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22] 아홉마디 구절초, 그 청초함에 반해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10월 9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노고치-문유산(갈림길)-바랑산-송치-농암산-죽청재-갈매봉-마당재-갓걸이봉-708봉-미사치
(3) 산행거리 : 22.5Km
(4) 산행시간 : 8시간 55분(정맥구간, 식사 및 휴식 90분 포함), 황전터널 하산 20분 별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4명 합동산행
- 8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정산,은영,지용,성호,제용
2. 산행후기
(1) 고산마을, 그곳에 가보고 싶다
새벽 4시를 지난 노고치에는 어둠이 짙다. 가파르게 점토봉(611m)을 올라 잠시 숨을 고르고 문유산(文遊山, 688m)으로 향한다. 새벽 이슬은 차갑고 숲길은 적막하다. 우측 아래는 순천 승주읍의 고산마을이다. 그 막다른 계곡의 다랑이 논밭에서 자연농법으로 곡채(穀菜)를 가꾸는 농부, 한원식 선생이 있다. 땅을 깊이 갈아엎지도 않고, 따로 퇴비를 쓰지도 않고, 수확한 작물은 팔지 않고 이웃과 나눠 먹는다.
귀농해 20년 넘게 그렇게 살고 있단다. 화학비료는 커녕 잡초 뽑아 퇴비도 만들지 않으니 뒷간의 똥오줌으로만 거름을 삼는다. "도(道)는 똥오줌에도 있다"고 장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수확물을 팔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돌아간다. 자연에 순응하는 농사,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시킬 거라는 믿음인 게다. 유기농법과는 또 다른 차원의 농법이다.
그의 밥상은 이렇단다. 멥쌀과 현미찹쌀에 콩, 수수, 팥, 옥수수, 율무, 통밀보리, 밤, 조, 검정깨 등으로 밥을 짓는다. 그 밥에 호박나물, 표고버섯, 양파볶음, 풋고추와 양파, 오이....... 곁들여 땅에서 나온 쇠무릅, 거북꼬리, 순무 잎, 뽕잎, 비름, 명아주 같은 푸성귀를 밥상에 올린다. 허 참, 목에 침이 꼴깍 넘어가네. 맛도 맛이려니와, 천연 생약이나 다름 없다. 아토피 걱정이 없겠다.
그렇게 자연과 어울리니 영혼이 자유롭겠다. 바람이 스친다. 아홉 마디 하얀 구절초가 초롱한 눈매로 어둠을 밝힌다. 가을이다. 산에는 가을이 빨리 찾아온다. 이제 보이는 것은 가을빛이요, 들리는 것은 가을소리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 품에 안길 것이다. 한원식 선생의 가을도 그러하겠지.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접고, 문유산 갈림길에서 마루금을 따라 직진한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곳에 가보고 싶다.
(2) 산은 가을빛으로 물들더라
바랑산(618.9m) 정상에서 구름 위로 달처럼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햇살이 뿜어내는 빛의 순도(純度)는 투명하나 옅은 구름에 분광(分光)되어 곤지 찍은 신부의 볼처럼 붉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이 차가워지면 빛은 더욱 선명하게 굴절한다. 산객의 마음도 유리알처럼 맑아질테고. 가을은 그 빛을 영접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한동안 일출의 장관에 넋을 팔다가 송치(松峙)로 내려선다.
새로 난 터널에 통행량을 빼앗긴 고개는 한적하다. 인적이 줄면서 서서히 옛 고개로 돌아가겠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그 때의 숲길로 돌아가겠지. 고개의 역사도 윤회(輪回)하는 것인가? 지난 주말에 백두대간 하늘재를 다시 찾아 옛 고개의 정취에 흠뻑 젖었었다. 관음 세상과 미륵 세상을 잇는 그 호젓한 숲길을 생각하며 병풍산 갈림길에 올라 아침 밥상을 차린다. 한원식 선생의 밥상이 그립다.
농암산(476m) 가는 길에는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나뭇잎은 가을빛깔로 익어가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드높다. 나무는 사람보다 한 걸음 먼저 새 계절을 맞이한다. 봄, 여름을 짙푸르게 보낸 나뭇잎이 스스로를 내려놓을 준비를 한다. 소슬바람 불어오면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도 겨울채비를 하겠지. 저 나무처럼 사람 사는 세상에도 가을이 깊숙이 스미고, 겨울맞이로 분주하겠지.
죽청재(竹淸峙, 385m)로 내려선다. 죽청(竹淸)이란 이름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물 맑은 동네'에서 연유한 것이라는데, 죽청재 남쪽과 북쪽에 각각 죽청마을이 있다. 그중 남쪽의 죽청마을은 그 역사가 450년 이상된 곳이란다. 마을 뒤 깃대봉(401.3m)을 울타리로, 마을 앞의 호두산(263.3m)을 안산으로 하여 심산유곡에 터잡은 그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의 생각이 길이 전해지고 있을 게다.
(3)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능선에 서다
죽청재를 지나며 몸에 이상반응이 나타난다. 급속히 체력이 저하되며 피곤함을 느낀다. 마당재의 편백 숲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하다가 636봉에 오르니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지리산 주능선이 거대한 병풍처럼 좌우로 도열했다. 반야에서 천왕이라. 언제 봐도 가슴이 시려진다. 뒤돌아보니 조계산 장군봉이 오뚝하다. 암벽의 구절초에 넋을 팔다가 갓걸이봉(689.0m)에 오르니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는 황홀경!
산행이 6시간을 넘기면서 서서히 밀려들던 피로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안복(眼福)을 누린 정신의 풍요로움이 육신의 곤궁함을 한꺼번에 씻어버린 것이다. 갓걸이봉의 소나무 한 그루도 쉬어가라 유혹한다. 산객과 소나무의 이신전심(以心傳心)이랄까?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이렇게도 통할 수 있는 것이구나. 갓걸이인지, 갓꼬리인지, 아니면 갓머리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이름도 없는 오늘의 최고봉, 708봉에서 다시 지리의 능선으로 빨려든다. 온산이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의 지리산 화대종주를 다시 꿈꾼다. 지리는 늘 사람을 부르고 편안히 안아준다. 쉰질바위에 서니 오늘 산행의 종점이 다가옴을 직감한다. 노각나무가 자생하는 급경사를 내려서니 미사치(美莎峙, 445m)다. 바로 앞에는 동남쪽 계족산으로 가는 능선이 뚜렷하다. 여수지맥이리라.
미사치 아래에서 조촐하게 산상 파티를 연다. 모두 하나로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두부와 수육에 곁들여 들이키는 막걸리는 술술 넘어간다. 준비한 음식과 막걸리가 동이 날 무렵 서울로 향한다. 그 길에 코스모스 청초하게 하늘거리고 하늘은 청명하기 이를데 없더라. 모두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역시 '좋은 사람들'이다. 돌아온 서울에서 '양재지맥'으로 아쉬움을 달랬으니, 의정부까지 잘 들어가셨지요?
(4) 백운산이 지척이니, 끝이 보인다
작년 11월 가을의 끝에서 만나 백설이 분분하던 겨울 산에 함께 빠졌다가, 금년 봄과 여름에 남도의 정취를 만끽하며 이어온 호남정맥 산행이 백운산(白雲山)을 목전에 두고 있다. 10월 말의 백운산 산행이 산경도에 따른 호남정맥의 끝이요, 이어서 호남기맥을 걸어 11월 초에 외망포구에서 대망의 졸업식이 있겠지만, 오늘의 산상 파티는 잊지못할 호남의 추억이 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걸쳐 호남의 산을 함께 걸은 산행 동지들이다. "노래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봄이 지나가고, 벌서듯이 새를 기다리며 여름이 지나가고, 새를 잊은 척 기다리며 가을이 지나가고, 기도하듯이 새를 기다리며 겨울이 지나간다."고 한 시인(*)이 있다. 새는 날아가고 새가 오지 않자, 4계절을 번갈아 맞으며 새를 기다리니 그 새는 바로 마음의 파랑새이리라.
이제 백운산이 눈앞이니 호남정맥의 끝이 보인다. 호남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을 함께 한 산행친구들 마음속에도 그 파랑새가 날아왔는지 궁금하다. 마음의 숲을 흔들며 날아갔던 파랑새가 다시 돌아와 내 마음에도 평온함이 깃들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대여, 자적(自寂)한가? !!!
(*) 이경임(1963 ~ ), 봄 여름 가을 겨울
2011년 10월 10일(월) 늦은 밤
가을맞이하러 나섰던 하루를 떠올리며
월파(月波)
-----------------------------------------------------------------------------------------------------------------------------
[산행기록]
0408 노고치
0437 점토봉
0505 문유산 갈림길
0632 바랑산(일출 10분)
0717 송치재
0725 묘지
0758 병풍산 갈림길(조식 30분)
0910 농암산
0940 죽청재
1019 갈매봉
1039 마당재(휴식 및 후미 대기 30분)
1148 암봉 전망대
1205 갓걸이봉(10분 휴식)
1239 708봉(10분 휴식)
1255 쉰질바위
1303 미사치
1323 황전터널(산상 파티 90분)
1504 서울로 향발
-----------------------------------------------------------------------------------------------------------------------------
'산따라 길따라 > * 호남정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정맥 17] 철모르는 철쭉이 철없이 피었더라 (0) | 2011.11.07 |
---|---|
[호남정맥 23] 섬진강에 띄우는 편지 (0) | 2011.10.31 |
[호남정맥 21] 아름다운 절집, 선암사(仙巖寺) 가는 길 (0) | 2011.09.26 |
[호남정맥 20] 꽃과 잎의 침묵에서 듣겠습니다 (0) | 2011.08.30 |
[호남정맥 19] 산상과 산하, 호남의 1박 2일 (0) | 2011.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