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23] 섬진강에 띄우는 편지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10월 30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미사치-형제봉-도솔봉-따리봉-한재-백운산-매봉-외회재
(3) 산행거리 : 22.5Km
(4) 산행시간 : 9시간 50분(정맥구간, 식사/휴식 50분 및 백운산 정상 40분 포함), 진입 및 진출 각각 15분 별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1명 합동산행
- 6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정산,성호,제용
2. 산행후기 - 섬진강에 띄우는 편지
(1)
어제는 광양의 백운산(1,218m)을 향해 높고 험한 산길을 걸었습니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가지 치는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호남의 산야를 아우르다가 광양만의 망덕포구에서 그 맥을 다하기 전에 수직으로 마음껏 치솟는 곳이 광양 백운산이지요. 호남의 산줄기 중에서 가장 높기도 하거니와 데미샘에서 발원한 물이 섬진강이 되어 은빛 모래에 반짝이며 바다로 향하는 곳입니다.
그 산하에 구례, 광양, 순천이 어울려 있지요. 산은 높고 강은 넓은 곳이라 이 땅의 민초(民草)들이 그 품에 기대어 올망졸망 어울려서 가진 것 적어도 마음 씀씀이 넉넉한 곳이지요. 거기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산행이었습니다. 산에서 돌아와 어제의 산길을 반추하며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새벽 5시가 가까운 시각 10시간의 산행을 예정하고, 아니 컨디션에 따라 12시간을 각오하고 미사치(美莎峙)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가을이 깊으니 높고 험한 산일수록 그 정취가 더욱 그윽하리라는 기대가 있어 그 길에 대한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없었습니다. 산은 늘 우리를 말없이 맞아서 포근히 감싸주고 아쉬움 없이 보내주곤 했습니다. 이번 산행도 그러했습니다.
(2)
미사치(445.0m)에서 깃대봉(858.2m) 오르는 길목에서 여수지맥 분기점을 만납니다. 지난 산행의 말미에 이 산줄기를 보아두길 잘 했다는 생각입니다. 이정표만 보일 뿐 산줄기는 깊은 어둠에 잠겨있습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새벽의 산에서 묵상(默想)의 시간이 길어집니다. 어둠이 짙은 만큼 내면의 세계로 깊이 빠져듭니다. 그래서 산행의 에센스는 새벽입니다.
형제봉 가는 길에서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 이름처럼 형봉(兄峰, 861.3m)과 아우봉(弟峰, 844m)이 있습니다. 아우 먼저, 형님 뒤에 있습니다. 아우봉을 거쳐 형봉으로 가는 길에서 좌측으로 어렴풋이 지리산 주능선을 살펴봅니다. 날씨가 흐리니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조망이 아쉽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하겠지요.
성불사 갈림길에서 도솔봉(兜率峯, 1123.4m)으로 향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선말 고개 넘어간다 자갈길에 비틀대며 간다/ 도두리 벌 뿌리치고 먼데 찾아 나는 간다/ ~~~~~/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길을 막는 새벽안개/ 동구 아래 두고 떠나간다/ ~~~~~/ 졸린 눈은 부벼 뜨고 지친 걸음 재촉하니/ 도솔천은 그 어드메냐/ ~~~~~/ 에고, 도솔천아"
(3)
도솔봉(兜率峯)이란 불교의 세계관에서 말하는 도솔천(兜率天)에서 그 이름이 연유한 것일 겁니다.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후 이 땅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계신 곳이 도솔천이지요. 그래서 도솔봉으로 가는 길은 미래불인 메시아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한결 정갈한 마음으로 도솔봉에 오릅니다.
도솔봉은 백운산을 중심으로, 전후좌우의 능선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미륵 세상이 저러할까 싶습니다. 순간순간 구름 속에서 햇빛이 나오며 사방을 찬란하게 비춰줍니다. 옅은 안개로 아스라이 보이던 지리산 주능선도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반야에서 천왕에 이르는 연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풍족합니다. 몸은 백운산으로 향하나 혼은 지리산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따리봉에서 한재(850.0m)로 수직 낙하해 잣나무 등걸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 일행들이 모두 눈을 감고 삼림욕을 하며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백운산을 향해 벅찬 행군을 시작하려는 준비인 게지요. 그러나 정신이 맑으면 육신의 곤궁함이야 문제가 되겠습니까? 잠시의 휴식에 에너지가 솟습니다. 앞장서서 백운산으로 향합니다.
(4)
한재에서 백운산 가는 길은 급한 오르막으로 시작합니다. 그 오르막의 끝에서 신선대로 향하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정신이 깨어있으면 천지만물이 스승 아닌 것이 없다고 했지요. 눈에 보이는 산하가 온통 스승인 게지요. 그러나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미쳐야 미친다고 했는데 몰입과 직관의 맑은 안목이 부족하니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득하기만 하여라, 깨어있는 정신이여! 횡설수설, 몸이 힘들고 산길이 가파르니 생각과 행동이 따로따로입니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고 스스로를 달랩니다. 그저 산하(山河)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스스로 달래며 백운산 상봉에 오릅니다. 산경표에 따른 호남정맥의 끝이지요. 누군가 '호남졸업'이라 외칩니다. 나에게는 졸업의 특별한 감흥이 아직 없습니다.
백운산 정상에서 후미의 일행을 기다립니다. 함께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는 무언의 합의이지요. 간식을 먹으며 오늘 걸어온 길과 가야할 길, 억불봉 능선 등을 두루 살피다가,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굽어보며 그 동안 걸어온 호남정맥 길을 반추해봅니다. 쉽고 편한 길이 있었는가 하면, 어렵고 힘든 길도 많았습니다. 우리 삶에도 매끄러운 날만이 아니라 더러는 팍팍한 날이 있는 법이지요.
(5)
산행을 마친 일행을 태운 버스는 섬진강을 따라 구례로 향합니다. 사는 일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에서 팍팍한 마음 한끝을 강물에 풀어 보내라고 한 시인이 있지요. 버릴 것 다 버린 가난한 눈빛 하나로, 어두운 강물에 빛나는 별같이 그리운 눈동자로, 그렇게 착한 목숨 하나로 강가에 서 있어보라고 했지요. 그게 삶이라고. 그러면 우리네 팍팍한 삶이 술술 풀어질까요? 섬진강 민초들의 일상이 그러했을까요?
화개장터를 지나며 차창으로 섬진강을 굽어봅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멀지 않겠지요. 호남의 산줄기를 걷는 일을 마치면 틈을 내어 겨울 섬진강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겨울, 사랑의 편지'를 읊으며 섬진강을 따라 사나흘 걷고 싶습니다. 그 길에서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 /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6)
그렇습니다. 겨울 섬진강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며 지리산의 품에 푹 안기고 싶습니다. 그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산의 가르침을 접하고 싶습니다. 섬진강에 손발과 영혼이 묶인 채 평화롭게 살아가는 시인이 있습니다. 김인호입니다. 그는 꼭 산을 올라야만 산에 드는 것은 아니라 했지요. 산을 오르지 않아도 산에 드는 길을 시인은 이렇게 일러줍니다.
산에 들어야만 산에 드는 것이 아니리/
깃든다는 건,/
산에 들지 않아도 늘 산에 드는 것이리/
깃든다는 건,/
그렇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리/
깃든다, 깃든다, 되뇌면/
어머님 품같이 술술 잠이 올 것 같은 말/
산과 산이 서로에게 깃들어 참 아늑하다.
겨울 섬진강을 따라 그렇게 걸으면 지리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지리산에 '깃들어' 마음은 더욱 안온해질 것 같습니다.
그 마음 담은 이 편지를 종이배로 곱게 접어 섬진강에 띄웁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2011년 10월 31일(월) 시월의 마지막 밤에
섬진강의 은빛물결을 그리며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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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0 황전터널 - 진입
0455 미사치
0545 깃대봉
0620 월출봉
0702 형제봉 제봉
0718 형제봉 형봉
0830 도솔봉(아침식사 40분)
0910 도송봉 출발
1000 따리봉
1020 한재(휴식 10분)
1030 한재 출발
1140 백운산(정상 휴식 및 대기 40분)
1220 백운산 출발
1325 매봉
1445 외회고개
1500 외회마을 -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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