물렀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풍광에 빠지기보다, 그 언저리에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과 그들의 역사를 생각하며 산길을 걸었다. 이번은 다른 구간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구간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 주변을 넉넉히 아우를 수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걷는 산행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내려선 한티재에는 연둣빛 봄이다

 

2010. 5. 2. 늦은 밤에

산에서 돌아와

월파(달무리)

 

 

[산행시간}

 

0400  마재고개 출발

0520  무학산 (30분 체류)

0625  대곡산

0646  쌀재고개

0706  447봉(5분 휴식)

0735  윗바람재

0755  광산 먼등(608봉)

0807  대산

0903  광려산

0927  광려산 삿갓봉(지도상 광려산, 화개지맥 분기점, 25분 체류)

1010  한티재

 

1110  한티재 출발

1400  진동 출발

1800  서울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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