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13] 만상(萬象)이 흘러 가고, 흘러 오고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5월 29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둔병재-어림고개-오산-묘치-천왕산-구봉산 갈림길-서밧재-천운산-돗재
(3) 산행거리 : 22.0Km(도상거리), 실 거리 23.5Km
(4) 산행시간 : 9시간 40분(숲에서 즐긴 낮잠 30분 포함)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6명 합동산행
- 5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정산,제용
2. 산행후기 : 만상(萬象)이 흘러 가고, 흘러 오고
(1) 대나무는 늘 푸른 줄 알았는데
둔병재의 휴양림에서 이른 새벽에 산으로 든다. 편백나무의 상큼한 향이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임풍량부절(林風凉不絶)이라, 숲에는 서늘한 바람이 끊이질 않는다. 한 달여 만에 찾은 산이다. 그사이 봄이 농익어 산은 푸른색으로 붓질했다. 입하(立夏), 소만(小滿) 지나 망종(芒種)이 눈앞이니 5월이라 해도 계절은 여름이다.
622.8봉에서 어림마을로 내려선다. 날이 밝아온다.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어림마을이 인상적이다. 대숲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대숲의 빛깔이 누렇다.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줄 알았는데 ...... 김인호 시인의 '소만(小滿) 무렵'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푸른 대숲 바람 담아오려/ 카메라 가방 메고 갔더니/ 대숲이 누렇다// 늘 푸른 숲인 줄만 알았는데// 소만小滿 무렵이면/ 죽순에게 한껏 젖을 물리느라/ 대숲이 누렇게 변한단다/ 새끼를 위하여/ 누렇게 부황 든 어미의 얼굴이다"
새끼 죽순(竹筍)에 젖 물리느라 누렇게 부황 든 어미 대나무라고? 시인의 생각이 참 인간적이다. 그 마음이 따뜻하다. 내 아이들을 생각한다. 성년이 된 이십대의 자식들이지만 아비의 눈에는 아직 여린 죽순(竹筍)으로 보이니, 언제쯤 푸른 대나무로 자라 다시 제 자식을 위해 부황 든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어림마을 대숲의 죽순, 이제 막 돋아나고 있다
미명(微明)에 비친 어림마을의 대숲, 댓잎이 누렇다
(2) 물염(勿染), 세속에 물들지 않음이라
별산 입구의 오래된 소나무가 산객을 반긴다. 별산에 올라 무등산을 되돌아보다가 아침 숲길을 명상하듯 걷는다. 숲 너머로 동복호(同福湖)의 물안개가 장관이다. 동복(同福)은 호남8경중 으뜸이라는 적벽(赤壁)이 있는 곳이다. 동복호의 건설로 많이 수몰되었지만, 숲 너머로라도 옛사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김삿갓(난고 김병연)은 무등산을 넘어 동복의 적벽을 둘러보고, 이렇게 읊었다지.
無等山高松下在(무등산고송하재) 무등산이 높다 해도 소나무가지 아래에 있고
赤壁江深沙上流(적벽강심사상류) 적벽강이 깊다 해도 모래 위에 흐르는구나
'적벽을 유람하는 객은 있으나, 술이 없음'을 탄식했던 김삿갓, 오랜 방랑 후 노년에 머물다가 생을 마감한 그의 종명지(終命地)가 여기 화순 동복이란다. 150여 년 전 그가 숨을 거둔 동복 구암마을의 정(丁)씨 가문 사랑채에는 그가 남긴 친필 시문(詩文)이 아직도 걸려있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단다.
半携書架數券冊 (반휴서가수권책) 절반이나 이지러진 서가에는 수권의 책이 있고
世世傳傳一個硯 (세세전전일개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 개의 벼루가 있어
墨香沈醉心自閑 (묵향심취심자한) 묵향에 스스로 깊이 취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려
微軀此外何所求 (미구차외하소구) 미약한 이 몸이 이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홍경래의 난에 연루된 조부(祖父)가 남긴 업(業)의 굴레가 평생 김삿갓을 짓눌렀으니,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한계를 절감하는 과정의 반복이었으리라. 그러나 방랑시인으로서 그가 보여준 의(義)로운 모습은 눈여겨 볼만하다. 춥고 배고파도 도를 지켰으며 불의에 야합하지 않았으니, 진정 그는 의인(義人)이다.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라,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남의 샘물을 훔쳐 마실 수 있는가! 산줄기를 걷는 일보다, 김삿갓의 유흔을 찾아 산 아랫마을을 걷고 싶은 갈증을 느낀다. 동복호 북단의 물염정(勿染亭)과 물염적벽(勿染赤壁)에도 들르고 싶다. 물염(勿染),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이라! 묘치 고개의 이정표, '적벽 가는 길'이 물염(勿染)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별산 오르는 초입의 오래된 소나무
동복호의 아침 물안개가 장관이다
적벽 가는 길, 물염(勿染)의 세상 가는 길이다
(3)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
천왕산 오르는 숲에서 아침을 먹으며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다. 봄꽃이 지고 여름 꽃이 여기저기 보인다. 하얀 찔레꽃, 곤룡포를 연상하게 하는 오동나무 꽃이 그들이다. 마지막 남았던 한 두 송이 철쭉이 떨어졌다. 시들어 떨어진 봄꽃에 가슴이 시큰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꽃이 피고 지는 것이 계절 탓만이 아닐진대, 연륜을 따라 더욱 너그러워지지 못함에 대한 자책(自責)인가?
천왕산은 그 이름에 비해 산세는 미약하다. 정상의 그늘진 숲에서 배낭에 의지해 잠시 누워 하늘을 본다. 숲과 하늘은 푸름을 자랑하고 늦게 핀 꽃이 붉음을 토하고 있다. 유록화홍(柳綠花紅)이라 했던가? 소동파는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다"고 했다. 지극히 평범한 사실의 표현인데,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도원 선사(道元 禪師, 1200∼1253)를 생각한다. 그는 10년이 넘는 수련 끝에 "눈은 옆으로 코는 아래로(안횡비직, 眼橫鼻直)"라고 했단다. 눈이 옆으로 나고 코가 아래로 달려있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그런데 이 사실의 실체를 제대로 체득하려면, 혹독한 수련이 필요하다고 옛 선사(禪師)는 일깨우고 있다.
유록화홍(柳綠花紅)이 곧 안횡비직(眼橫鼻直)이니, 선가(禪家)의 가르침을 깨닫는 일은 속인에게는 지난(至難)한 일이다. 그래도 깨달음을 얻었던 선승들을 생각하며, 그 언저리를 더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넉넉하고 발길은 가벼워진다. 일어나 다시 숲길을 걷는다. 구봉산 갈림길을 지나 서밧재에서 먹는 사과와 얼음물이 꿀맛이다.
길가의 풀은 키를 높여 여름을 노래한다
천왕산의 엽록천청(葉綠天靑), 나뭇잎도 하늘도 푸르다
(4) 청담(淸談), 만상(萬象)이 흘러가고
천운산(601.6m)을 오르며 흘린 땀이 얼마나 될까? 정상에서 기다리는 일행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정상의 산불감시탑 아래의 숲에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팔랑거린다. 그러나 한낮의 햇살 아래 곧 정적(靜寂)에 휩싸인다. 하늘에 흰 구름 한 조각 떠간다. 단아한 마음이 절로 든다. 벚꽃이 흩날리던 지난 봄, 제천 금수산 숲길에서 만났던 이진명의 청담(淸談)을 읊조리다 잠이 든다.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 세상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 한 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헤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 만상萬象이 흘러가고 만상萬象이 흘러오고.
산에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은 큰 행운이요, 참 행복이다. 그 시간은 산이 높거나 아름다워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무덤덤한 산길에서 불쑥 찾아온다. 힘들고 지친 산길의 끝 무렵에 문득 자신을 내려놓고, 산과 일체가 되었을 때 찾아온다. '빨리'나 '멀리'를 잊고 눈과 가슴을 산에 몰입시켰을 때 만날 수 있는 기쁨이다.
단잠에서 깨어나니 일행들은 아직 도란도란 얘기가 한창이다. 오랜만에 산에 들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숲 속에서 그 맑은 얘기, 청담(淸談)을 읊조리다 꿀처럼 달콤한 오수를 즐기는 기쁨을 누렸으니 이 또한 산이 주는 축복이 아니겠는가. 한결 가벼운 컨디션으로 돗재로 내려선다. 오늘 산행의 끝이다. 만상(萬象)이 흘러 가고, 흘러 온다.
천운산 정상 , 만상萬象이 흘러가고 흘러오고
오수를 즐기는 사이 그들은 소담스런 얘기를 나누고
< 말미末尾에 붙이는 단상短想>
오늘 산은 빼어난 경치는 없었지만, 생각이 정제되는 하루였다.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겠는가? 제비꽃이 장미꽃을 부러워하랴. 산 또한 마찬가지리라.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법이니. 다만 산 아랫마을을 살필 틈이 없어 아쉬웠다.
특히 돗재에서 가까운 영벽정(映碧亭)이나 조광조 적려유허지를 상경하면서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앞으로 걸어갈 호남의 산에서도 그 아랫마을의 정취가 상당할 텐데, 이 일을 어찌하나? 토요일에 일찍 내려와 1박 2일로 하루는 산, 하루는 산 아랫마을을 살펴볼까?
영벽정(映碧亭) 사진 : by 김영태
2011년 5월 30일(월) 맑은 아침에
화순(和順)의 산하(山河)를 생각하며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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