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 마라톤 완주기

제111회 보스톤마라톤 - 기록은 모래 위에 쓰는 것이니

月波 2007. 4. 24. 13:52

 

기록은 바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모래 위에 쓰는 것

  - 제 111회 보스톤 마라톤(2007. 4. 16.) 완주기

 

 

4월 15일(일) 늦은 밤, 보스톤

호텔 창밖에서 어둠을 뚫고 굵은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유리창에는 안타까움이 변해 눈물처럼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후줄근히 하루 종일 내린 비도 모자라 기어코 이 밤에 뭔가 일을 내려는 모양이다.

정산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이 주는 배경 이미지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황량하고 거친 자연을 배경으로, 악마적인 인간의 애증을 강력한 필치로 묘사한 작품이었지.

내일은 아무래도 미국 동북부를 강타한 폭풍우가 몰고 온 비바람과 맞서며 보스톤을 달려야하나 보다.

 

이런 상태라면 내일의 마라톤은 어떻게 될까? 대회는 진행될까?

달리기 복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기록은 접어두고 완주는 가능할까?

어떤 염원을 갖고, 어떻게 기다려온 대회인데 .......

보스톤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4월 16일(월) 05시 

시차(時差)로 인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아침뉴스에서 제 111회 보스톤마라톤 조직위원회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매우 보기드문, 흥미있는 대회가 될 것이다. 이제 달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어떤 다짐으로 달려야 하는 것일까? What's your promise?

1968년 보스톤 우승자 Amby Burfoot은 성취감을 통해 찾아가는 자아의 참 모습을 이야기했다.

아프리카의 어느 선수는 가족의 안락한 생활을 담보하기 위해서 달린다고 담담히 말한다.

 

오늘 나는?  나는?  나는 ........  

경쟁이나 신기록과 거리가 멀다. 최상이나 최고보다 "최선"을 다해 달리고 싶다.

빨리 달리겠다는 집념을 버리고, 즐겁게 달리자. 

가파른 언덕을 만나면 힘들더라도 걷지 말고 천천히 달리자.

어떤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끝까지 달려 피니쉬라인을 반드시 밟자.

 

빗물에 젖은 유리창에 스스로의 마음을 새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Do your best !

최선을 다한 경주에서 패배란 없는 법.

진정한 승자란 결승선에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라,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찾는 사람이기에 ......  

  

4월 16일(월) 08시, Hopkinton  

출발 2시간 전에 출발지인 홉킨톤에 도착한다.

스트레칭을 해야하는데, 쏟아지는 비를 피해 버스 안에서 초조히 대회시간을 기다린다.

대부분 긴 팔, 긴 바지에 비옷까지 중무장(?)을 했다.

그래도, 일부는 짧은 팬츠에 소매없는 런닝셔츠로 맞설 태세다.

 

나는 추위에 왜 이리 겁먹는 것일가?

마라톤 하기 전에는 더위가 고역이었는데, 몸이 날렵(?)해지니 추위가 싫다.

긴 팔 셔츠 안에 짧은 팔 셔츠를 입고, 밖에는 강마 경기복 상의에다 비옷까지 걸친다.

이 정도면 설사 걷더라도 몸이 얼지는 않을거야.

 

4월 16일 오전 10시

뉴잉글랜드 시골마을 홉킨톤에 출발의 함성이 들린다.

Wave 1의 후미인 10번째 소그룹(Corral 10)에서 천천히 출발한다.

정산과 함께 달리고 싶었는데, 애꿎게 그는 Wave2에 속해 있다.

기록순으로 출발하는 대회에서 그 보다 먼저 출발하기는 처음이다.

 

삶이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충만하길 꿈꾸며, 오늘도 스타트라인을 힘차게 밟는다.

두려움을 떨치고, 새롭게 출발선에 서면 언제나 가슴이 설레인다.

그래서, 그 수없는 출발선은 내 삶에 있어 가장 값지고 소중한 날들이다.

출발선에 서지 않고서 어찌 결승선의 영광이 있을 수 있겠는가?

 

5Km 지점, Lap Time이 24분 34초다. 잘 달리고 있다.

아니, 분위기에 휩쓸려 목표한 Sub4에 비해 오버페이스를 하고 있다.

동반주하는 H.Y. Kang님에게 속도가 빠르다며 템포를 늦추자고 제안한다.

길거리에 응원 나온 어린아이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달린다. 

서서히 땀이 몸에 배어나고, 몸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비옷을 벗어 허리에 묶는다.

 

10Km 지점, 두번째 5Km의 Lap Time이 24분 16초.

스피드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러면 안되는데 ......

셀프컨트롤이 안된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길가의 수많은 응원에 나도 모르게 들떠가고 있다.

다행히 비가 멎고 있다.

 

15km 지점, 세번째 5Km의 Lap Time이 24분 34초 

20km 지점, 네번째 5Km의 Lap Time이 24분 27초 

천천히 달리자는 생각과 달리 몸은 빠른 속도에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다.

 

Wellsely 여자대학을 지난다.

궂은 날씨도 전통적인 웨슬리의 응원에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1Km 가까이 늘어선 상큼한 여대생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천천히 달린다.

얼마나 많고 열렬한 응원인지, 오른 손 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다.

한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웨슬리의 뽀뽀는 이렇게 순간에 이루어진다.

정신이 몽롱하다.

 

웨슬리 여대생들의 응원에 힘입어 달리기에 가속도가 붙는다. 

1시간 44분 28초에 하프라인 통과, Km당 5분 페이스보다 약간 빠르다.

이 대로라면 3시간 30분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페이스를 늦추기로 마음 먹는다. 몸에 이상이 오는 신호가 감지된다.

하프까지 동반주한 H.Y.Kang님을 먼저 보낸다. 동반주에 감사 !

그는 58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주력이 대단하다. 

 

이제 스무 번째 완주 선물을 챙기면 된다.

오래도록 그리던 프랑스풍의 도시, 카나다 퀘벡으로 떠나는 여행,

덤으로 몬트리올, 오타와, 토론토, 나이아가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된 벗과 함께하는 여행이니,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이 여정이 끝나면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리라.

하루를 달리기로 시작하면 어느 날이든 기분이 좋다.

아침 일찍 첫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달리면 더욱 기분이 상큼하다.

아침이면 양재천의 새벽을 정산과 함께 달릴 것이다.

 

2007년 4월 17일, 보스톤에서

월파(月波, 달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