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16] 끝없는 길의 끝에 서다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7월 10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곰치-백토재-국사봉-깃대봉-노적봉(땅끝기맥 분기점)-삼계봉-장고목재-가지산-피재-병무산-금장재-용두산-갑낭재
(3) 산행거리 : 22.9Km(도상거리), 실 거리 25.6Km
(4) 산행시간 : 11시간 3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19명 합동산행
- 5인의 동행자 : 성원,월파,정산,은영,성호
2. 산행후기
(1) 비안개 자욱한 숲길에서
곰재, 웅치(熊峙), 곰치라! 그 이름 헷갈리기도 해라. 곰재는 우리말이요 웅치(熊峙)는 한자이니, 곰치(곰峙)는 우리말과 한자를 합친 소위 비빔밥이다. 짬뽕도 먹고 싶고 자장면도 먹고 싶어 헷갈릴 때, 그 반반을 내놓는 '짬짜'라는 메뉴가 한때 인기를 끌었다. 문득 그 ‘짬짜’가 생각나, 오늘 이 고개를 곰치(곰峙)라 부르며 산으로 든다. 생각보다 빗줄기 굵지 않아 다행이다.
비탈이 시작된다. 가파른 길은 빗물의 통로다. 심장의 가쁜 박동이 느껴진다. 숲은 아직 잠에 빠져있지만, 비안개 속에서 머리를 풀고 곧 잠에서 깨어나리라. 함초롬히 빗물 머금은 저 나뭇잎들, 비 그치면 수줍은 듯 깨어나리라. 새벽 숲에서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늘 유쾌하다. 찌릇찌릇, 새 울음소리 들린다. 아, 내 거친 숨소리가 새들의 단잠을 깨웠나 보다.
새벽 숲에서 '미물(微物)의 수면을 방해하지 말라'던 오랜 친구가 있다. 저 새의 울음소리에 그가 뭐라고 할까? 비안개 자욱한 국사봉(499m)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저 아래 슬로시티(Slow City)라 부르는 장흥의 산골마을이 있다. 자연의 방식 그대로 느긋한 삶을 꾸려가는 곳이란다. 느리게 사는 삶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 얘기대로, '느릿느릿 거닐고, 푹 빠져 얘기 듣고, 내면의 꿈을 일깨우고, 가슴을 열고 기다리고, 마음의 소리로 글을 쓰고, 가끔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삶이 그러할까? 소위 '빨리'나 '높이'를 쫓는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서두르는 마음과 뜬구름 같은 욕심에서 초탈하면 어디든 그런 세상이지 않을까?
나뭇잎도, 거미줄도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다
산봉우리보다 그 아랫마을이 더 멋진 곳이다
(2) 삼계(三界)의 갈림길에서
땅끝기맥 분기점인 노적봉(露積峰, 430m)에 오른다. 이름 그대로 이슬에 함초롬히 젖어 있다. 그 이정표 요란하다. 이것저것 모두 적혀있다. 자상하기도 하여라. 이제 호남정맥은 영산강 수계와 작별한다. 다섯 차례 걸어온 화순(和順) 땅과도 헤어진다. 전혀 미답(未踏)이었던 화순에 꽤 정이 들었다는 생각이다. 화순의 산하를 다시 찾는 날 있으리라.
삼계봉(三界峰)을 지난다. 삼계(三界)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이치에 따른 '물길이 세 갈래로 나누어지는 경계'를 말함인가? 백두대간의 삼수령(三水領)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아니라 지나온 땅끝기맥 분기점이 영산강, 탐진강, 보성강의 경계이니, 그곳이 삼계봉(三界峰)이다. 그런데, 다음 봉우리에 또 삼계봉이란 표지기가 나타난다. 허 참! 삼계봉이 도대체 몇개야?
불교적 우주관으로 보면, '깨달음을 구하지 못한 중생의 세계'를 삼계(三界)라 한다. 욕계(欲界, 욕심의 세계), 색계(色界, 물질의 세계), 무색계(無色界, 관념의 세계)를 말함이니, 중생의 몸과 마음이 머무는 곳이 바로 삼계다. 짧은 생에서 깨달음의 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도처가 삼계이니, 이 봉우리 저 봉우리 모두 삼계가 아니겠는가! 속인이 삼계를 벗어나기란 아득하기만 하여라.
장고목재로 내려선다. 맛난 간식이 등장하고, 소담스런 얘기가 쏟아진다. 산을 걷는 재미는 여기에 있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난다. 힘든 산비탈을 오르면서도 마음이 더 너그러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음박질하듯 앞서간 일행은 그들만의 즐거움이 있으리라. 여기에서 일찍 산행을 접은 이는 나름대로 재미를 찾을 것이고.
노적봉, 바람재 삼거리, 땅끝기맥 분기점 - 그 이름 달라도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자상한(?) 장흥의 이정표
이정표 없어도 곳곳이 삼계(三界)이거늘
장고목재에서 소담스런 얘기들이 이어지고
(3)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를 지나며
마루금에서 약간 벗어난 가지산(伽智山, 509.9m) 정상의 암봉에 오른다. 비안개가 빚어내는 몽환(夢幻)에 한동안 넋이 빠졌다가 삼거리로 되돌아와 숲길을 걷는다. 바위 전망대에 이른다. 다행이 숲 너머로 보림사(寶林寺)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도의 보림사, 중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삼보림(三寶林)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 은은한 풍경소리 가까이 들으면 시름이 사라지겠다.
보림사 가는 길 가장자리의/ 가지산 봉우리들은/ 어깨를 마주대고 옹기종기 앉아들 있어/
서너 발쯤의 작대기 한개만 있으면/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걸쳐놓을 수 있다//
우리 비록 떨어져 살지라도/ 그대의 섬 머리와 내 섬 머리 위에/ 그런 작대기 하나 걸쳐놓고 살자//
장흥의 문인 한승원(1939 ~ ) 교수가 쓴 '보림사 가는 길'이다. 산에 들면 늘 아랫마을의 삶과 역사를 살피게 된다. 그러한 나의 산행은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소통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비록 달리 살더라도 서로를 연결하는 마음의 작대기 하나 걸치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 작대기 이어지고 포개지면 더욱 멋진 세상이지 않겠는가!
보림사에서 시를 읊었던 이가 한둘이랴. '술잔을 빗자루삼아 근심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삼아 시를 낚아 올렸던' 김삿갓은 보림사를 보고나서, 스스로를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혼자 걷다 보니 시름겨운 날도 저물어, 스님의 경쇠 소리가 흰 구름 사이로 들린다'고 보림사의 저녁 풍경을 노래했던 장흥이 낳은 조선 선비 백광훈도 있다.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난 이곳, 여기 다녀오길 잘 했지요
가지산의 암봉에 운무가 몽환적이다
전망바위에서 본 보림사가 아스라하다
(4) 중간 탈출의 길목에서
피재로 내려선다. 13Km 가까이 걸었지만 오늘 산행의 중간지점에 불과하다. 몇몇은 여기서 산행을 끝낸다. 후반부 산행이 은근히 걱정이다. 그냥 여기서 접고 보림사로 달려갈까?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에 눈 맞춘 후 삼층석탑에서 탑돌이하고, 대적광전에 들러 철조 비로자나불에 3배라도 드려볼까? 그러나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산으로 향한다.
편백나무 울창한 숲을 몇 차례 지나 병무산(513.7m)에 오른다. 발아래에 탐진강의 조망도 시원찮고, 날 맑으면 지척일 월출산은 오리무중이다. 아직 최종 목적지인 갑낭재까지는 9.5Km나 남았다. 습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서서히 체력의 한계가 느껴진다. 이제 어디에 마음을 두고 걸어야 할까?
차라리 폭우라도 쏟아졌으면 좋겠다. 그 굵은 빗줄기가 가슴을 적셔주고 영혼을 일깨우리라. 한바탕 지나가는 소나기라도 즐겁겠다. 세우(細雨)가 흩날리는 숲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숲은 짙푸르기만 하다. 비에 젖은 나뭇잎과 풀잎이 푸름에 젖어 있다. 잠시 스치는 바람마저 푸르게 느껴진다. 산객의 마음도 푸르러진다. 생기를 찾아 용두산(551m)을 오른다.
정상에 셈틀 산행대장과 큰오미 님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 후미에서 쉬엄쉬엄 걷고 있는 우리 일행이 걱정되었을 게다. 이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 피재에서 중도 탈출을 생각하다가 일행의 후미에 슬쩍 따라붙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간식을 나눠 먹으며, 서서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다.
피재의 버섯 재배단지
병무산, 허기가 질 때도 되었지요? 입에, 손에 불룩, 가득
세우(細雨)가 스치는 숲길의 풍경에 기력을 되찾는다
(5) 비룡(飛龍)의 혈(穴)에서
용두산(龍頭山)이라! "용두산아~, 용두산아~" 부르며, 고등어 갈비에 막걸리 마시던 부산의 용두산이 아니다. 풍수지리에서 용(龍)이 하늘로 오르는 비룡형(飛龍形)의 혈(穴)에 통상 용두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산객에게는 철망에 갇힌 산불 감시카메라와 확성기만 휑하게 보일 뿐이다. 시선을 옮긴다. 비안개가 먼 산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바라보는 먼 산은 가깝고, 걸어야 할 앞산은 오히려 멀게 느껴진다. 잠시 지도를 살핀다. 유치면 용문리, 장평면 용강리, 장동면 용곡리, 부산면 용반리, 모두 용두산 주변의 마을 이름이다. 용용(龍龍) 시리즈다. 모두 비룡승천(飛龍昇天), 청룡등천(靑龍登天), 비룡등공(飛龍登空)의 형세를 가진 마을일 게다.
가지산 기슭에도 보림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용(龍)과 관련된 지명들이 곳곳에 있다. 보조선사가 가지산 아래의 연못을 메우고 보림사 터로 삼으니, 연못에서 쫓겨난 황룡과 청룡은 결투를 벌여 이긴 황룡은 승천하고, 상처 입은 청룡은 피를 흘리며 고개(피재)를 넘어 어느 마을(청룡리)에서 죽었다던가?
오늘의 산길 주위에만 '청룡리'라는 마을이 세 곳이나 있다. 땅끝기맥 분기점을 기준으로 세 갈래 물줄기 따라 청룡리가 각각 있다. 화순 청풍면 청룡리, 영암 금정면 청룡리, 장흥 장평면 청룡리가 그들이다. 아무튼 용두산과 청룡마을, 용(龍)자 들어간 마을이 곳곳에 있으니, 명당의 혈맥은 방방곡곡에 고구마 뿌리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던 것일까?
용두산, 용문/용반/용곡/용반리, 그리고 3곳의 청룡리
(검은색 굵은 점선은 이번에 걸은 호남 16구간)
산은 비안개 짙어 용(龍)의 자취를 감추고
저기 탐진댐 수몰지 인근에 유치면 龍문리가 있다
(6) 가도 가도 끝없는 길에서
용두산을 내려와 만년고개 근처에서 휴식하며, 오늘의 산행은 거의 끝났다고 생각한다. 벼가 자라는 들판이 지척이고, 맞은 편 제암산 아래로 넓은 국도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마루금이 세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제 올망졸망 이름 없는 봉우리만 넘으면 되리라. 아, 그런데 암봉을 오르내리고, 계속 이어지는 무명봉에서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직 5km이상 남았는데, 10~20분이면 도착하리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통상 높은 산에서는 그 오르내림이 있어도 오직 숲에 몰입할 수 있어 힘든 줄 모른다. 그러나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낮은 산의 반복된 오르내림은 심신을 극도로 지치게 만든다. 이미 20Km 넘는 거리를 10시간 이상 걸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오후 4시 15분, 드디어 끝없는 길의 끝 갑낭재에 내려선다. 탈진 일보직전이다. 11시간 30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길가의 맑은 물에 몸을 씻고나니 후미의 일행이 도착한다. 산행대장의 지령이 떨어진다. 점심도 거르고 곧바로 귀경(歸京)해야 한다고. 아, 무슨 날벼락인가? 이런 날은 소맥이라도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데, 바람잡이(?) 이튼 아우의 불참이 아쉽다.
서울에 도착하니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다. 피로회복주(酒)는 다음에 마셔야겠지? 으응, 피로회복주는 피로회복 하고 나서 마시는 거야! 성원 형, 이번에 가지산에서 채취한 상황버섯으로 약주 담궈오는 거죠? 저도 몇 뿌리 보탰답니다. 아무튼 우리가 강팀은 강팀인 모양이다. 지난 번에는 태풍이 비켜가더니, 이번에도 폭우가 우리를 피해 북쪽으로 가버렸다. 우리가 비를 피해 다녔나?
수없이 많은 이정표만큼 갈 길도 멀다
보일 듯 닿을 듯 끝없는 길에 녹음만 우거지다
끝이 없는 길의 끝, 여기가 오늘의 끝이다
2011년 7월 11일(월) 늦은 밤에
끝없는 길의 끝에 서서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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