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14] 느릿느릿 걷는 산길의 미학(美學)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6월 12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돗재-태악산-노인봉-성재봉-촛대봉-두봉산-장재봉 갈림길-개기재-계당산-예재
(3) 산행거리 : 23.5Km(도상거리), 실 거리 26.0Km
(4) 산행시간 : 9시간 55분(계당산 철쭉군락지 휴식 60분 포함)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8명 합동산행
- 7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은영,지용,성호,제용
2. 산행후기 : 느릿느릿 걷는 산길의 미학(美學)
(1) 태악산(太岳山, 530m) - 명실상부(名實相符)하지 않더라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라, 좋은 비는 시절을 안다고 했다. 때 이른 장맛비 소식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제주도에 머문단다. 돗재에서 숲으로 든다. 풋풋한 새벽 공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숲 향에 푹 젖어들 무렵 미명(微明)의 태악산에 오른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실체가 못따르니, 여느 무명봉과 다를 게 없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을 기대했는데 유명무실有名無實이다,
하기야 이름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허명虛名에 집착하지 말고 실상實相을 볼 수 있으면 되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이마에 주름살이 조금씩 늘어난다. 흔히 '늙어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 허상虛像이다. 오래된 포도주처럼 사람도 세월을 따라 속으로 곱게 익어갈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능선을 걷는다. 서출동류西出東流의 산하(山河)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태악산 동쪽 아래에 가천(佳川)이 흐른다. 그 물은 서쪽 태악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소위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다. 아침햇살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약수(藥水)요, 그 곳에는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했다. 알고 보면 서울의 청계천도 한강과 달리 서출동류하는 물이니, 조선 600년 왕도의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졌다나, 믿거나 말거나.
노인봉(老人峰, 529.9m)에 이른다. 이름이 노인이지 주변은 청춘의 빛깔로 가득하다. 단순히 나이 드는 게 아니라, 인고(忍苦)의 세월에 초탈함을 일깨웠으면 좋겠다. 더 너그러워지고, 그 포근함으로 더욱 주변을 감싸면서. 성재봉(519m)에서 말머리재로 내려섰다가 촛대봉(522.4m)으로 향한다. 모두 그 이름 있어도 명실상부名實相符하지 않으니, 그저 이름은 이름일 뿐.
西出東流의 佳川이 흐르는 東佳里 마을, 새벽 잠에서 깨어나고
노인봉, 이름이 노인이지 청춘의 빛깔이 가득하다
(2) 두봉산(斗峰山, 631m) - '넓게' 펼쳐지는 길도 생각하라
두봉산은 근처의 최고봉이니 조망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태악산부터 500m급 연봉들이 꼬리에 매달려 있고, 동쪽의 장재봉과 남쪽의 계당산으로 이어지는 500m급 봉우리가 이마에 다가온다.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산야를 굽어본다. 조금 높은 산과 조금 낮은 산이 고만고만하게 어울리고 있다. 산은 스스로 키 자랑 않는데, 사람들은 높이, 더 높이를 외치는 세상이다.
높고 빼어난 산만 산이겠는가, 낮아도 포근한 산이 있음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정상을 향해 위로만 오르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닐 게다. 바다처럼 옆으로 넓어지는 길도 있다. 엊그제 제대하고 가을에 공부하러 먼 길 떠나는 아들에게 슬쩍 귀띔할까 한다. 높은 산도 있지만 넓은 바다도 있다고. 높이 오르는 것만 길이 아니라 넓게 펼쳐지는 길도 있다고.
'높이, 더 높이'를 부르짖는 세상에서 아들 녀석이 '넓게, 더 넓게'로 생각의 틀을 쉽게 바꿀 수 있을까? 그저 귀띔할 뿐, 길을 가는 것은 그 녀석의 몫이니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생존(生存)의 참된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니, '봄의 신록에서 가을 단풍을 미리 살피는 안목'을 길렀으면 하는 아비의 바람이 있을 뿐이다.
(*) 생존(生存) - 참된 '생존은 혹독한 환경에서 누군가를 밟고 서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힘을 합쳐 살아남는 것'. 공생(共生)과 공존(共存)
바람이 스쳐도 흔적조차 없는 숲길에 심신을 맡기고 길을 간다. 더덕도 캐고, 산딸기도 따먹으며 느릿느릿 숲길을 걷는다. 개기재에는 여름의 전령사인 망초꽃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라 잃은 그때 방방곡곡에 망초(亡草)가 돋아났다고? 어찌 한두 번쯤 절실한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개기재에서 중간 탈출자가 나온다. 아! 나도 힘들다. 함께 탈출해 쌍봉사나 둘러볼까?
두봉산에서 본 능선들, 산은 키 자랑 않고 어울리는데
아, 무슨 사연으로 이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느냐?
너의 뿌리에 무엇을 감추었느냐? 이파리 넷의 너를 '더덕'이라 부르더라
엇, 심봤다! 때를 기다린 너, 주(酒) 님의 품에 잘 숙성시키리
개기재의 망초, 너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었으니.
(3) 계당산(桂棠山, 580.2m) - 4자성어(四字成語) 놀이하면서
개기재에서 쉬엄쉬엄 계당산을 오른다. 체력이 떨어지는 시간이다. 잡념이 찾아온다. 명실상부名實相符, 명불허전名不虛傳,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 4자성어 놀이를 한다. 오늘의 산은 4자성어로 뭐라 부를까? 내장산, 무등산 정도면 헌걸찬 기상을 갖추었으니, 단연 '영웅호걸英雄豪傑'인데, 고만고만한 높이에 밋밋한 오늘의 산은?
막걸리 한 사발 안 마셔도 그 이름 줄줄이 나온다. 장삼이사張三李四요, 초동급부樵童汲婦다. 필부필부匹夫匹婦요, 갑남을녀甲男乙女다. 좀 아량을 베풀어 선남선녀善男善女도 있다. 그중 장삼이사張三李四가 1호 당첨이다. 중국에서 흔한 성(姓)인 장 씨와 이 씨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그저 평범한 오늘의 산 셋과 봉우리 넷(산삼봉사山三峰四)와 운율도 딱 맞고.
그 사이 정상 직전의 철쭉 군락지에 도착한다. 쉼터의 벤치에서 얼마나 쉬었을까? 얼린 맥주에 이런저런 간식이 각자의 배낭에서 쏟아지니 산행을 끝낸 기분이다. 걸쭉한 파티 후 일행들은 고사리를 캐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덕분에 나는 벤치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1시간이 지났다. 참 느긋한 산행이다. 홀로 후미에서 오고 있는 강촌 님의 공덕(功德)이다.
길을 간다. 계당산 정상의 이정표가 쌍봉사(雙峰寺)가 멀지 않음을 알린다. 하산 후에 쌍봉사에 꼭 들렀으면 좋겠다. 나만의 생각일까? 3층 목탑 대웅전의 풍경소리 들으면 절로 귀가 씻길 게다. 맑은 소리가 따로 있던가! 내 귀를 씻으면 세음(世音)이 맑아지지 않던가! 시비(是非)에 얽매인 귀를 솔바람에 씻으면 부처가 따로 없겠다.
계당산 철쭉 군락지의 쉼터, 시선은 각각이라도 한결같이 웃고 있다. 그 미학美學 !
너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헬기장이 꽃밭으로 변했더라.
대장님, 우리 대장님! 계당산의 얼음 생맥주는 누가 다 마셨을까요? ㅋㅋㅋ
(4) 떡갈나무 숲 -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떡갈나무 우거진 숲을 쉬엄쉬엄 걷는다. 떡갈, 신갈, 굴참, 갈참, 졸참 ...... 모두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다. 그 분별이 쉽지 않다. 그냥 숲 향에 취해 천천히 걷는다. 산행의 후반, 특유의 느릿함으로 나뭇잎에 스며드는 햇살을 즐긴다. 묵묵여림默默與林의 행보다. 혼자가 아니다. 말은 없으나 숲과 함께 걷는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느림의 미학美學이라!
나무의 삶, 그 순환을 생각한다. 모든 나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떨어져 싹이 트고 다시 어린 나무가 된다. 봄빛은 꽃과 잎을 만든다. 꽃은 열매를 만들고 잎은 열매를 키운다. 여름빛은 열매를 살찌우고, 열매는 가을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에 떨어진 열매는 겨울을 지내고 싹이 돋아 자생(自生)의 길을 도모한다. 참나무 또한 그러하다.
참나무의 어린 싹은 소나무 숲에서 생존(生存)을 갈구한다. 음지식물인 참나무는 소나무 아래에서 생존의 틈새 확보에 성공한다. 양지식물인 소나무는 그늘에서 자생력이 떨어진다. 소나무 밭이 점점 참나무로 채워지는 까닭이다. 이런 생태계의 천이(遷移)처럼 우리네 삶도 변화와 적응의 연속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공생共生과 독존獨存의 벼랑이다. 홀로는 외롭고 함께는 따뜻한 법!
얼마나 떡갈나무 숲을 걸었을까? 코끝에 상큼한 편백나무 향이 스친다. 떡갈나무가 자리를 양보했나 보다. 예재가 가까워졌다는 기별이다. 예재로 내려선다. 그 옛길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울고, 그 소리에 감자 꽃만 피어난다'던 도종환의 6월이 한껏 깊어져 있었다. 한 바가지 냉수의 등목에 온몸에 희열이 느껴진다. 오, 6월이 오면 삶은 아름다워라!
정상의 이정표에 '쌍봉사'가 더 크게 보인다. 어디로 갈까요, 대장님?
떡갈나무의 짙푸름이 6월의 태양을 가렸다. 이것이 음덕(陰德)이다.
떡갈나무 우거진 숲에서 나무의 삶을 되새긴다.
떡갈나무 숲의 끝에서 편백나무가 산객을 반긴다.
2011년 6월 13일(월) 이른 새벽에
느리게 걸은 숲의 미학(美學)을 반추하며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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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쌍봉사(雙峰寺) - 솔바람 머무는 그곳
산으로 가며 '쌍봉사에 들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으나, 여름날의 장거리 산행에 시간이 부족하니 그것이 가능할까 했었다. 개기재에서 계당산을 오르며 그 마음을 비우고 숲에 푹 빠졌다. 그러나 계당산 정상의 쌍봉사 이정표가 잔잔한 마음에 다시 돌을 던진다. 그래도 결국 숲길을 택하고 쌍봉사는 후일을 기약했다. 꼭 오늘, 이 시간에 가야겠다는 집착執着을 버리니 홀가분해졌다
(#1) 촛불 아래 기도하던 신도의 실수로 3층 탑형의 목조 대웅전이 화마(火魔)에 휩싸였단다. 1984년 쌍봉사의 일이다. 보물 하나가 한 줌 재로 변해 허공에 날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껍데기 따라 실상實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리라. 마음에서 그 형상을 비우고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채우는 것보다 힘든 일은 비우는 일이다. 형상에 매달려 그것을 붙들면 집착執着이 된다.
(#2) 길 가던 두 스님이 개울을 건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처녀를 만났다. 한 스님이 그 처녀를 업어 개울 건너편에 내려주고 길을 재촉하는데, 다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은 수행자로서 어찌 처녀를 업어줄 수가 있습니까?" 허허! 난감했겠다. 그런데 처녀를 업어 준 스님 왈, "스님, 저는 이미 그 처녀를 내려놓았는데, 스님께서는 아직도 업고 계십니까!" 한 방이다. 할(喝)이다.
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집착執着이다. 내려놓지 못하면 사태를 직시直視할 수 없다. 자기 관점에 머물면 실체적 진실을 보는 눈이 흐려진다. 방하착放下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그 일은 단순한 훈련이 아니라 처절한 수행으로 체득되는 것이리라. 한 순간 삐끗하면 깨달음의 길과 멀어지는 것이다. 계당산 정상의 이정표가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1910년대의 쌍봉사 3층목탑,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by 김영택 화백
냉해(冷害)로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배추 값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한우 가격이 돼지고기보다 싸졌다는 TV보도가 있었다. 쌍봉사 사하촌(寺下村)의 꼬부랑 할머니는 내년에 배추 대신 무만 심을까? 그 할머니, 배추쌈이 목에 넘어갈 수 있을까? 구제역으로 명절에 자식도 멀리하고 소 키우기에 심신을 쏟은 두메산골 목부는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
우리네 삶이란 도처에 가슴 아픈 사연의 연속이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가상의 드라마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배추값에, 소값에 쓰리고 아픈 이 땅의 중생들 마음을 쌍봉사의 솔바람이 살랑살랑 어루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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