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11] 산에 들어 옛사람을 만나다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4월 10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방아재-만덕산-수양산-국수봉-최고봉-유둔재
(3) 산행거리 : 19.1 Km(도상거리), 실 거리 21.5Km
(4) 산행시간 : 7시간 5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1명 합동산행
- 6인의 동행자 : 성원,월파,정산,지용,성호,제용
2. 산행후기 : 산에 들어 옛사람을 만나다
글머리에
오늘은 담양의 방아재에서 만덕산, 수양산, 국수봉, 최고봉을 거쳐 유둔재까지 걷는 21.5Km의 편안한 산길이었다. 중간 중간 무등산을 조망하고 발 아래로 창평 벌판과 광주호를 바라보며 걸었다. 산행 후에 호남의 내로라하는 원림(園林)을 찾아 옛사람의 유흔을 살피고 그 정취를 즐겼다. 산보다 아랫마을에 마음을 더 쏟았다. 심신이 풍성한 하루였다. 그 옛사람의 얘기 한 번 풀어보자.
(1)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오늘 산행의 후반, 최고봉 오르는 산길에 써 붙인 한시(漢詩) 한 수가 생각난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詠) 중 제 5영(詠)인 '석경반위(石逕攀危 :위험한 돌길을 더위잡아 오르며)'라는 제(題)의 한시였다. 그 숲에 웬 한시였을까? 소쇄원이 멀지 않음을 알리는 것이리라.
一逕連三益 (일경연삼익) 외줄기 길에 삼익(三益)이 이어졌고
攀閒不見危 (반한불견위) 험한 길 다잡아 오르니 위험은 없네
塵蹤元自絶 (진종원자절) 속세의 발자취를 스스로 끊고 나니
苔色踐還滋 (태색천환자) 이끼 빛깔은 밟을수록 더욱 푸르구나
삼익(三益), 세 가지 유익한 것이라 친구로 삼을만한 것이다. 즉 매화(梅), 대나무(竹), 수석(壽石)을 일컬음이다. 소동파(蘇東坡)가 이르기를, "매화는 차가워도 빼어나고, 대나무는 여위어도 장수(長壽)하고, 수석(壽石)은 못생겼지만 문채가 있으니 이것이 삼익(三益)의 벗이다"(*)라 했다. (*) 찬문여가매석죽(贊文與可梅石竹)
돌이 많은 위험한 길(石逕)을 오르면서도 얽매임이 없이 원림(園林)의 행로를 즐겼던 옛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매(梅), 대(竹), 돌(石)의 삼익우(三益友)를 연이어 만난 산길이니 더욱 그랬을 게다. 김인후가 석경반위(石逕攀危)하며 이 시를 읊은 곳이 소쇄원의 뒷산 어디쯤일까? 그 길을 그려보며 옛 선비를 생각했다.
석경반위(石逕攀危)의 한시가 적힌 안내판(소쇄원 뒷산 해남터 갈림길에서)
소쇄원 제월당에 걸린 김인후의 48영(詠) 시 - 다섯 번째가 석경반위(石逕攀危)
(2)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
산행 후에 아랫마을 나들이에 나선다. 대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들어가니 계류(溪流)를 따라 호남에서 으뜸인 원림(園林)이 나타난다. 숨은 듯 조용한 그곳, 속세를 떠나 선계(仙界)에 머물렀던 옛 선비의 정신이 느껴진다. 일컬어 소쇄원(瀟灑園)이라 한다. 소쇄(瀟灑), 그 이름이 특이하다. 굳이 풀이하면 '맑고 깨끗해 시원하다'는 뜻이니, 머리가 절로 개운해진다.
기묘사화 후 양산보(梁山甫)가 원했던 삶이 그러했을까? 스승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전남 화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자, 출세의 뜻을 접고 낙향하여 별서정원(別墅庭園)을 짓고 스스로 소쇄옹(瀟灑翁)이라 부르며 한거(閑居)한 곳이 소쇄원이다. 그곳에서 김인후, 송순, 정철 등 기라성 같은 선비들과 교유(交遊)하며 자연을 벗 삼아 평생을 은거했다.
그의 애착어린 소쇄원 곳곳을 살핀다. 원림 입구의 '애양단(愛陽壇)'은 계곡을 감상하기에 좋고, 넓은 암반과 담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 '오곡문(五曲門)'은 맑은 계류가 흐른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제월당(霽月堂)'은 사색하고 독서하던 주인의 공간이요, 사랑방 역할을 한 '광풍각(光風閣)' 주변은 계류와 대숲을 두고 그 풍치가 으뜸이다.
제월당(霽月堂) 마루에 걸터앉는다. '비 개인 하늘의 상큼한 달'이라! 바로 앞의 광풍각(光風閣) 너머 대나무 숲에서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갠 뒤 해 뜰 때 부는 청량한 바람', 그 광풍(光風)인가? 침계문방(枕溪文房)이라 했으니 광풍각에 누우면 머리맡에 개울물 소리 졸졸 들렸겠다. 누각의 그림과 글씨가 물속의 돌에 비춰졌겠다.
오! 제월(霽月)과 광풍(光風)이 어울린 여기, 이름 그대로 소쇄원(瀟灑園)이구나. 가슴에 품은 생각이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으니 소쇄출진지상(瀟灑出塵之想 )이 흘러넘쳤겠다.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 소쇄출진지상(瀟灑出塵之想 ) : 맑고 깨끗하며 세속을 뛰어넘는 고결한 생각, 중국 제나라 공치규(447-501)의 '북산이문(北山移文)'
대숲 쪽에서 본 돌계단과 제월당(左上), 광풍각(右下)
제월당 마루 뒷문 밖에 매화가 한창이다
(3)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소쇄원에서 시간을 너무 보냈나? 식영정(息影亭)에 들릴 시간이 없다. 송강이 자주 머물었던 식영정을 차창너머로 보면서 호남 사림(士林)과 그들의 가사문학(歌辭文學)을 떠올린다. 조선의 가사문학은 정극인(1401-1481)의 상춘곡(賞春曲)에서 태동하여 송순(1493-1583)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거쳐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으로 맥이 이어졌다. 성산별곡 한 자락을 읊조려본다.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시는가/ ........ /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
- 성산별곡, 서사(緖詞) 중에서 (현대어 풀이)
식영정을 뒤로 하고 송강의 삶을 생각한다. 가사(歌辭)를 읊으며 삶을 관조했던 송강의 모습과 달리, 정치가로서 송강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섬을 반복했다. 그의 정치는 역동적이었으나 갈채와 비난이 공존했다. 양극(兩極)이 한 치의 양보 없이 평형했다. 정치에서 물러나면 당쟁의 파란을 주시하며 담양의 성산(星山, 별뫼)에서 자연에 묻혀 지냈다. 그의 정치는 극한의 대립이었으나 그의 은거는 자연과의 동화(同和)였지 싶다.
송강과 교유하던 호남의 사림(士林)은 쟁쟁하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여라"고 읊은 김인후가 있고, 식영정과 지근거리에 있는 소쇄원의 양산보도 있다. 기대승은 송강을 '청절한 수석(水石)'에 비유했지만, 이율곡은 송강을 '강결충의(剛潔忠義)하나 협애(狹隘)하다는 점이 병통'이라 했다.
심지어 간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니 후인이 송강을 논하기란 실로 난해하다. 송강이 주도해 1,000명이 넘는 선비의 목숨을 앗아간 기축옥사 문제는 오늘 여기서는 논하지 않으련다. 공과(功過)를 그대로 직시해야겠지. 500년 세월에 그의 유흔은 지워지고, 광주호의 건설로 식영정 앞을 흐르던 자미탄(紫薇灘)의 정취마저 퇴색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혹여 소인이 '협애(狹隘)'에 빠질까봐, 버스는 속도를 올려 창평으로 향한다.
강산을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만덕산 지난 산길에서)
눈 아래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수양산 가는 길의 진달래)
(4) 불우헌(不偶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창평으로 가며 호남 4구간 말미에 백설이 분분하던 구절재로 내려서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고개 북쪽은 정읍 칠보면 시산리로, 조선 태산현의 현아(縣衙)가 있던 고현동(古縣洞)이다. 단종이 폐위되자 정극인은 그곳으로 낙향해 '500년 지켜온 마을의 약속'이 된 고현동향약(古縣洞鄕約)을 만들어 이웃이 상부상조하는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거기서 상춘곡(賞春曲)을 읊었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에 미칠까 못미칠까 (*) 홍진(紅塵) - 세속
천지간에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는 지락(至樂)을 모르는가 (*) 지락(至樂) - 지극한 즐거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송죽 울창한 곳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 수간모옥(數間茅屋) - 초가삼간
조선은 계급사회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이 분명한 사회였다. 어쩌면 공상(工商)은 보이지 않고 사(士)와 농(農) 중심의 사회였는지 모른다. 그것도 농(農)은 사(士)에 부속된 주종(主從)의 사회였다. 그래서 선비는 벼슬에 나아가 권세를 누리고 관직에 물러나서도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읊을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급이었다.
사농공상의 분별이 사라지고 오히려 공상(工商)의 위세가 한층 높은 오늘에, 풍월주인(風月主人)이 되어 마음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여유는 사농공상의 계급이나 부(富)의 과다(寡多)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본성(本性)을 찾아 제 마음을 잘 다스리는 데 있지 않은가! 오늘도 그 마음으로 마루금을 걸었다. 산은 계급도 부의 과다도 차별하지 않는다.
가사문학으로 화두를 다시 옮겨보자. 상춘곡(賞春曲) 이후 가사문학의 맥은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에 의해 이어진다. 면앙정(俛仰亭)은 송순의 호를 딴 정자 이름이다. 그는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등 쟁쟁한 문인들을 길러 낸 학자이기도 하다.
벽계수 앞에 두고 대나무 울창한 곳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담양의 대숲에서)
(5)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
호남 7구간부터 11구간까지 다섯 차례의 산행에서 추월산, 용추봉, 강천산, 괘일산, 만덕산을 지나며 오른쪽에 담양 땅을 두고 걸었다. 그때마다 담양 봉산면 제월리의 면앙정(俛仰亭)을 둘러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 곳에서 송순의 면앙정가 한 구절을 읊고 싶었다.
너럭바위에 송죽(松竹)을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청학(靑鶴)이 천리를 가려 두 날개를 벌리는 듯 / ............/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에 틈이 없다/ 바람도 쐬려하고 달도 맞으려 하고/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
이제 호남정맥은 담양을 벗어나 무등산을 거쳐 화순으로 향한다. 오늘도 면앙정에 들르지 못했다. 언제 다시 면앙정 송순을 마음 가까이 둘 수 있겠는가? 아쉬움에 그의 시조 한 수를 더 읊조려본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어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
송순의 마음이 허허롭다. 임금이 계신 구중궁궐과 권문세가의 99간 집을 익히 보았을 텐데, 단출한 초가3간에 자신과 달과 바람을 들이고 강산으로 병풍을 친 그의 삶이 오히려 넉넉하다. 자연과 더불어 안빈낙도했던 삶이다. 면앙정을 찾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크다. 시절의 연(緣)을 기다려야 하리라. 창평 시장에서 국밥 한 그릇에 소맥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서둘러 상경하는데 행락 철이라 마음에 비해 길은 멀다.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수양산 숲에 걸린 해, 입석리에서)
글꼬리에
이제 담양 땅과 이별할 때다. 그 마루금에서 만난 묘지의 영혼이 몇이며, 기로(岐路)에서 헤어졌던 길은 무릇 기하(幾何)더냐! 그러나 담양의 대나무에 비하랴! 담양은 죽림천하(竹林天下)였다. 죽순(竹筍)이 돋아나는 봄이다. 죽순은 제 몸을 살찌우지 않는다. 순(筍)이 돋을 때의 그 몸통대로 올곧게 키만 높일 뿐이다. 그렇게 푸르게 살아간다. 그 꿋꿋함이 담양의 선비정신이었지 싶다.
다음은 호남의 명산 무등산이다. 벌써 가슴이 설렌다.
2011년 4월 11일 이른 새벽에
호남의 옛사람을 만나고 돌아와
월파(月波, 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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