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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06] 설화(雪花) 가득한 내장산에서

月波 2010. 12. 27. 01:14

 

[호남정맥 06] 설화(雪花) 가득한 내장산에서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0년 12월 26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호남 6구간 추령-장군봉-연자봉-내장산(신선봉, 763.2m)-소죽엄재-순창새재-백암산(상왕봉, 741.2m)-곡두재-감상굴재

                       - 호남의 폭설을 피하려 내장산 구간을 4, 5구간을 건너뛰고 6구간을 먼저 산행함 

   (3) 산행거리 : 15.2 Km(도상거리)

   (4) 산행시간 : 8시간 4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5명 합동산행

                        - 7인의 동행자 : 성원,월파,정산,오언,은영,지용,성호

 

2. 산행메모

 

(1)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어야

 

새벽 4시 30분, 추령에서 내장산 종주를 시작합니다. 이마의 랜턴이 길을 밝힙니다. 눈발이 제법 스칩니다. 은근히 설렙니다. 장군봉 오르는 산길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늦가을 된서리 맞고 널브러졌던 낙엽이 그 아래 깔려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니 하얀 소복으로 낙엽을 덮고 있는 형국이었지요. 마치 낙엽의 화려한 장례식 같았습니다. 비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낙엽은 의미 없이 묻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제 몸을 썩혀 봄에 새 생명을 움트게 하지 않겠어요? 그런 기대가 있어 눈 덮인 낙엽을 밟는 마음이 무겁지 않았습니다.

 

랜턴의 행렬은 장군봉을 지나 미끄러운 마루금을 따라 이어집니다. 모두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안으로, 안으로 스스로를 달구고 있을 겁니다. 늘 그렇듯이 이런 침묵의 시간이 좋습니다. 야간 산행의 매력은 이런 묵상(默想)의 시간에 흠뻑 젖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간 산행시간을 줄이고 밝은 시간에 걷기를 원합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꼭 보여야만 볼 수 있는 것일까요?" 라고 스스로 되묻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으면 그 마음이 좋은 것이지요. 스스로를 채근해봅니다.

 

 

 

 

(2) 눈 덮인 길 함부로 걷지마라

 

먼동이 트고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햇살이 눈부십니다. 앞서 간 일행의 발자국이 뚜렷합니다. 그 길을 따르면 됩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이라. '눈 덮인 길을 갈지라도 함부로 걷지 마라'고 했지요. '오늘 내가 걸어 간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말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양연의 한시(漢詩)입니다. 한동안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라고 잘못 알고 있었지요. 그 말씀대로 따르면 오늘 산길에서 알바하고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을 겁니다.                                                  (*)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았습니다. 동행하는 '졸라맨'이 허기가 진 모양입니다. 일출이 시작되자 아침 먹자고 조릅니다. 나도 호응합니다. 먼저 줄행랑(?)을 친 '정산(正山)'을 쫓아 '포도나무'가 달려갑니다. '은종'도 엉겁결에 뒤따릅니다. 알바의 전주곡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쉼터에 도착하니 은종만 보이지 않습니다. 은종 천사의 단독 알바였지요. 두 갈래 길에서 직진의 발자국이 선명했으니 무심코 직진했을 겁니다. 알바이지요.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을 되새겼습니다. 발자국 잘못 남긴 사람 누구였을까요?

 

다행이 통화가 되어 은종이 합류해 늦게나마 함께 아침을 먹습니다. 우리 일행은 자연히 후미로 쳐집니다. 저는 산에서 휴대폰을 보통 꺼 놓습니다. 산에서나마 세상의 소음과 멀어지고 싶은 게지요. 그러나 낭패를 피하려면 켜 놓을 필요도 있겠네요. 다시 눈길을 걷습니다. 묵묵히 걷습니다. 백암산 가는 능선에는 은빛 찬란한 햇살이 사람을 유혹합니다. 길을 서두를 이유가 뭐냐고 묻습니다. 카메라에 설경을 담습니다. 그러나 눈에, 마음에 담은 것만큼이나 아름답겠습니까?

 

 

 

 

 

 

(3) 봄 이긴 겨울이 있더이까?

 

눈 덮인 산길에는 짐승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다 마주친 고라니 발자국이 반갑게 느껴집니다. 겨울이 깊어 땅은 얼어붙었습니다. 힘없는 짐승들에게 겨울은 춥고 배고픈 계절일겁니다. 어디 산짐승 뿐이겠습니까?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겨울은 가혹하고 힘든 시기이지요. 한 마디로 시린 겨울이지요. 그러나 절망할 필요야 있겠는지요? 시린 겨울의 짧은 한낮을 밝히는 햇볕이 말합니다.  "겨울도 가느니라. 봄 이긴 겨울 없느니라." 맞습니다, 맞고요. 거기에 기대봐야지요.

 

백암산 상왕봉에 이르니 해가 중천에 떠서 산야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눈이 녹을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산야를 뒤덮은 은빛의 설경은 여전히 고왔습니다. '숫눈'이라고 하던가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새벽에 숫눈을 함께 밟으며 스물 하고도 다섯 명의 동행이 내장산에서 백암산으로 종주길에 나섰지요. 더러는 그 숫눈을 앞서 걸어갔고, 더러는 그 길을 밟으며 뒤따라갔지요. 앞서 간 그룹은 숫눈을 밟는 즐거움이 있었을 테고, 타박타박 뒤따른 후미는 은빛 산하를 좀 더 눈에 담았겠지요. 얻고 잃음이 저울추처럼 평형입니다.

 

산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 덮인 고산준령은 더욱 장엄하지만, 그 산을 걸어 오르고 기어 넘자면 험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백암산 암봉의 하산 길도 그랬습니다. 지난 가을에 단풍구경 삼아 백양사 쌍계루에서 올려다 본 그 암봉입니다. 그때는 눈 속의 빙판 암벽을 타고내려오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정맥의 마루금을 따르는 일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아찔하고 힘들었지만 하산 후에는 묘한 쾌감이 느껴졌습니다. 

 

 

 

 

 

(4) 쉬엄쉬엄 가게나, 정산

 

암봉에서 하산한 후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간식을 먹으며 체력을 보충합니다. 호남정맥 산행을 보류하고 가족과 여행을 떠난 '이튼' 아우가 용평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곳은 혹한에 강풍이 불고 있답니다. 우리들의 산행이 못내 걱정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가슴 시리도록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내장산과 백암산엔 훈풍에 눈이 날렸어요! 랄라라~"  눈이 오면 날씨는 포근해지는 법이지요.

 

다시 얼마나 낮은 산과 언덕을 오르내렸을까요? 감상굴재에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당초 목적지인 밀재까지 가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구만리같은 호남정맥이니 쉬엄쉬엄 가지요. 다음에 조금 더 걸으면 되겠지요. 잘한 결정이었지 싶습니다. 대신 백양사역 근처에서 따뜻한 점심에 소맥을 곁들일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보았지요. 우리를 버리고 선두로 날랐던 정산(正山)이 한 턱 쏘았습니다. 다음은 누가 쏠까요? 벌써 기대가 됩니다.

 

오늘 산행을 되새겨봅니다.

설화(雪花) 가득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또 다른 설상행진(雪上行進)이 기다려집니다. 신년 산행에서 뵙겠습니다.

백암산에서 하산하는 암릉에 간이 자일을 설치하고 끝까지 후미를 돌봐주신 산행대장님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0. 12. 26. 늦은 밤에

내장산-백암산 종주에서 돌아와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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