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03] 날씨가 제 아무리 추워도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0년 12월 12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호남정맥 3구간 (불재-치마산-염암재-4봉-국사봉 왕복-오봉산-운암3거리)
(3) 산행거리 : 16.7 Km(도상거리, 국사봉 왕복 2Km 포함)
(4) 산행시간 : 7시간 55분(국사봉 왕복 1시간 포함, 식사 및 휴식 1시간 포함)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7명 합동산행
- 9인의 동행자 : 오리,성원,월파,정산,오언,은영,지용,성호,제용
2. 산행메모
(1) 추우면 옷 사입나, 술 사먹지
새벽 4시를 조금 앞둔 시각, 불재에서 산으로 든다. 영하 10도라는 일기예보가 실감이 난다. 초승달은 잠자리에 든지 오래지만 하늘에는 은하수가 총총하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산마루에 오르니 전주 시가지는 불야성이다. 살을 에는 찬바람이 휑하니 스치고 지나간다. 문득 소야(笑野) 신천희의 '술타령'이라는 시가 머리를 스친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 소야(笑野) 신천희, '술타령'
참 재미있는 시다. ㅋㅋㅋ 실없이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낙엽이 발목뿐 아니라 마음조차 푹신하게 감싸는 새벽 숲길을 걷는다. 소야 선생은 스스로 '중이(中二)'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사실 그는 중이(中二)가 아니라, 진짜 중이다. 머리 빡빡 깎고 목탁 두드리며 사는 중(僧)이다. 소야 스님의 해학에 추위도 잊고 선두그룹과 어울려 치마산을 오른다.
치마산(馳馬山), 분홍 치마나 하얀 속치마가 아니다. 달릴 치(馳)와 말 마(馬)를 써서, 그 이름대로라면 '말이 달리는 모양의 산'이다. 정말 그런가? 어둠이 사위(四圍)를 감싸니 그 형상의 분별이 어렵다. 그 이름에 빠지지 않음이 오히려 구속으로부터 해방이다. 얽매임, 즉 마음의 구속을 탈피하는 일이 곧 정신의 자유를 구가하는 길이 아니던가. 어둠 속에 홀가분히 숲길을 간다. 염암(鹽岩)고개까지 앞장서 길을 개척한다.
(*) 치마산 - 1/50,000 지형도에는 호남정맥을 벗어난 곳(568m)에 치마산이라 표시했으나, 정맥 마루금상의 봉우리(607m)를 치마산이라 부름
(2) 계란말이의 추억
염암(鹽岩)고개에서 후미의 일행을 기다리는데 추위가 엄습한다. 다시 길을 나선다. 제용 아우는 날아가듯 앞서간다. 산마루의 하늘은 서서히 일출을 준비하고 있다. 잠시 카메라에 담다가 길을 재촉한다. 길은 가파르다. 내리막도, 오르막도 가파르다. 힘들다. 호남의 산이 낮다고 호락호락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갈증을 느낀다. 염암바위 오르는 안부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에너지 보충을 한다.
보리밥에 드문드문 박힌 흰 쌀밥, 그 위에 놓인 계란말이 한 장의 추억.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즐기는 7080 세대라면 누구나 말한다. "그때는, 매일 그럴 수만 있어도 달리 소원이 없었다"고. 오늘 산행 도시락에도 어김없이 계란말이 한 장이 놓여있다. 언제부터인가 산행 도시락에 계란말이 한 장을 얹어놓기 시작한 아내의 마음은 무엇일까?
이제야 어렴풋이 그 뜻을 헤아릴 것 같다. 물질적으로는 그 시절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갈수록 각박해져 간다. 물질의 풍요만큼 정신(精神)의 풍성함을 갖추기가 여의치 않은 것이다. 나 스스로는 얼마나 애쓰는지? '도시락의 계란말이를 통해 가난해도 마음이 넉넉했던 그 시절을 돌아보라'고 아내가 넌지시 던지는 경책(警策)이 아닐까?
'지이담박명(志以澹泊明)이요 절종비감상(節從肥甘喪)' 이라고 했다. 지조는 청렴 결백하면 뚜렷해지고 절개란 부귀를 탐하면 잃게 되는 것. 옛 선비처럼 굳이 지조나 절개를 논하지 않더라도, 물질의 풍요로움 못지않게 정신의 풍성함을 가꾸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자책을 하며 험한 비탈길을 올라 2봉으로 향한다.
(3) 오호(五湖)의 풍경도 마음속에
- 오봉산(五峰山)과 옥정호(玉井湖)에서
3봉을 거쳐 4봉 바위턱에 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옥정호(玉井湖)가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여름과 달리 나뭇가지는 더 이상 시야를 방해하지 못한다. 숲에 서리 내린 지 오래요 이미 눈까지 스쳤으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잎은 떨어진 지 오래다. 예리한 칼처럼 나무 그림자를 베어낼 초승달도 저문 지 오래다. 다만 날씨가 흐려 아쉬울 뿐.
마루금에서 조금 벗어난 국사봉 왕복은 생략할까 하는데, 정산(正山)이 "월파, 국사봉에서 함께 '국사'를 논해볼까?" 엥? 갑자기 왠 국사? 國事, 國師, 國史, 國使, 國士 ..... 설마 鞠詞나 鞫辭는 아닐 테지. 산에서는 산사(山寺, 山史, 山査)만 얘기해도 넉넉한데.... 아무튼 '국사봉'에 다녀오자는 얘기다. 넌지시, "그래 가보자고!" (사실 오봉산에서 보는 옥정호 조망보다 나은 것도 없는데, 안 가면 왠지 아쉬울까 봐.)
옛사람의 말씀대로면, 경치야 꼭 가까이 가서 살피지 않아도 된다. 마음속의 헤아림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사물 속에 깃든 참된 멋을 깨달으면 오호(五湖)의 풍경도 마음 속에 들어오고, 눈앞에 있는 천기(天氣)를 알아채면 천고의 영웅도 손아귀에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會得個中趣면 五湖之烟月이 盡入寸裡하고 破得眼前機면 千古之英雄이 盡歸掌握하느니라. (菜根談, 後 11)
회득개중취 오호지연월 진입촌리 파득안전기 천고지영웅 진귀장악
사물(事物)의 정취(情趣)를 제대로 체득(體得)하면 오호(五湖)의 아름다운 풍경도 마음속으로 절로 들어올 것이니 구태여 가서 봐야 할 까닭이 없다는 말씀인데, 미련한 이몸은 가까이 가봐야만 조바심이 덜하니 어쩔 수 없는 중생이다. 앉아서 만리를 보고 누워서 천고를 헤아리는 그 마음의 경지를 어찌 감히 꿈꿀 수 있으랴?
하물며 국사봉을 오가는 가파른 오르내림 4번에 체력은 바닥나고 정신은 혼미하다. 돌아온 오봉산에는 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리산의 주능선이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좌우로 도열하고, 지나온 마이산(馬耳山)은 여전히 두 귀를 쫑긋하고 서있더라. 옛사람의 말씀이 하나도 어긋남이 없구나. 멀리서도 지리(智異)와 마이(馬耳)의 정취(情趣)를 한 눈에 느낄 수 있으니.
그런데, 국사봉에서 오봉산으로 돌아온 후에 뒤돌아보지 않고 홀연히 앞으로 사라진 그대여, 옥정호의 정취는 제대로 가슴에 담았는가? 나는 그게 궁금하다네. 때로는 뒤돌아보면서 길을 가게. 산길도, 인생의 길도 돌아보면서 가게. 다음에는 체력보강하고 충분히 에너지원 챙겨 추령-밀재로 가겠네. 크리스마스 밤의 28Km 대장정에서 만나세.
2010. 12. 12. (일)
호남의 산에서 돌아와
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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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시간]
0350 불재(310m)
0500 치마산(607m)
0600 염암재(316m)
520봉 - 일출맞이
365봉
2봉
518봉
4봉(국사봉 갈림길)
국사봉
4봉
오봉산(513.2m)
749지방도(옥정호 순환도로)
293.4봉
1145 운암3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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