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24] 물이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르듯이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11월 13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외회재-갈미봉-쫓비산-토끼재-불암산-탄치재-국사봉-천왕산-망덕산-외망포구
(3) 산행거리 : 21.7Km (GPS 24.4Km)
(4) 산행시간 : 9시간 10분(외회재 진입 15분 별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8명 합동산행
- 10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정산,은영,지용,성호,제용,시탁,오언
2. 산행후기
(1) 호남 졸업, 망덕포구로 향하며
호남정맥 마지막 구간을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보름을 갓 지난 둥근달이 떴었지요. 맑은 바람이 코끝을 스치더군요. 明月如霜 好風如水(*)라, 밝은 달은 서리 같고 좋은 바람은 물 같다고 했던가요?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망덕포구에도 저 달이 뜨고 이 바람이 불겠지 하면서 호남행 버스를 탔습니다. 졸업 산행의 설렘으로 달과 바람이 더욱 곱게 느껴진 것이겠지요. (*) 소식(蘇軾)
학교공부를 벌써 끝낸 줄 알았는데 근래에 '졸업'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오르내립니다. 대간(大幹)을 걷고 정맥 길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생긴 일입니다. 산줄기 하나 걷는 일이 인생 공부 한 자락 살피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산행에서 졸업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집니다. 걸어야 할 산줄기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마음의 길을 닦는 일에 끝이 있겠습니까?
깜깜한 새벽에 백운산 아래 어치계곡에 도착해 산행준비를 시작합니다. 11월의 산은 제법 쌀쌀합니다. 근년에 들어 4계절이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11월이라 해도 한낮의 기온이 25도를 오르내렸습니다. 지난 주말에 비가 한차례 흩뿌리더니 그제서야 계절을 잊은 더위가 물러나는 듯합니다. 더 이상 변덕이 없으면 곧바로 겨울로 이어지겠지요. 겨울 오면 봄이 멀지 않을 거고요.
날이 갈수록 햇살은 가늘어질 테니 추운 계절을 견디려면 분주히 살아야겠지요. 이웃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길도 많이 아쉬운 계절입니다. 따뜻한 가슴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걸은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해졌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길, 새롭게 가야할 길 모두 아득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채근에 끝이 있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마에 불을 밝히고 산으로 듭니다.
(2) 강이 바다를 만나는 곳으로
어치계곡에서 어둠 속에 산행을 시작해 25km 가까운 길을 걸었습니다. 산과 고개를 넘고 넓은 도로를 건넜습니다. 그 이름은 이렇습니다. 외회재, 갈미봉(513m), 쫓비산(536.5m), 토끼재, 불암산(431m), 탄치재, 국사봉(445.2m), 상도재, 정박산(167.2m), 배암재, 잼비산(117.2m), 삼정치, 남해고속국도(4차선), 천왕산(225.6m), 국도(4차선 #2), 망덕산(197.2m), 부석정(浮石亭), 망덕포구.
그 높이 대단하지 아니하여 이름 붙이기가 쑥스러운 곳이지만, 사람 사는 낮은 곳으로 향하며 넓은 바다와 맞닿은 곳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8년 전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할 때 마루금은 높은 곳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지리산을 벗어나 남원 가재마을을 거쳐 수정봉을 오르고, 고남산 아래의 매요마을을 지나면서 마루금이 세상과 어울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었지요.
오늘 산행도 그랬습니다. 높지 않은 봉우리를 오르내리고 마을을 지나 낮은 곳으로 임했습니다. 걷다보니 민가의 대문을 통과하기도 했지요.(마루금을 살짝 벗어남) 높은 산만 산이 아니라 세상을 껴안은 낮은 산도 산이었습니다. 올망졸망 세상과 어울린 산이 더 가슴에 닿는 길이었지요. 밭고랑을 가로질러 밟고가는 산객에게 험한 말을 내뱉는 아낙네의 입담이 결코 욕으로 들리지 않는 길이었지요. 사람 사는 세상이었지요.
마지막 망덕산에서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낙동정맥을 마무리하며 부산 몰운대 바닷가에 섰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의 마지막 세리머니는 바닷물에 풍덩하고 몸을 담그는 일이었지요. 일심동체였던 배낭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며 소년처럼 파안대소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3) 버려야 얻는 이치를 헤아리며
드디어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바다를 만나 그 맥을 다하는 망덕포구에 내려섰습니다. 데미샘에서 시작한 섬진강 물줄기가 이 계곡 저 들판을 지나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산줄기를 따라 몸집을 불리며 흘러온 섬진강이 바다를 만나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이지요. 화엄경에 이르기를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은 물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버려야 얻는 법입니다.
(*) 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강의 끝과 바다의 시작은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마무리는 또 새로운 시작에 이어져 있습니다. 그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로 마루금에서 사뿐히 발을 내려놓았습니다. 대간과 낙동, 낙남에 이어 다시 산줄기 하나 내려놓는 것이지요. 산줄기에 매달렸던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지난 산행 말미의 생각대로 겨울이 오면 섬진강을 따라 잠시 지리산 자락을 살필까 합니다.
그 길에서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나겠지요. 물이 강을 버려 바다에 이르듯이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후미가 도착하자 버스는 졸업 파티가 예정된 하동 송림으로 향합니다. 아직 가지에 매달렸던 길가의 벚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가을의 끝이라 부르짖습니다. 봄날의 낙화(落花)도 저러했을 겁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가 환청처럼 귓전을 두드립니다. 낙엽이 있어 새잎이 돋는 것이니까요.
생각을 비우는 일/ 눈물까지 다 퍼내어 가벼워지는 일/ 바람의 손잡고 한 계절을/ 그대 심장처럼 붉은 그리움 환하게/ 꿈꾸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 가을 날 저물 무렵/ 단 한 번의 눈부신 이별을 위해/ 가슴에 날개를 다는 일/ 다시 시작이다// - 안경라, 낙엽
하동 송림에서 섬진강에 풍덩하는 세리머니를 했습니다. 단순한 재미입니다. 산줄기 하나 내려놓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이랄까요? 그 세상에서 새롭게 싹을 돋게 하고 꽃을 피우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최두석 시인의 노래처럼,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떻겠습니까?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 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4)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며
졸업 파티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호남에 첫발을 내딛던 기억을 잠시 더듬었지요.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렇게 조태일 시인의 국토서시(國土序詩)를 읊으며 호남의 산줄기를 걷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 길의 끝이랍니다.
"산에 갇히는 건 좋은 일이야 / 사랑하는 사람에게 빠져서 / 갇히는 건 더더욱 좋은 일이야// 평등의 넉넉한 들판이거나 / 고즈넉한 산비탈 저 위에서 / 나를 꼼꼼히 돌아보는 일// 좋은 일이야 / 갇혀서 외로운 것 좋은 일이야//" 라며 이성부 시인의 노래를 읊으며 야간산행을 하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습니다.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의 노래처럼 "가노라면 쉬기를 잊고 쉬다보면 가기를 잊고/....../ 내 뒤에 오는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갔는가/ 제각기 멈출 곳이 있는데 다시 무엇을 다투리오"하며 걸어온 산행이었습니다. 빨리 감을 부러워하지 않고 느리게 감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그저 함께 호남의 산줄기를 걸을 수 있음을 즐거워하며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돌아봅니다. "길을 돌아보듯 네 마음을 돌아보라"던 경봉(鏡峰) 선사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얼마나 많은 돌밭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시밭길이 있었음을/ 네 마음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가시에 찔려/ 덧난 상처가 많이 있었는가를" 살핍니다. 선사의 말씀대로 "다만 길의 끝에 머문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 하면서 세상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감사의 인사>
1년여동안 호남의 산길을 함께 한 산행 동지들이여! 이름 그대로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음으로 걸었던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오랫동안 멋진 추억으로 가슴에 자리할 것입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른 산행에서 반갑게 다시 만나는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번갈아가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탁월하게 산행을 이끌어주신 셈틀 산행대장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2011년 11월 14일(월) 늦은 밤에
호남의 산줄기에서 발을 내려놓으며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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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선물] 용담을 만나다
졸업 선물, 용담
이번 산행 말미에 보라색의 종받이 꽃 한 무리를 만났습니다.
'비로용담'이라 부르는 귀한 꽃이지요.
이 꽃과의 첫 인연은 이렇습니다.
2006년 6월 초 백두대간 남한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북녘 땅의 대간을 밟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그 해 8월에 백두산으로 날아갔었지요.
트레킹 2일차 이른 아침, 용문봉을 오르던 길에 이 녀석을 처음 만났습니다.
남도의 낮은 산에서 이 녀석을 다시 만나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강원도 이북의 북부지방에서 주로 자생하는 꽃이니까요.
천왕산 암봉을 지나 망덕산을 향해 완만한 능선을 홀로 걷고 있었지요.
문득 눈길이 갔습니다.
떨어진 솔잎 사이로 이 녀석들이 무리지어 부끄러운듯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호남정맥 종주를 축하하는 큰 선물이었지요.
그 선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의 꽃말이 더 마음에 듭니다.
"당신이 슬플 때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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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세리머니] 섬진강의 입수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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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김원중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볕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도 눈물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은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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