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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21] 아름다운 절집, 선암사(仙巖寺) 가는 길

月波 2011. 9. 26. 23:02

 

[호남정맥 21] 아름다운 절집, 선암사(仙巖寺) 가는 길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9월 25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노고치-닭봉-유치산-오성산-조계산(장군봉-큰굴목재)-선암사

   (3) 산행거리 : 14.8Km(도상거리), 큰굴목재-선암사 하산 2.5Km 별도

   (4) 산행시간 : 7시간 5분(정맥구간), 10시간(하산 1시간 55분, 선암사 탐방 60분 포함)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1명 합동산행

                        - 7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정산,은영,성호,제용

 

2. 산행후기

 

(1) 이것저것 뒤집힌 게 많아도

 

한 달만의 호남이다. 추분이 엊그제였으니 밤낮의 길이가 바뀌었다. 밝은 날의 새벽산행도 마감인 셈이다. 순천 승주읍과 월등면이 맞닿은 외진 고개, 노고치(350m)에서 새벽산행을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남진(南進)과 달리 오늘은 역순(逆順)이다. 조계산을 향해 호남 북진(北進)인 것이다. 이번에는 큰굴목재에서 선암사(仙巖寺)로 하산하며, 그 아름다운 절집의 고풍(古風)을 살필 것이다.
  
어둠이 짙어 숲은 적막하나 몰입의 공간을 제공한다. 무심(無心)으로 훈련봉(634m)을 오르고, 닭봉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이마의 땀을 훔치며 몰입을 해제한다. 아직도 사위는 깜깜하나 마음은 홀가분하다. 고도차 400 미터를 어둠 속에 오르며 심신(心身)의 무명(無明)을 밝힌 셈이다. 희아산(戱娥山, 764m)을 다녀올까 하는데 우군(友軍)이 없다. 혼자는 외롭다. 그냥 마루금을 따라 걷는다.  
  
잠시 걸었을까? 유치산(酉峙山) 표지석이 어둠 속에 외롭게 서있다. 벌써 유치산에 도착했나? 그런데 지형도의 그 위치가 아니다. 뱃바위 근처다. 엉뚱한 곳에 유치산 정상석을 세운 것일 게다. '그때 그 사람들'도 이렇게 헷갈렸을까? 제주 4.3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와 순천의 군인들이 좌익의 본색을 드러내 반란을 일으켰던, 그때 그 사람들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이래저래 거꾸로 뒤집힌 게 많다. 그 사이 밤낮의 길이도 바뀌고, 마루금을 걷는 방향도 지금까지와 달리 북진이고, 유치산 표지석도 엉뚱한 곳에 세워져 있고, 산 곳곳에는 반란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뒤를 돌아보니 닭봉에서 내려오는 일행의 불빛이 줄을 이었다.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묵상(默想)을 하며 혼자 길을 간다.

 

나무등걸 사이에 빛나는 아침햇살

 

한폭의 수묵화같은 안개 젖은 주암호

 

 

(2) 꾸밈없는 자연(自然) 속에서 
  
1948년의 일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제주에서 소위 4.3 폭동이 일어나자, 여수의 국군 14연대가 진압명령을 받고 출동한다. 그런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공서를 점령하고 인공기를 내걸었다. 그러나 국군의 공세에 밀린 반란군은 쫓기며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고, 공산당 전남도당도 '유치산(酉峙山)'으로 들어가 백운산, 지리산으로 옮기니 호남의 산은 빨치산 세상이었다.
  
그 후 60여년, 한 갑자(甲子)의 세월이 흐르자 그 사실은 '이념 갈등이 빚은 아픈 역사'라며 은근히 미화되어 간다. '이념'이라는 본질적 가치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정감적으로 재단되어 무시되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이란 무엇인가? 과연 '민족'이 '이념'을 우선하는 국체(國體)의 기준일까? 더구나 다문화사회로 가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잘 판단할 일이다. 

   
닭재(酉峙)로 내려섰다가 잠시 걸으니 지형도상의 유치산(530.2m)이 미명(微明)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표지석도 없고 숲에 가로막혀 조망도 시원찮다. 두모재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오성산을 향해 급경사를 오른다. 일출이 시작된다. 아침이슬 영롱한 두월리(斗月里)의 청아한 풍경에 눈망울이 절로 초롱초롱해진다. 꾸밈없이 맑은 저 모습이 곧 자연(自然)일 게다.

 

힘겹게 오성산(五聖山, 606.2m)을 오르니, 상사호와 주암호가 빚어내는 물안개가 환상적이다. 어둠 속에 세시간을 걸은 보람이 있다. 그 꾸밈없는 모습에 영혼을 맡기고 한동안 넋을 팔다가 구절초 곱게 핀 공터에서 아침밥상을 차린다. 후미의 일행들도 속속 도착한다. 풋고추 하나에 막걸리 한 사발이 빠질 수 있는가? 청양고추의 매운 맛에 눈물이 찔끔하지만, 진한 삶이란 본래 이 맛이 아니던가? 

 

물안개처럼 번지는 오성산 정상의 웃음

 

두월의 산하로 번져가는 상사호의 물안개

 

 

(3) 청량(淸凉)한 숲길을 걸어 
 

접치(250m)로 내려가는 숲길에서 느긋함의 미학을 향유한다. 사분사분 내리막을 걷는데 후미의 일행이 따라올 생각을 않는다. 그들은 아마 소나무 우거진 숲에서 윗도리를 벗고 산림욕을 하고 있을 게다. 산행 후반의 전진기지인 접치에서 운기조식(運氣調息)하며 조계산을 오르기 위한 마음을 가다듬는다. 비록 신작로처럼 반듯한 길이라 해도 600m의 고도차를 단숨에 오르는 일이 만만하겠는가!

 

조계산 장군봉(將軍峰, 884.3m) 정상에 선다. 하늘은 청명해 그 높이를 알 수 없고 산세는 우람해 송광과 선암이라는 큰 사찰을 품었다. 장군봉이라!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대체로 절의 수호신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이 있다. 그런데 선암사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사천왕문이  없다. 바로 여기 '장군봉'이 선암사를 호위하고 있으니 수호신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산죽(山竹)의 청량(淸凉)함이 코끝을 스치는 숲길을 걸어 큰굴목재(선암굴목재)에 도착한다. 오늘 마루금 산행의 끝이다. 주말마다 250개씩 '산상의 아이스 바'를 팔고 있는 총각같은 아저씨의 표정이 해맑다. 멜론 맛 향긋한 아이스 바 하나 입에 물고 후미를 기다리는데, 고통스런 표정의 연하봉 님이 도착한다. 벌에 쏘였단다. 드라이 아이스를 빌려 찜질을 시키고 서둘러 선암사 방향으로 하산한다.

 

그런데 얼마 못가 연하봉 님이 길가에 주저앉는다. 벌에 쏘인 봉독(蜂毒)이 온 몸에 퍼진 것이다. 얼음물 찜질도 소용없고, 비상사태다. SOS ! 다행히 뒤따라 오던 이튼 아우의 응급처치와 버스에서 긴급히 공수(?)한 상비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여러 사람이 마음 졸이며 애썼다. 서로 서로에게 감사! 편백나무 숲에 이르니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진다. 선암사가 지척인 것이다.

 

장군봉 정상에 핀 해맑은 웃음꽃

 

큰굴목재에서 선암사 가는 편안한 숲길

 

 

(4) 그 아름다운 절집으로 들다

 

삼인당(三印塘)을 지나 일주문(一柱門)으로 든다.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이라고 한 육당 최남선 선생의 말씀대로, ' 묵은 심신을 시원히 벗어 던지고 국토의 상적토(常寂土)에서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는 일에 선암사를 빼놓고 그냥 스쳐지날 수 있겠는가? 삼인당에 꽃무릇이 한창이다. 아니 선암사 경내 곳곳에 꽃무릇이 환상적으로 피었더라.

 

꽃무릇은 추석 전후에 잠시 피었다가 금새 사라지는 꽃이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이라, 꽃이 핀 후에 잎이 나오니 꽃과 잎은 서로 만나지 못하는, 그래서 애틋한 상사화(相思花)다. 너무 붉어 오히려 마음이 아려지는 꽃이다. 일주문에서 합장하고 범종루(梵鐘樓)와 만세루(萬世樓)를 지나 대웅전(大雄殿)에 들러 삼배한다. 문수와 보현 보살은 모시지 않고 석가모니불만 모셔져 있더라.

 

대웅전 기둥에 4개의 주련(柱聯)이 걸려있다. 이 네줄 외에는 선암사 어디서도 주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박에 깨달음을 구함에 있어 말과 글이 무슨 필요랴! 모두 허언이고 구속이리라. 지장전(地藏殿), 응향각(凝香閣)을 거쳐 심검당(心劍堂)으로 간다. 심검(心劍), 번뇌를 싹둑 자르는 마음의 칼이리라. 그렇게 도(道)를 이루고 중생을 구하려는 발원이 지극했으리라.

 

통상의 사찰배치와 달리 대웅전 뒤에도 수없는 전각들이 있다. 천천히 이곳저곳을 살핀다. 9월이니 꽃무릇 외에는 봄 여름의 무수한 꽃들을 볼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무량수각 가는 길에서 수양벚나무와 누운 소나무(臥松)를 만나고, 불조전 앞뜰의 매화와 왕벚나무를 보며 꽃들의 천국인 봄날을 그려본다. 그리고 무우전과 원통전에서 그 오래된 선암매(홍매와 백매)의 등걸을 살핀다.

 

삼인당(三印塘)과 제철 만난 꽃무릇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설선당의 낮은 돌담

 

누워서 자라는 와송(臥松)

 

가지가 주렁주렁 처진 무량수각의 수양벚나무(올벚나무) 

 

 

무우전(無憂殿)이라. 근심걱정을 털어버리는 곳인가, 근심걱정이 없는 이가 머무는 곳인가? 태고종 종정(宗正)께서 머무시니 그 속에 답이 있을 터이다. 근접할 수 없는 철불(鐵佛)은 너무 먼 당신이고, 돌담길의 홍매는 너무 일찍(?) 왔다며 내년 봄을 기약하라 하더라. 자그마한 승원(僧院)인 응진전(應眞殿)은 후원의 별채같다. 눌암 스님이 쓴 '호남제일선원'이라는 현판대로 선암사가 명실상부해질까?

 

원통전(圓通殿) 담장 밖을 걷는다. 주원융통(周圓融通)이라, 두루 원만하니 통하지 않는 게 무엇이리. 그러한 관세음보살을 모셨으니 관음전(觀音殿)의 위엄이 반듯하다. 더구나 스승 침굉(枕肱)스님에게서 선암사를 지키라는 뜻으로 '호암(護巖)'이라는 별호를 받은 약휴스님이, 현신한 관세음보살을 직접 형상화한 목조불상이니 사연도 깊다. 침굉(枕肱)이라! 팔을 베개 삼아 베고 자는 청빈한 모습이 그려진다.

 

주마간산으로 여기저기 살피다가 그 유명한 해우소, 'ㅅ간뒤'로 간다. 그 '뒷간'에서 '연화봉' 님이 볼 일을 보고 나와 손을 씻는다. 벌에 쏘인 후유증도 말끔히 씻겨졌으면 좋겠다. 눈물이 나면 여기 와서 실컷 울어보라던 시인이 있었지. 기차를 타든 걸어서든 상관이 없다고 했지.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눈물 닦아주고, 가슴 속의 종소리를 울려줄거라 했지. 그러면 와송(臥松)도 일어나 등을 두드려 줄까?

 

안쪽에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 海川寺)'라 쓰여진 일주문을 나선다. 고목 등걸에 동전을 끼우는 엄마와 아이의 행복한 미소를 본다. 저 웃음보다 값진 소원이 있으랴. 도(道)란 곧 저렇게 해맑은 웃음일 게다. 승선교 아래 개울에서 물에 비친 강선루를 본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개체(個體)보다 이처럼 자연스런 어우러짐에 있을 터. 상월(霜月)대사 부도비(浮屠碑)가 산문(山門)에 서서 그렇게 일깨우더라.

 

원통전 담장 밖의 아름다운 풍경들

 

눈물이 나거든 저기로 가서 실컷 울어라

 

저 해맑은 웃음을 보라.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

 

아름다움은 개체가 아니라 어우러짐에 있더라

 

 

(5) 정녕 아름다운 절집이란?

 

그런데 선암사를 나서며 가슴 한편에 스미는 이 허전함은 무엇인가? 살아 숨 쉬는 현재를 통해 옛일을 되새기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역사는 있으나 살아있는 현재가 없음은 단지 유물(遺物)에 불과하리라. 보조국사이후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송광사(松廣寺)의 역사는 효봉과 구산, 법정으로 이어지는 현대의 조계종 선승들이 그 자취를 이어갔으되, 대처승의 절인 태고종 선암사는 그렇지 못했다.
 

선암사 절집에 옛 향기 그윽하더라만 그것은 빛바랜 역사의 모습일 뿐, 성성(星星)했던 조계(曹溪)의 도(道)와 법(法)을 응접하기 어려우니 이 일은 어찌된 영문인가?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함은 단순히 그 빛깔을 논함이 아닐진대, 추상(秋霜)같은 절집의 법도(法道)가 살아있어 불법(佛法)이 성성(星星)해야 정녕 '아름다운' 절집이 아니겠는가? 선암사를 떠나며 단지 그것을 아쉬워하노라.

 

'아름다운 절집'이란 그 오래된 문화유산의 향기, 고건축의 미학적 가치, 철따라 자연과 잘 어울리는 풍경과 같은 외형적 아름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행하는 절집 본연의 맑은 기운이 도량(道場)에 넘치고,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의 지혜가 중생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진정 아름다운 절인 것이다. 답사지나 여행지로서가 아니라, 맑은 정신을 일깨우는 선가(禪家)의 서릿발같은 기풍이 그리운 것이다.

 

그 생각으로 김용택 시인의 '선암사'를 속으로 읊조리며, 사하촌(寺下村)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변할까봐 내 마음 선암사에 두고 왔지요/ 오래된 돌담에 기대선 매화나무 매화꽃이 피면 보라고/ 그게 내 마음이라고/ 붉은 그 꽃 그림자가 내 마음이라고/ 두고만 보라고/ 두고만 보라고"//

 

육조고사(六朝古寺), 저 편액처럼 6조(六祖) 혜능(慧能)의 선풍(禪風)이 성성(星星)해야 진정 아름다운 절이리라

 

저기 홀로 돌아선 상월대사(霜月大師)의 추상같았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 정녕 아름다운 절이리라

 

 

2011년 9월 26일(월) 늦은 밤에

아름다운 절집, 선암사를 생각하며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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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전(無憂殿) 각황전(覺皇殿) 응진전(彌陀殿) 달마전(達磨殿) 진영당(眞影堂) 미타전(彌陀殿) 삼성각 무량수각 창파당 적묵당 해천당 해우소(ㅅ간뒤) 원통전(圓通殿) 첨성각 장경각 팔상전(八相殿) 불조전(佛祖殿) 조사전(祖師殿) 대웅전(大雄殿) 지장전(地藏殿) 응향각(凝香閣) 심검당(心劍堂) 설선당(說禪堂) 삼층석탑(三層石塔) 만세루(萬世樓) 범종루(梵鐘樓) 일주문(一柱門) 하마비(下馬碑) 삼인당(三印塘) 강선루(降仙樓) 선원교(仙源橋) 승선교(昇仙橋) 부도전(浮屠田) 선암매(仙巖梅) 와송(臥松) 처진올벚나무 매화 수국(불두화) 왕벚 목련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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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노고치

0455  닭봉

0520  유치산

0620  두모재, 10분 휴식

0705  전망바위 

0720  오성산 도착, 아침 및 휴식 30분

0750  오성산 출발

0825  접치, 10분 휴식

0950  장박골 몬당

1010  장군봉, 20분 휴식

1105  선암굴목재, 20분 휴식

 

1145  환자 발생, 응급처치 및 구조 대기 30분

 

1250  선암사, 삼인당

1300  일주문, 범종루, 육조고사(만세루)

1310  석탑, 대웅전

1315  무량수각, 누운 소나무

1320  홍매화

1325  백매화

1335  뒷간

1340  일주문(청량산 해천사)

1345  강선루

1350  승선교

1355  부도전

1405  선암사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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