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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08] 진주라 천리 길, 고향의 산하(山河)로

月波 2010. 7. 5. 09:22

 

 [낙남정맥 08] 진주라 천리 길, 고향의 산하(山河)로

  

1. 산행 개요

 

  1) 일 시 : 2010년 7월 4일(일) 무박산행

  2) 구 간 : 낙남정맥 제 8구간(돌장고개-무선산-와룡산-진주분기점-실봉산-유수교, 도상 24.5 Km(실거리 26.9Km), 누적 179.8/239.9Km

  3) 시 간 : 8시간 30분(식사, 휴식 60분 포함)

  4) 참 가 : 좋은 사람들 36인 (8인의 동행자 : 오리, 성원, 월파, 정산, 은영, 성호, 제용과 그 아들 재훈)

 

2. 산행 후기

 

(1) 내 놀던 옛 동산에

 

낙남 8차 진주 구간이다. 태어나 유년(幼年)을 보낸 그 산하(山河)로 가는 길이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몸은 마루금을 걸을지라도 마음은 아마 남강을 따라 산 아랫마을에 머물 것이다. 산이야 지리산 청학동쯤 가야 눈에 보일 테고, 남강의 촉석루를 보며 비봉산 아래에서 푸른 꿈을 키우던 풋풋한 시절로 원상복귀(?)하고 싶은 갈망(渴望)이 있는 것이다.

 

갈망(渴望)이란 간절한 소망이다. 나이 들수록 소망(所望)하는 일보다 단념(斷念)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단념'이란 무엇인가.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때 집착(執着)하지 않고 슬며시 물러날 수 있는 여유(餘裕)가 '단념'이다. 젊은 날의 단념은 포기로 연결되나, 나이 든 후의 단념은 바로 '여유'가 아닌가. 그러나 옛 추억에 대한 갈망을 누가 쉽게 단념(斷念)하리.

 

'진주라 천리 길'이라 했다. 무상(無常)한 세월에,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서울-진주를 3시간 남짓에 달리게 한다. 나만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진주 본가에서 서울 집까지 Door to Door로 Sub 3 (3시간 이내 완주)를 몇 번 했다. 과속은 금물이라, 자랑할 일은 아니렷다. 아무튼 그 천리 길을 (뻥을 좀 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다. 독일-아르헨티나 축구 덕(?)에 버스 속에서 잠 한 숨 못자고.

 

고성(固城)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인가. 버스는 고성의 연화산 T/G를 거쳐서 진주 금곡의 돌장고개로 향한다. 연화산 T/G가 있는 고성 영오면 오서리와 돌장고개가 있는 진주 금곡면 두문리는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옛날부터 오서와 두문은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어이! 진권아, 내 말 맞제?" "하모 하모"  진권은 금곡 촌놈이요, 죽마고우(?)다. 죽치고 마주앉아 고스톱 치던 친구(?)  ㅋㅋㅋ

 

진주성 촉석루와 남강

 

 

(2) 조심스레 산으로 들다

 

미명(微明) 속에 안개비 자욱한 돌장고개를 출발한다. 어둠과 침묵이 공존한다. 새벽 산길엔 무언(無言)의 질서가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 사람의 뒤를 따라 줄지어 산길을 오른다. 서로의 랜턴 불빛에 의지해 앞뒤에서 묵묵히 걷는다. 딱히 바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질서를 따른다. 그러다가 앞 사람이 길을 비켜주면 그 때서야 앞서간다.

 

운무 가득한 숲을 계속 걷는다. 하늘이 툭 트인 봉우리에 서서 먼 곳을 조망하고 싶은 마음이다. 낮은 산이라 하여도 오르내리는 길이 웬만하니 얼굴에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란 여의치 않다. 날씨가 습한 7월의 산행이니 더욱 그렇다. 습해서 땀이 흐르고 더워서도 땀이 흐른다. 의사는 내게 이렇게 권했다. “땀 흘리는 운동을 한 달 정도 삼가 했으면 좋겠다"고.

 

아니, 땀 흘리지 않는 운동이 있나요? 침대에 그냥 누워 있어도 이마에 땀이 흐르는 한여름에. 실은 “가벼운 산보 정도의 운동만 하라”는 말씀인데, 마음이 답답하여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낙남산행을 갈 거냐는 제용 아우의 물음에 “심한 운동만 아니면 괜찮다”고 의사가 말하더라고 했더니 ”형님, 우리가 하는 산행이 과격한 운동 아닌가요? “ 하며 웃었다.

 

수술 후 열흘만에 의사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산으로 드니 속으로 걱정도 되지만 숲에 발을 디딘 순간 기분은 날아갈 듯하다. 식염수와 비상약은 챙겼으니, 별탈없이 유수교까지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늘은 악휘봉의 귀염둥이 재훈이가 북알프스 원정을 앞두고 동행했으니 함께 재미난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안개비에 이슬 맺힌 나뭇잎

 

 

(3) 여기가 산이야, 언덕이야?  

 

1시간여 만에 무선산(277.5m)에 오른다. 어라! 오늘의 최고봉이 겨우 300m도 안된다고?  그저 먹기다. 낙남산행에서 처음으로 선두그룹과 동행했다. 다시 길을 간다.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허리를 낮추며 이런저런 고개를 건넌다. 과수원을 통과한다. 알맞게 익은 자두가 탐스럽다. 새콤달콤한 자두가 자꾸 길을 멈추게 한다. 재훈에게 과일 서리하던 옛 얘기를 하며 과수원길을 걷는다.

 

잠시 알바 ! 젖소축사, 농막, 산불감시초소를 지난다. 마루금은 파헤쳐지고 세상과 뒤섞이니 갈길 찾기가 오히려 민망하다. 사람 내음이 난다. 아침식사 후 와룡산으로 향한다. 해발 93.8m라!  여기가 산이야, 언덕이야?  왜 굳이 산(山)이라 이름 했을까? 높낮이가 뚜렷하지 않고 잡초에 덮인 마루금에 갈 길이 아스라하다. 차라리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싶다. 그래도 웬만큼 꿰맞춰 마루금을 걷는다. 

 

가까운 산, 먼 산이 모두 올망졸망하다

 

무엇을 산이라 하는가? 무엇으로 그 이름이 특정되어지나? 높이인가, 모양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기준이 있는가? 걷다가 부질없는 의문에 휩싸인다. 이것도 망상(妄想)이다. 툭툭 털고 길을 간다. 이름이란 그야말로 허상(虛像)이다. 실체를 못보고 그 이름에 얽매여 살아온 삶이 얼마던가. 거기서 벗어나려 길을 나섰건만 다시 허명(虛名)에 붙잡힌 자신을 돌아보고 실없이 웃는다.

 

과수원의 매실(梅實)은 노랗게 익어 이미 땅에 떨어졌다. '봄을 찾아 온 종일 헤매다 돌아와 집 앞의 매화에서 봄을 만났다'는 옛글이 생각난다. 제 정신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찾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산을 눈비 속에  걷다가 문득 한 사람 만났더니 바로 자신이드라'는 선가(禪家)의 가르침(*)을 소여물처럼 되새김질하며 걷는다. 도라지 예쁜 꽃이 곳곳에서 반긴다.                   (*) 空山雨雪 無人境  驀地相逢 是自家 

 

도라지 예쁜 빛깔이 산객을 즐겁게 한다 

 

 

(4) 꽃다운 이름, 길이 전해지리라

 

진주 분기점 굴다리를 요리조리 통과해 실봉산(185m)으로 향한다. 놀며 쉬며 걷는다. 오늘은 금곡이니, 정촌이니, 문산이니, 나동이니 하는 고을(면, 面)들을 좌우에 두고 걸었다. 모두 진주성과 남강의 남쪽 지역이다. 감나무, 배나무, 매실 밭이 산재(散在)하고, 도시화의 진전으로 옛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다. 진주성의 촉석루(矗石樓)와 남강 물이 아른거린다. 진주성 전투,와 삼장사, 논개 ......

 

지나온 낙남 길을 잠시 돌아본다. 발산재를 기억하는가. 거기에 있던 격식 갖춘 무덤 하나와 그 묘비명을 기억하는가. 낙남 6차의 들머리로 새벽에 지나쳤지만, 낙남 5차의 종착지였으니 일찍 도착한 이는 한낮에 그 무덤을 살핀 이도 있으리라. 임진왜란 진주대첩(1592년, 1차 진주성 전투)이후 2차 진주성 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자 장렬하게 순국한 소위 삼장사(三壯士) 중의 한 사람인 고종후(高從厚)의 묘다. 

 

                                                      의병장 고종후 장군의 묘 (발산재)                   <낙남 5차 사진첩에서>

 

그 묘비명(墓碑銘)이 이렇다.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낙남정맥의 중앙에 효열공 고종후(高從厚, 1554-1593) 묘소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게 되니 민족충혼의 화신으로 유방백세(流芳百世)하리라."

 

유방백세(流芳百世)라! 묘비명대로 그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라.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가 하나 둘이었으랴. 성(城)을 지키다 산화한 수많은 장수, 군졸, 백성이 있고, 그 중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논개의 충절도 있다.  그 넋들이 있어 이 나라가 이어져 왔음을, 흐르는 남강 물은 묵묵히 말해주고 있다. 수주(樹州) 변영로가 '논개(論介)'에서 읊은 대로.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실봉산 정상에서 - 숲 저 너머로 남강이 흐르고

 

 

(5) 유년(幼年)의 추억

 

실봉산에서 일행을 보내고 혼자 생각에 잠긴다. 진주의 개천예술제, 1949년 '영남예술제'로 시작했으니 정말 역사 깊은 지방축제다. 문화예술축제의 원류인 셈이다. 40여 년 전 유년(幼年)의 기억을 떠올린다. 개천예술제가 열리면 천진난만한 소년은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세상구경을 하다가 장터 골목에서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는 날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소년의 관심은 점차 유등(流燈) 놀이와 백일장으로 옮겨갔다. 중학생이 된 그는 공부는 뒷전이고 가을이면 유등(流燈)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더 멀리 유등을 보낼 수 있을까? 그 고민뿐이었다. 유등이 밤새 꺼지지 않고 멀리 흘러가길 소원하던 순박한 꿈, 그것은 소년에게 삶의 원류가 되어 가슴을 적셨다.

 

유등(流燈) 축제 - 각양각색의 등불을 강물에 띄워놓고 즐기는 진주 남강의 축제

 

이듬해 가을에 소년은 설창수 시인의 백일장에서 낙방하고, 수상(受賞)한 친구가 부러워 괜히 시샘을 하며 심술을 부리곤 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된 그는 <지리산 높이 솟아 우리의 기상 / 흐르는 남강 물은 맑고 푸르다 / 역사 깊은 진양성 굽어보면 / 사나이 젊은 힘이 솟아오른다.>며 목이 터져라 교가를 불렀다. 패기 넘치던 그 시절이 엊그제인데 소년은 벌써 지천명(知天命)을 넘긴지 오래다.

 

아버님의 애창곡이 <이별의 부산정거장, 애수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같은 남인수 노래 일색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때는 몰랐었다. 비봉산과 남강에서 남인수가 목청을 가다듬었고,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물레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고향에 찾아와도> 등 수많은 가요의 작곡자(이재호)의 삶도 그 궤적을 진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듯 유수교가 저 앞에 보인다.

 

 유수교에서 마루금은 끊기고, 저기 두 팔 벌린 이 누구인가

 

 

(6) 끊어진 마루금, 유수교(樹橋)에서

 

새벽부터 낮은 산과 언덕을 걸었다. 그야말로 밤톨 같은 봉우리와 언덕이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마루금은 앞뒤에서 끌고 밀며 끊어질 듯 하며 이어졌다. 그러다가 유수교에서 덜컹 그 맥이 끊긴다. 산줄기 생겼을 때 그렇지 않았으나 후세의 사람이 산줄기 자르고 물길을 새로 만들었다. 인공의 물길, 그 이름을 가화강이라 한다. 이번 구간 산행도 거기서 멈춘다. 해바라기 활짝 피어 반긴다.

  

유수교 가운데 선다. 강물이 말랐다.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산촌일기의 한 장면, 영월 김삿갓 계곡을 떠올린다. 그 깊숙한 무릉도원 얘기다.

 

" 비가 오기 전에 땔감이라도 한 짐 져다놓아야 했다. 작년에 쓰러진 소나무가 길을 막고 있어 그것을 엊그제 토막을 내놓고 아직까지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게질을 몇 번 하고나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마당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나갔으니 옷을 벗은 채로 돌아와 마루에 앉아 바람에 몸을 말린다. "

     

새벽부터 요리조리 낮은 언덕을 산이라 여기며 걸었더니 문득 깊은 계곡이 그립다. 무더운 날씨에 산야(山野)의 구분조차 아리송했으니 시원한 계곡이 생각나는 것일까? 언제쯤 홀랑 벗고 알탕할 수 있는 깊은 산으로 드나? 청학동쯤은 가야겠지? 그런데, 그 알탕을 닭백숙집 마당에서 백주(白晝)에 했다. 홀랑 벗은 채로 마루에 앉아 몸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ㅋㅋㅋ

 

서울로 향하기에 앞서 본가의 어른께 전화로 신고한다. "저 오늘은 그냥 서울로 올라가야 하겠심니더. 7월 말에 다시 내려 오겠심니더. 잘 계시소, 예. 서울 가서 또 전화 하겠십니더"  몇 마디 전화로 안부를 대신하는 불효자는 속으로 웁니다. 못내 아쉬워, 가까이 사는 막내를 불러 저녁에 문안하도록 부탁하고 서울로 향한다.

 

산을 내려오니  해바라기 반긴다

 

 

[부록]  첨부자료

 

진주의 역사와 문화.hwp

 

        

2010년 7월 5일 아침에

고향의 산하에서 돌아와

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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