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01]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0년 11월 14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호남정맥 1구간
조약봉(565.0m)-모래재(460m)-곰재-만덕산(762.0m)-마치-신전리재-슬치
(3) 산행거리 : 21.0 Km(도상거리), 조약봉 진입 1.0Km 별도
(4) 산행시간 : 9시간 45분(식사 및 휴식 50분 포함), 조약봉 진입 20분 별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7명 합동산행
- 8인의 동행자 : 오리,성원,월파,정산,오언,성호,은영,제용
2. 산행메모
(1) 묵은 숙제, 다시 조약봉에 서다
호남으로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작년 봄 1천 3백리 호남의 산줄기를 걷겠다고 백두대간 영취산 정상을 출발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있어 호남금남의 산줄기만 4구간으로 끝내고 잠시 쉬었다. 그 사이 금년 봄여름에 김해, 창원, 마산, 고성, 사천, 진주, 하동, 지리산 영신봉에 이르는 낙남정맥의 산줄기를 걸었다. 이제 묵혀두었던 호남의 숙제를 다시 꺼내든다.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조약봉 정상에 27명의 산객이 모였다. 초승달마저 잠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4시에 산객들의 함성이 요란하다. 자, 이제 다시 출발이다. 섬진강 물줄기를 왼쪽에 두고 광양만의 망덕포구까지 일로 남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남에서는 산줄기만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호남은 곡창이라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넉넉하니, 다양한 볼거리와 풍성한 먹을거리도 함께 살피리라.
모래재를 지나 몇 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선두그룹과 빠르게 움직이다가 뒤돌아보니 랜턴 불빛이 줄지어 따른다. 마치 침묵의 대장정 같다. 페이스를 늦춘다. 홀로 걷는 한적한 숲길이 좋다. 혼자 갖는 명상의 시간이다. 새벽산행의 묘미는 이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어제를 돌아보며 내일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다.
미명(微明) 속에 곰재를 지난다. 곰재의 전적(戰跡)이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으로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6 25 동란 때에는 호남에서 치열한 전투가 없었다는 기억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 곡창을 지키려던 길목의 하나가 여기쯤이었을까? 갈 길을 서둘러 만덕산을 향해 오른다. 서서히 날은 밝아오고, 대오도 정비되어 선두와 후미그룹이 분명해졌다.
만덕산에서 맞이하려던 일출은 짙은 안개로 의미가 없어졌다. 농무(濃霧)를 핑계로 만덕산 갈림길에서 길을 재촉한다.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암릉에도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으며 환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쉼터에서 일행을 기다려 비닐을 깔고 앉아 아침을 먹는다. 따뜻한 국물이 온기를 더하는 시간이다. 한낮이라면 낙엽에 그냥 주저앉아 먹는 정취가 제법이었을 텐데.
만덕산 지난 암릉에 농무(濃霧)가 가득하다
(2)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산행은 후반부로 접어든다. 피로감이 찾아오지만 길은 평탄한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산길의 낙엽이 발목을 덮는다. 푹신해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간혹 나뭇가지에 매달린 선답자의 표지기가 갈 길을 일러줄 뿐, 마루금에는 낙엽들의 천국이다. 나뭇잎들의 풍성한 가을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그 길에서 잠시 나뭇잎의 생(生), 그 순환을 생각한다.
지난 주말의 일이다. 미국으로 이민 갔던 친구 부부가 잠시 귀국해, 아내와 함께 두 부부가 단풍구경으로 남도여행을 했다. 담양 백양사, 순천 송광사와 법정스님의 옛 거처 불일암을 찾아 붉게 물든 단풍에 가을 정취를 흠뻑 맛보았다. 백양사 뒷산인 백암산이나 송광사 뒷산인 조계산이 모두 호남정맥의 산이니, 다가올 호남정맥 산행에서 다시 찾을 기약을 하면서.
그 산의 단풍은 붉은 물을 먹은 습자지처럼 재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누구는 단풍을 일컬어 ‘나무가 색으로 쓴 시(詩)’라고 했다. 그것도 '빨강 노랑으로 그린 산문시(散文詩)'라고. 산문시는 함축이 덜하나 서술이 있어 친근하다. 그래서 몸에 익숙하고 마음에 따뜻하다. 봄날의 연둣빛 잎보다 가을 단풍이 더 정겨운 것은 그 때문이리라.
순천 송광사의 가을(2010. 11. 7.)
그러나 그 단풍도 곧 낙엽이 된다. 그리고 썩어 거름이 되고 뿌리로 돌아가리라. 그래서 단풍과 낙엽은 ‘되돌아갈 날이 멀지 않음을 일깨우는 전령사요, 움켜쥔 것과 붙들린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무욕(無慾)의 스승’인지도 모른다. 모두 배낭을 내려놓고(마음의 무거운 짐도 함께 내려놓고), 풍성한 낙엽에 몸을 맡긴 채 어울려 낙엽 속을 뒹군다. 마음 속으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시를 읊으며.
나뭇잎 떨어진 숲으로 가자 /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인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이 가을 낙엽 밟는 소리가
이제 남은 길은 순탄하고 편안하다. 임도와 좁은 흙길, 시멘트길이 번갈아 나타나며 마루금이 헷갈리지만, 그 길을 놓친들 무슨 대수이랴! 마루금을 벗어나도, 거기에 길이 있으면 그것조차 하나의 길인 것을! 도란도란 얘기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은 사과를 나눠 먹고 홍삼주스도 마시며 여유롭게 걷는다. 슬치에 도착하니 곧바로 날쌘돌이 성호가 1, 2구간을 한꺼번에 종주하고 나타난다. 참 대단하다.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3) 호남과 함께 한 화두 - 채근담(菜根譚)
정취(情趣)를 얻는 것은 많음(多)에 있지 않으니, 동이만한 연못이나 주먹만한 돌 사이에도 안개와 노을이 깃들며,
훌륭한 경치도 먼 곳에 있지 않아, 쑥대로 얽은 창과 대나무로 엮은 집에도 맑은 바람, 밝은 달이 스스로 한가롭다.
得趣不在多하니 盆池拳石間에 煙霞具足하며 會景不在遠하니 蓬窓竹屋下에 風月自賖하느니라 (菜根譚, 後集 5)
득취부재다 분지권석간 연하구족 회경부재원 봉창죽옥하 풍월자사 (채근담, 후집 5)
S형,
삼홍소(三紅沼)를 기억하시는지요?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 얼굴도 붉다는 지리산 피아골의 그 작은 소(沼) 말입니다. 두어해 전 가을에 형과 함께 피아골의 단풍을 보러 나섰던 길이었지요. 피아골 산장에서 함태식 옹을 만나 뵙고 연곡사로 내려서던 길에 그 삼홍소(三紅沼)에 잠시 머물렀었지요. 어디를 가도 그렇게 삼홍(三紅)을 두루 갖춘 곳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 멋진 정취나 풍경이 삼홍소(三紅沼)에만 있겠습니까?
오늘 산행에서 돌아오며, 채근담(菜根譚)의 경구(警句) 하나를 되새겨보았습니다. 멋진 풍경이란 많이, 멀리서 구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좁은 못이나 작은 돌 하나에도 안개와 노을이 깃들고, 오막살이 초가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뜬다는 말씀 말입니다.
매사가 각자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이기도 하니, 청풍명월(淸風明月)인들 먼 곳에만 있겠는지요?
세상살이의 해법 또한 먼 곳에서만 찾아서 될 일은 아닌듯 합니다. "가까이서,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 의미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會景不在遠(회경부재원)하니 蓬窓竹屋下(봉창죽옥하)에 風月自賖(풍월자사)하느니라"하는 그 글귀를 질겅질겅 씹으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훌륭한 경치도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그 경구(警句)처럼, 매사(每事)를 멀리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이 마음에서 찾아야하지 싶습니다.
다음 산행에서 뵙겠습니다.
정취(情趣)를 얻는 것은 많음(多)에 있지 않으니
[PS]
(1) 건강을 추스려 정맥길에 다시 동참한 오언 아우의 모습이 무엇보다 반가웠고,
(2) 두 구간을 한 번에 뚝딱 해치운 성호 아우의 강인한 체력과 굳은 의지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으며,
(3) 여러 산행동지들 덕분에 청국장과 김치찌개에 곁들인 제조상궁의 특주(特酒)가 더욱 맛깔스러웠소이다.
2010. 11.14.
호남의 산에서 돌아와
月波 (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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