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 마라톤 완주기

단풍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月波 2010. 10. 25. 21:30

 

단풍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 2010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을 다녀와서

 

 

단풍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춘천의 호반을 달렸다.

그들과 함께 달리고 더불어 숨 쉬며 춘천에서 하루를 보냈다.

마음속의 얽매임이나 걸림 따위는 버리고 천천히, 즐겁게 달리려 애썼다.

다만 '완주' 라는 목표가 스스로를 채근했으니, 중도 포기는 아예 꿈꾸지 않았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의 일이다.

건강을 돌보려 트레드밀에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걷기는 달리기, 마라톤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가을 춘천 마라톤에서 첫 풀코스 완주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래서 단풍과 호수가 어우러진 춘천의 의암 호반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춘천은 마라톤의 첫 정(情)인 셈이다.

 

그 이후 가을이면 정든 임 찾아가듯 어김없이 춘천으로 달려갔다.

한 해도 빠짐없이 가을의 전설을 이어갔으니 올해로 춘천에서만 아홉 번의 풀코스 완주다.

어느 해는 혹독한 훈련으로 자신을 담금질한 후 기록에 대한 강한 열망을 안고 춘천으로 달려가기도 했고,

때로는 의암호로 내려온 삼악산의 단풍과 의암호의 수초(水草)가 한 판 어우러진 모습에 넋을 잃으며 달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금년에는 1월의 고성마라톤을 다녀온 후 대회참가를 못했다.

자연히 훈련도 게을러지고 몸도 무거워졌지만, 차마 가을의 전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걱정이야 없었겠는가? 다만 페이스를 늦추고 달리는 자체를 즐기기로 작정하고 춘천으로 갔다.


의암댐을 돌아 신매대교의 하프 지점까지는 6분 페이스로 천천히 잘 달렸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삼악산의 단풍에 취해 달림이들과 어울려 호반의 주로(走路)에서 축제를 벌였다.

스피드를 조금씩 늦추며 편안히 달리니 춘천댐을 향해 오르는 긴 오르막도 예년에 비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춘천댐을 지나자, 시각 장애인이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팔목에 노끈을 묶고 달리는 중년의 그분들은 '얘기의 끈'도 놓지 않고 서로를 다독이며 오손도손 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부부라면 사막인들, 거친 황야인들 달리지 못할까 싶어 스스로 눈자위가 붉어졌다.

아름다웠다. 의암호의 물풀보다 가녀렸지만 삼악산의 단풍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분들에게 소리없는 박수를 보내며 천천히 함께 달린다.

 

 

춘천댐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리막에서 오히려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진정한 마라톤은 30Km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이 고비를 어떻게 넘겨야 하나? 걷지 않고 끝까지 달려야 한다. 이대로 쓰러지라는 법은 없다.

 

그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박 교수, 그가 뒤에서 다가와 내 옆을 달리고 있지 않은가!

오랜만에 그와 얘기하며 춘천댐에서 소양교로 이어지는 긴 내리막길을 달린다.

마침 그는 초보 마라토너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하며 함께 달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박 교수와는 그간 여러 차례의 동반주(同伴走)가 있었다.
어느 해 공주의 마라톤 대회에 갔다가 다리에 쥐가 나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기도 했다.

보스톤마라톤을 갈 셈으로 열심히 훈련하고 기록을 만들던 어느 해에는 개인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하여,

동아일보 서울국제마라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달리며 나의 라이프 베스트 기록을 세우게 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한창 힘든 시점에 그가 내게로 달려왔다. 그는 늘 그렇게  내게로 소리소문 없이 달려왔다.

박 교수, 구미로 잘 내려갔는가? 어제 자네가 페메하던 그 분은 무사히 완주하였는가?

고마우이, 친구야. 다음에 주로(走路)에서 또 만나세.


달리기란 이런 것인가?
언제는 기록에 얽매여 자신을 채찍질하고,

언제는 횟수에 연연해 팔도강산을 헤집고 다니기도 하고.

이제는 정말 편안하게 달릴 수 있지 싶다. 천천히 , 주변과 어울리며, 오로지 종착지를 향해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달리기를 마치고 이동하는데,
아내, 딸, 아들의 완주 축하 메시지가 날아든다.

클럽의 신입멤버들 중에 첫 완주의 기쁨을 누린 후배들의 표정도 으쓱해 보인다.


함께 달린 주로의 모든 사람들이 단풍보다 아름다워 보인 하루였다.

그래서 변함없는 나의 달리기 모토.
뛴다, 끝까지, 즐겁게!

 

 - 기록 : 4시간 18분 48초 (1시간은 늦었으나, 그만큼 편안했다)




2010. 10. 25.
월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