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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07] 운무(雲霧) 가득한 숲길에서

月波 2010. 6. 21. 01:00

 

[낙남정맥 07] 운무(雲霧) 가득한 숲길에서

  

1. 산행 개요

 

  1) 일 시 : 2010년 6월 20일(일) 무박산행

  2) 구 간 : 낙남정맥 제 7구간(큰재-무량산-대곡산-천황산-백운산-봉대산-돌장고개, 도상 거리 27.2 Km(실거리 32.8Km)

  3) 시 간 : 09시간 55분(식사, 휴식 90분 포함)

  4) 참 가 : 좋은 사람들 33인 (8인의 동행자 : 오리, 성원, 월파, 길원, 은영, 지용, 성호, 제용)

 

2. 산행 후기

 

(1) 운무 속의 새벽 숲길


성큼 찾아온 더위로 고생했던 지난 산행의 기억을 떠올린다. 일요일에 남부지방은 비가 예보되어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며 산길에서 옷깃을 여미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성하(盛夏)의 장마가 시작되는 것이다. 뙤약볕보다 비를 촉촉이 맞으며 걷는 숲길이 오히려 편안할거라는 생각으로 산으로 향한다. 얼음냉수와 먹을거리를 두 배로 준비하고.


큰재 가는 길에 새벽부터 버스가 알바를 한다. 좁은 길에 회차(廻車)를 못해 안개 속에 후진하는 묘기 끝에 간신히 도착하니, 이번에는 랜턴이 말썽이다. 모두 출발한 뒤 성원 형과 안개 속에 길을 더듬어 무량산(無量山, 581.4m)으로 향한다. 고성의 진산(鎭山)이란다. 오리무중의 숲길에 희붐하게 아침이 찾아든다. 비안개 내린 숲은 아스라하여 느긋하고 편안함을 안겨준다.

 

오늘은 원경(遠景)을 버리고 근경(近景)을 벗하여야 하리라. 눈앞에 보이는 나뭇잎, 풀, 꽃과 교감하며 걷자. 30Km의 장정이지만 운무(雲霧)가 함께하면 무엇을 두려워하랴. 다행이 일기예보가 빗나가 비는 내리지 않으니 습(濕)하더라도 숲향을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운무 가득한 새벽 숲길

 

 

(2) 갈천리에 대한 기억들


화리치를 지난다. 오른쪽 아래에 고성의 청학동이라 불리는 갈천리 종생(宗生)마을이 있다. 여양 진씨(驪陽 陳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예부터 깊은 골짜기에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 꽤나 알려진 곳이다. 늦봄의 야생화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 가보고 싶은 곳 많아도 운수납자(雲水衲子)인들 모두 살필 수 있으랴. 앞뒤에서 길을 재촉하니, 어느새 대곡산(542.8m) 정상에 이른다. 낙남의 최남단이다.

 

잠시 지도를 살핀다. 대곡산에서 낙남은 남진을 끝내고 서북진을 시작한다. 서서히 지리산 영신봉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산은 방향만 틀 뿐 아직 그 높이를 조절한다. 지리산 영신봉(1652m)을 향해 숨찬 오름을 앞두고 고성과 사천, 진주를 지나며 낮은 세상과 좀더 어울리는 것이다. 안개가 자욱한 숲길이 호젓하기만 하다.

 

가리고개(추계재)에 내려선다. 갈천리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지난다. 갈천에 고성지역 서원의 본산인 갈천서원이 있다. 허기가 찾아온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며 잠시 서원(書院) 얘기를 나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조선시대 서원의 역할, 양반사회의 지배구조, 왕권을 넘어섰던 붕당정치사에 대한 얘기를 섞는다. 막걸리 한 통 비우고 식수를 챙겨 길을 서두른다. 오늘 갈 길이 멀지 않은가.

 

갈천서원

 

 

(3) 의상대사의 유흔(遺痕)들

 

가리고개에서 천황산(342.5m)을 가뿐히 오른다. 왼쪽 숲 아래로  고성-사천을 잇는 국도(33번)가 얼핏 보인다. 그 건너편 무이산 자락은 아직 안개 속에 아련하다. 무이산 절벽에 자리한 천년의 암자 문수암을 잠시 떠올린다. 매년 1월 고성에 마라톤 하러오면 종종 들리곤 하던 곳이다. 그 빼어난 절경이 과히 압권이다. 이 땅의 산수간(山水間)에 그런 절경은 찾기가 쉽지 않다. 

 

문수암은 의상대사의 유흔(遺痕)이 배어있는 곳이다. 의상대사가 구도행각 중 비몽사몽간에 노승(관세음보살)을 만나 그 가르침대로 걸인으로 화현(化現)한 문수보살을 만나 개창(開創)했다는 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눈 맑고 마음 열린 사람은) 법당 뒤 석벽사이에서 천연의 문수보살상을 볼 수 있다. 스스로 잘 다스리면 불가능한 일이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고성 근처에 의상대사와 인연 깊은 곳이 많다. 낙남 5차의 오곡재 근처 미항산 절벽에 대사가 수도했던 의상대가 있고, 낙남 6차에 먼발치로 지나친 연화산의 옥천사도 대사가 화엄(華嚴) 세상을 꿈꾸며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도(道)에 시(時)와 처(處)를 가리랴마는, 마음속에 사자를 길들여 본래면목을 찾는 일에 더러는 연(緣)의 깊이가 자리했을까? 조금씩 비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문수암 지붕 너머의 남해 바다

 

 

(4) 척번정(滌煩亭)이 어디인가

 

배곡고개를 지나 몇 개의 무명봉을 오르내리며 고성 백운산(일명 대곡산)으로 향한다. 걷는 길의 왼쪽은 고성군 상리면이다. 그 상리의 면소재지가 척번정리(滌煩亭里)라는 마을이다. 공룡나라 고성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제법 비안개가 걷히고, 숲 사이로 넓은 벌판과 마을이 조금씩 보인다.

 

척번정(滌煩亭), 한자의 훈(訓)을 풀면 씻을 척(滌), 번뇌 번(煩), 정자 정(亭)이다. 번뇌를 씻는 곳이라는 뜻인가. 그 마을 이름이 척번정이니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이란 뜻일 게다. 그렇다면 살기 좋기가 하늘아래 첫 동네이지 않은가. 팔도강산 곳곳에 길지(吉地)가 있고 승지(勝地)가 있으니 여기 척번정에도 지세를 따라 사람들이 모였으리라.

 

이 마을에서 어제 오늘 농주(農酒)와 국수를 나누며 권농(勸農)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울리는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어제 서울을 출발하기 전에 들었다. 어쩌면 오늘은 산줄기를 걸을 일이 아니라 저 척번정의 벌판으로 달려가 '고성 농요(農謠)' 한 가락 목청 돋우어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숲 너머로 농요 보리타작(도리깨타작)소리 들리는 듯하다.


   자! 보리타작 한마당 합시다. / 어-화, 어-화, 보리를, 보고서, 떼리라 / 보리가 이색이 붙는다, 이색이, 안붙거로, 심차게 떼리조라

        (*) 떼리라 - 떼려라, 이색이 - 이삭이, 안붙거로 - 안붙게(붙지 않도록), 심차게 - 힘있게, 떼리조라 - 떼려달라(떼리거라)

 

투박하면서도 은근히 정감이 묻어나는 서부경남 특유의 사투리로 농요 한 자락 부르면 걸쭉한 농주 한 사발 목에 절로 넘어갈 텐데, 아쉽다.

지금이 보리타작 철일 텐데, 요즘 논밭에 보리는 심는지, 심어서 채산(採算)은 커녕 일용할 양식은 되는지? 옛 풍습도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식도 세월 따라 바뀌고 그 터전에 남은 이의 삶은 곤궁하기만 하지 싶다. 그래도 그 땅에 머무르는 사람의 마음이라도 편해야 할 텐데.

 

                                                                                 농요 보리타작 한마당                                      <자료 사진>

 

 

(5) 솔향기 가득한 봉대산에서

 

또 다른 대곡산(391m, 고성 백운산)을 지나 부련이재로 향한다. 대곡산이든 백운산이든 도처에 그 이름이 있으니, 7080 세대, 아니 70 세대의 "철수야 영희야 놀자" 쯤 되지 싶다. 계곡이 깊으면 대곡(大谷)이요, 그 산 위로 구름 떠가니 백운(白雲)이라. 그럴 듯하면서도 산 이름 치고는 별로 흡인력이 없다. 어쨌든 오늘 길의 2/3는 걸었지 싶다.

 

부련이재에서 후미의 일행을 기다리며 마냥 시간을 보낸다. 30분은 쉬었으리라. 그들을 만나 식수 확인을 하고는 먼저 길을 나선다. 페이스를 조절하며 앞서 걸어야 할 것 같다. 양전산을 지나 고성 땅을 벗어나 좌 사천, 우 진주로 접어든다. 그 갈림길은 이름 없는 봉우리다. 고성, 사천, 진주의 세 고을(鄕)이 만나는 곳이니, 삼향봉(三鄕峰)이라 불러볼까? 

 

봉대산(409m)을 지나니 길은 마냥 편안해진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솔향이 그윽하고 송운(松韻)이 귓전을 스친다. 객숙치(客宿峙)를 지나 무명봉을 이어서 걷는다. 고개가 워낙 높아 하룻밤을 자고 넘어야 한다고 객숙치라 했다지만, 진정 그 고개의 높이보다는 주변의 솔향이 가득하니 산객은 그저 흥겨울 뿐이다.

 

솔향기 가득한 숲

 

 

(6) 삼(麻) 그리고 길쌈 

 

솔숲에 <죽곡리 삼베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함께 걷던 은영과 삼(麻)과 길쌈에 대한 애환을 얘기하며 편안히 숲길을 걷는다. '길쌈'이 뭔가. '길쌈'은 삼베, 모시, 비단 등 피륙을 짜는 일이다. 그중 삼베 '길쌈'은 옛날 농촌 아낙들의 여름 생업이었다. 그런데 '길쌈'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적어도 불혹을 넘어 지천명이 된 사람이라야 '길쌈'을 알고 '길쌈'을 본 적이 있는 세대다.


'길쌈'은 참 힘들고 고생스런 일이었다. 농촌 아낙의 애환이 서린 작업이기도 한데, 그 길쌈의 풍습을 재현하는 마을이 있다니 신기하고 의아하기도 하다. 길쌈을 해보았던 고령의 할머니가 아니고서는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삼나무 잎이 대마초(大麻草)인지도 모르고 삼나무 껍질 삼던 일을 지켜보던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삼을 삼고(잇고), 물레를 돌리고, 실타래에 감는다. 삼을 이으려면 줄기 한쪽 끝을 이빨로 갈라 둘로 나눈다. 그리고 다른 줄기 끝과 허벅지에 대고 손바닥으로 차례로 밀어 연결시킨다. 손과 허벅지는 벌게지고 피가 나다가 굳은살이 박인다. 한 올 한 올 이은 실이 한 소쿠리가 되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러다 보면 밤을 새기 일쑤다.


"각시야 자자아, 각시야 자자/ 밤중 새벽별이 다 넘어 간다/ 근 삼가래(걸어놓은 삼갈래) 거둬놓고/ 각시야 자자아, 각시야 자자/ ‥‥‥"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밤새 길쌈질을 시킬 때, 잠 못 자고 각시를 기다리는 신랑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는 길쌈 노래다. 사실은 신랑 곁으로 가고 싶은 각시의 심정을 담아 길쌈하던 아낙이 부르던 노래다. 그 얘기를 하며 숲길을 걷는다.

 

                                  길쌈하는 할머니                      (자료 사진>

 

마지막 임도를 앞둔 마지막 숲길에서 앞뒤의 일행들을 부지런히 챙기는 성원 형과 성호 아우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고맙게 느껴진 하루였다.

마지막까지 일행을 챙겨주신 백두 산행대장의 넉넉한 아우름이 있어 30Km가 넘는 여름 산행이 가능했지 싶다. 깊이 감사드린다.

산행 내내 앞뒤에서 동행한 은영과 성호, 힘든 산행을 끝까지 완주한 제용 아우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더운 여름, 힘냅시다.

 

 

2010. 6. 20.

30여Km의 장정에서 돌아와

월파(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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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고성(固城) - 공룡나라와 소가야의 옛터

 

낙남 6구간과, 7구간은 경남의 고성(固城) 땅을 좌우로 벗 삼아 걸었다. '고성(固城)'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천연기념물 411호인 공룡발자국 화석이다. 그러나 낙남의 산줄기와 다소 떨어져 있어 이번의 낙남산행에서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고성읍에 있는 소가야의 유적이나 당항포 전투의 유흔을 찾는 일도 언감생심이었으니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일은 애당초 욕심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 마라톤에 입문하게 된 곳이 고성(固城)이다. '이봉주 훈련코스 마라톤대회'라는 이름에 혹해(사실은 가까운 통영에서 생선회나 한 접시하자는 정산의 꾐에 빠져), 트레드밀에서 5Km 몇 번 달려보고 엉겁결에 21Km를 고성에서 처음으로 달렸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스스로도 감격스러워 했던 일이 벌써 9년 전이다.


그 인연으로 매년 1월에는 고성으로 달리러 간다. 하프(21Km)를 뛰기도 하고 풀코스(42Km)를 달리기도 하지만 늘 마음은 잿밥에 있다. 싱싱한 해산물과 고성 상리면의 문수암 탐방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그래서 낙남의 고성구간을 임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그러나 아직 공룡의 발자국 구경을 못했으니, 이제는 청년이 된 아들 녀석에게 티라노사우루스(육식), 브라키오사우루스(초식)를 얘기하던 일도 이제 먼 나라 얘기다.

 

굳이 '중생대 백악기'라는 까마득한 옛날로 돌아가 공룡의 발자국을 찾지 않더라도, 1천 5백여 년 전 고대사에 등장했던 가락국의 여섯 나라 중 소가야의 흔적에서 역사의 숨결은 느낄 수 있으리라. 소가야의 도읍이었던 고성읍에 자리한 송학동 고분군은 마라톤대회가 있을 때마다 눈짓으로 보곤 했다. 구릉에 7기의 무덤이 있는데 대체로 6세기 전반께 축조된 소가야의 왕릉이라고들 한다.

 

다음에 고성을 찾을 때는 산 마루금이 아니라 산 아랫마을을 유유자적하는 꿈을 꾸며 고성을 떠난다. 다음은 정든 진주 구간이다.

 

 

돌장고개로 내려서는데 고속도로가 길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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