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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12] 무등(無等)의 산으로 가는 길

月波 2011. 4. 25. 06:30

[호남정맥 12] 무등(無等)의 산으로 가는 길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4월 24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유둔재-백남정재-북산-규봉암-장불재-(무등산 입석대/서석대 왕복)- 안양산-둔병재

   (3) 산행거리 : 12.9 Km(도상거리), 실 거리 15.5Km

   (4) 산행시간 : 7시간 1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6명 합동산행

                        - 8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정산,은영,지용,성호,제용

 

 

2. 산행후기 : 무등(無等)의 산으로 가는 길

 

입산(入山)

 

무등산(無等山)으로 간다. 무등(無等)이라,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의 차등(差等)이 없는 세상인가?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산인가? 무릇 산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껴안는다. 그래서 산은 본래 무등(無等)이다. 그 산을 곧장 오르기보다 천천히 에둘러 오르기로 하고, 유둔재에서 북산을 거쳐 신선대에 서니 무등산이 저만치서 어서 오라 손짓한다. 마음은 지척이나 무등으로 가는 길은 아스라하다.

 

북산에 오르니 아침햇살에 무등의 산하가 아스라하다

 

 

(1) 규봉(圭峰 950m), 그 불국토(佛國土)에서  
 
규봉의 주상절리(柱狀節理), 용암의 잔해라고나 할까? 7천년, 7만년도 아니고 그 나이가 무려 7천만년이라니 그 세월을 헤아리기 난해하다. 그 일은 학자들의 몫이고 산객은 그저 주상절리의 묘경(妙景)을 눈에 담을 뿐이다. "규봉을 보지 않고 무등산에 올랐다고 하지마라"던 호사가의 말에 한 치의 과장도 없구나. 고려시대 어느 문인은 규봉에서 이렇게 시 한 수 읊었다지.

 

    기이한 생김새 무엇이라 이름 짓기 어려워라, 올라서 보니 만상이 눈 아래구나    詭狀苦難名 登臨萬象平 (궤상고난명 등임만상평) 

    돌 모양은 비단을 재단해 말아낸 듯,  봉우리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                   石形裁錦出 峯勢琢圭成 (석형재금출 봉세탁규성) 

    명승을 밟으니 속세의 자취가 끊기고,  그윽하게 머무니 도정(道情)이 더하네      勝踐屛塵迹 幽棲添道情 (승천병진적 유서첨도정)

 

비단이며 옥에 비유한 옛글 그대로다. 빼어난 경치에 속세를 잊고 가부좌하여 도(道)를 닦고 싶었으리라. 저절로 걸음은 더뎌진다. 석문(石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규봉암(圭峰庵)이다. 관음전, 석탑, 요사채가 규봉의 품에 살포시 안겨있다. 산승(山僧)의 생활은 차(茶) 석 잔이면 넉넉하다고 했던가? 그 정갈한 암자로 상큼한 봄기운이 밀려온다.

 

규봉의 주상절리, 기이한 생김새 무엇이라 이름할꼬?

 

규봉암의 관음전, 정갈한 암자다

 

 

삼존석(三尊石)을 우러러본다. 바위기둥 셋이 여래(如來), 미륵(彌勒), 관음(觀音)이라니 부처님 세상이다. 현세불, 미래불, 관세음보살이 무등(無等)의 그 이름처럼 차별 없이 나란하다. 송하, 광석, 풍혈을 비롯한 송광(松廣), 법화(法華), 설법(設法) 등의 석대(石臺)가 호위하니, 이미 그 이름에서 여기가 불국토(佛國土)임을 확연히 일깨운다.

 

"숲속에 사는 사람이거라. 탁발로 끼니를 잇는 사람이거라. 누더기 옷을 걸치는 사람이거라. 앉은 그대로 눕지 않는 사람이거라. 늘 오염에서 떨쳐 일어나 고행을 즐기는 사람이거라." 장로계경의 말씀이다. 여기 머문 수행자는 그렇게 스스로를 채근했을 게다. 의상(義湘)과 도선(道先) 대사, 보조(普照)와 진각(眞覺 ) 국사가 그랬으며 나옹(懶翁) 선사가 뒤를 이었으리라.

 

옛 수행자를 생각한다. 비록 풍광이 빼어나도 높고 험한 산중이요, 바위가 벽을 이룬 백척간두의 벼랑이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수행이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두렵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깨치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사는 일이니, 그들은 생사(生死)를 걸고 용맹정진했으리라. 생사를 넘어 존재의 초월을 도모했으리라.

 

규봉의 삼존석, 무등의 그 이름처럼 나란하다

 

규봉암으로 오르는 길, 무명을 밝히는 등

 

 

의병장 김덕령과 애마에 얽힌 문바위의 설화가 이채롭다. 활을 쏘고 말이 동시에 달렸단다. 말이 늦었다고 목을 치니, 그때 화살이 날아왔다고? 참 난감했겠다. 설화는 설화일 뿐, 천작(天作)의 지공(指空) 너덜을 걷는다. 석불암, 계행(戒行)을 지키는 만큼 약수가 솟는다고 했던가? 산길을 올곧이 걸어야겠지. 그렇게 마음을 쏟아야겠지. 그 정성이면 약수도 콸콸, 세상사도 훨훨 !

 

 

(2) 입석대(立石臺 1,017m), 산양(山羊)이 바위 등을 타고
 
장불재에서 입석대로 향한다. 찬연(燦然)하구나, 입석대여! 그 바위 병풍에 탄성이 절로 난다. 저 병풍이 5각인지 6각인지는 애당초 관심이 없다. 뜨거운 팥죽이 식을 때 금이 가고 갈라지듯, 용암이 굳으며 각석(角石)을 이루었으리라. 하늘로 솟구친 저 입석대의 기상을 무엇에 비견하랴. 주상절리의 극치다. 과히 승경(勝景)이다. 산에서 저 바위를 닮고 싶은 사람이 어찌 하나 둘이랴.

 

곧추서서 늘어선 기묘한 바위들의 총집(叢集), 그 단애(斷崖) 앞에 넋을 잃는다. 참숯을 구워 얼마나 세워 놓으면 저러할까? 검은 대(烏竹)의 순(筍)이 얼마나 뭉쳐 솟으면 저렇게 될까? 산양(山羊)이 무등을 타면 저 모습이 될까? 그 절경을 양(羊)의 모습에 비유해 노래한 이은상 선생의 시조가 절절히 가슴에 닿는다.


천만년 비바람에 깎이고 떨어지고/ 늙도록 젊은 양이 죽은 듯 살은 양이/ 찌르면 끓는 피 한 줄 솟아날듯 하여라 

 

입석대 동쪽 부분에 층층으로 쌓인 너덜겅을 본다. 마치 몽실몽실한 양(羊)들이 바위 등에 올라탄 모습이다. 뭔가 듣는 듯 두 귀를 쫑긋하고 있는 양의 형상도 있다. '새끼 밴 산양(山羊)을 살려준 스님과 승천(昇天)을 꿈꾸던 이무기'에 얽힌 전설, 그 산양의 모습은 입석대에 형상화되고 그 모습이 노산의 시조로 나타난 것일까?
 
승천암(昇天岩)에서 입석대를 돌아본다. 산양을 살려준 스님이 머문 그 전설 속의 암자는 어디쯤일까? 지금은 사라진 입석대 아래의 입석암(立石庵)이었을까? 아니면 여기 승천암(昇天岩) 근처에 암자가 있었을까? 승천(昇天)과 승천(昇天)이라? 상념(想念)을 지우고 길을 간다. 서석대(瑞石臺)가 가까워지자 걸음이 빨라진다.

 

입석대, 천년 비바람에 깍이고 떨어지고

 

입석대, 산양이 바위 등을 탄듯

 

입석대, 참숯을 구워 세워 놓으면 저러할까?

 

승천암, 종을 울려 산양은 보은(報恩)하고

 

내려다본 입석대, 저 바위를 닮고 싶어라

 

 

(3) 서석대(瑞石臺 1,100m), 그 침묵 속에 격동(激動)이 있고
 
서석대에 오른다. 무릇 산에는 숱한 역사가 새겨져 있다. 산은 개인의 곤궁을 어루만지고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의연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무등산도 예외가 아니다. 그 아픔과 고독은 그리움의 계곡이 되고, 그 인내와 깨달음은 호연지기의 능선이 되었다. 산은 왜곡도 과장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 침묵 속에 격동이 있고, 개성(個性)과 조화(調和)는 둘이 아닌 일체다.
 
그러나 이일을 어찌하랴. '시이불견(視而不見)이요 청이불문(聽而不聞)'이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니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이와 같았을까? 30여년 전 그 때, 우리는 그렇게 눈 감고 귀 막고 살았다. 마음의 눈(心眼)이 흐리니 어찌 볼 수 있으며, 마음을 열지(開心) 못하니 어찌 접할 수 있었겠는가. 직시(直視)하지 못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업(業)이다. 

 
그 업을 무등산이 오롯이 끌어안았다. 그 큰 두 팔로 사람들을 껴안고 볼을 비비며 넓은 가슴으로 감싸주었다. 그리고 이성부 시인의 노래로 마침내 가르쳤다. "산이 무엇을 말하고 산에 오르면 어떻게 사람도 크게 서는지를."  "저 산이 입을 열어 말할 날이 이제 이를 것이고, 저 산이 몸을 일으켜 나아갈 날이 이제 또한 가까이 오지 않았느냐" 하면서.  

 

장불재에서 무등산을 내려서며 방랑시인 김시습을 떠올린다. "산을 바라보며 그 높이를 그리워하고(慕其高), 그 무게를 배우며(學其重),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고(愛其麗), 그 변하지 않음을 벗한다(友其舊)" 고 한 그의 글을 되뇌이며 자꾸 무등(無等)을 돌아본다. 그것은 무등산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요, 오래 벗하며 배우고 싶은 내 마음의 표출일 게다.

 

서석대 오르는 길

 

서석대 정상에서

 

무등산 옛길로 내려오며 바라본 서석대

 

무등산 옛길에서 본 역광에 비친 주상절리

 

 

하산(下山)

 

무등산(無等山)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백마능선, 이름에 얽힌 속설처럼 가을날의 억새가 백마의 갈기처럼 날렸겠다. 낙타봉 암릉, 만만함과 아찔함이 상존(常存)하니 자주독립과 자력갱생이 신변보장(?)에 으뜸이리라. 안양산, 편백나무 숲 향이 산객을 맑은 세상으로 인도하더라. 둔병재, 짧은 산행에 긴 여운! 출렁다리 건너는 산객이여, 어느 고개에서 그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려 하는가?

 

백마능선에서 되돌아본 무등산

 

색깔 불문 좌우로 정열, 저 뒤로 무등이 자리하고 (안양산 정상)

 

내려온 산하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2011년 4월 25일(월) 생각 맑은 아침에

무등(無等)의 산에서 돌아와

월파(月波, 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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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시간]

0015  양재역 출발

 

0445  유둔재

0545  백남정재

0640  북산

0650  신선대

0810  규봉암  -0830,  식사 -0850

0910  장불재

0940  입석대

0950  승천암

1000  서석대

1045  낙타봉 암봉

1125  안양산  - 1135

1155  둔병재

 

1230  하늘아래 - 1500

1500  화순 출발

1930  서울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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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수막 첫 신고식이네요, 신선대에서                               (사진 by 정산)

 

                                                        바위와 암자 앞에 사람은 작아지고, 규봉암에서                        (사진  by  정산)

 

                                                          더러는 인증샷도 생각나고, 입석대에서                       (사진 by 정산)

 

4인조 산악밴드(?), 서석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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