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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The Thirty Years' War

月波 2013. 7. 18. 02:27

 

[30년 전쟁 The Thirty Years' War]

 출처 : blog.naver.com/armi1312

 

(1) 보헤미아의 전운 :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 

 

     1618년 5월 23일 아침. 투른백작을 중심으로 한 보헤미아의 신교대표단은 수많은 군중을 거느리고 흐라드신의 왕궁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상징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상이 굽어보는 대문을 지나 안뜰로 몰려갔다. 그곳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티안이 프라하를 떠나면서 내세운 두 대리인(*)이 앞에는 군중, 뒤에는 돌밭인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있었다.    (*) 슬라바타와 마르티니츠

 

무수한 손들이 창문을 떼어내고 그 둘을 아래로 내던졌다. 그리고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우두머리격인 투른백작은 수많은 프라하의 귀족들과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비열한 황제의 두 대리인은 우리 방식대로 처리했다. 이제 이곳 보헤미아에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를 설립하자!".

이날 일어난 사건을 역사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이라고 기록하고있다.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두 대리인이 군중들의 손에의해 끌려가고 있고 심지어 하인들까지도 창문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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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왕위는 본래 선출직이었으나 1618년 이전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국의 수도로 삼을만큼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보헤미아 시민들은 루터파와 칼뱅파, 가톨릭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고 경쟁하였다. 이 와중에 보헤미아는 서서히 쇠퇴해갔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여 왕권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보헤미아인들은 그들 모두에게 위협이 있을 때마다 뜻을 같이했다. 1609년 루돌프 황제가 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취소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헤미아의 상당한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위협을 느낀 황제는 "황제의 칙서"를 발표하여 신교도의 권리를 인정하고 위기를 넘겼다. 루돌프 황제는 이후 프라하를 제국의 수도로 삼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다가 결국 루터파 보헤미아 귀족들의 강요로 퇴위한다.

 

루돌프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의 왕이 된 제국의 황제 마티아스는 오래지 않아 "황제의 칙서"의 정신을 침해하였다. 또한 그는 제국의 수도를 빈(비엔나)으로 옮기면서 많은 보헤미아 인들에게 "보헤미아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다" 라는 실망감을 주게 된다.

 

마티아스 황제는 후계자가 없었다. 후계자 없이 황제가 죽게되면 보헤미아는 명실공히 페르디난트 대공(*)이 차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늙은 황제 마티아스는 그가 신교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지역(보헤미아)의 왕이 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망설였다.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그는 왕위에 내세울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여겼다.   (*) 후일에 페르디난트 2세가 됨, 신교도 세력을 철저히 배척함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페르디난트가 후계자가 되지 않을 경우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일원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가문에서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에서 후계자로 삼기보다 최소한 독일어라도 할 줄 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대공을 후계자로 낫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밀약(**)이 체결된다.

 
 (**) 오스트리아-스페인 밀약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미래의 황제로 인정받는 대신, 알자스 봉토에 대한 권리를 스페인에 양도하고 스페인 군대가 독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준다.
 

 

페르디난트 대공, 후일의 페르디난트 2세

그는 철저한 가톨릭 세력으로서 30년 전쟁기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이끌었다

 

 
페르디난트가 후계자로 발탁되자 신교도와 반 합스부르크 국가들은 대공이 신교 지역의 왕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빌미로 여러 경쟁 후보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도 후보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도 특출한 것이 없었으므로 보헤미아의 왕위는 신교도들이 선거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한 대공에게 돌아갈 것이 뻔하였다.

 

이 중요한 때에 보헤미아 신교세력의 주도권이 슐리크 백작에게 있었다. 그가 황제선출 표결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을 지지함으로써 신교도들은 당황했으나 결국 그의 결정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루돌프 황제가 공표한 "황제의 칙서"를 보장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그는 투른백작(나중에 신교세력의 지도자가 됨)과 같은 극단주의 신교도의 성향을 알고 있어 당장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이 세력이 정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면 그것을 구실로 신교도의 특권을 철폐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페르디난트는 "황제의 칙서"를 정식으로 보장했다.

 

마티아스 황제는 수도를 빈으로 옮기면서 프라하에 다섯명의 총독 대리인을 임명했는데, 가톨릭인 슬라바타와 마르티니츠는 포함되었으나 신교도인 투른과 슐리크는 배제되었다. 신교도의 불만이 쌓여가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신교도들은 "황제의 칙서"에 권리가 명시 되어있으므로 왕의 땅에 교회를 지을수 있었으나, 황제와 왕은 그 왕의 땅을 양도하는 것까지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맞섰다.

 

즉, 왕이 신교도의 교회가 있는 왕의 땅을 가톨릭 교회에 기증할 경우 신교도들의 권리는 무효가 된다는 말이였다. 당연히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고, 황제는 황급히 보헤미아 프라하를 떠났다. 황제는 보헤미아 프라하를 떠나면서 두 대리인(슬라바타와 마르티니츠)에게 보헤미아인들의 반발이 계속되면 무력으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황제의 두 대리인이 신교도에 대한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루터파와 칼뱅파로 분열되었던 보헤미아인들은 똘똘 뭉쳐 그들의 대표로 투른 백작을 내세우고 대항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군대는 신교도들의 집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위기를 느낀 슬라바타와 마르티티츠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미 늦었다.

 

이튿날 투른 백작은 활동적인 신교도 귀족들과 수많은 군중들을 이끌고 프라하의 흐라드신 왕궁으로 향하였다. 탈출하지 못한 황제의 두 대리인은 그들의 손에 의해 창문 밑으로 내던져졌다.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신교도 집정관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세우고, 신속히 자신들은 "신교도들의 대의를 위해 일어났음"을 전 유럽에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투른백작을 사령관으으로 한 보헤미아군 1만 6천명을 모집하였다.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가와의 전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고, 아무도 보헤미아에서 생긴 작은 불씨30년 동안 유럽을 휩쓸게 되는 커다란 대재앙이 될지 예상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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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The Thirty Years' War]

 
(2) 보헤미아의 전운 : 팔츠 선제후

 


"마리아여! 부디 저희들을 굽어 살펴 주소서!"


1618년 5월 23일 투른 백작을 우두머리로 신교도들은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흐라드신의 왕궁에 고립되어 수많은 군중들에의해 창밖으로 떨어지던 슬라바타와 마르티니츠가 "마리아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올렸지만 신교도들은 그들의 기도를 비웃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의 17m 높이에서 떨어진 두 대리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였다.

 

그들은 운좋겠도 말똥 더미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떨어진 두 대리인은 가톨릭 지지자들의 손에 의해 구출되어 간신히 프라하를 탈출할 수 있었다. 후에 가톨릭 교도들에 의해 이 기적적인 생환은 정말로 하나의 '기적'으로 선전되었고, 이 두 대리인은 충성을 다해 ‘던져진’ 공로를 치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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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반란은 속도, 효율성, 적절성 측면에서 귀감이 될만했다. 하지만 보헤미아에 세워진 신정부는 반란 초기부터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칼뱅파, 루터파, 가톨릭을 억지로 결합시킨 이 통일전선은 반란이 성공하자 곧바로 사분오열했다.

 

신정부는 본래 반란에 가담한 모든 세력에게 동등한 권력을 주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가톨릭세력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현실적이지 못한 계획이 되었다. 반란을 주도한 투른은 이러한 균열을 막고자 직접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의회에서 표결권을 가지고 있는 "기사" 신분 이였을뿐 집정관은 아니였다.

 

본래 백작에게도 집정관 제의가 들어왔었지만 투른은 보헤미아의 안위가 무력에 의해 유지되는 동안에는 집정관은 군대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집정관들은 의회에서나, 군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그의 결정으로 인해 그의 보헤미아 군대는 전쟁기간 동안 자금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가톨릭과 신교도의 내부 휴전은 일시에 깨졌다. 가톨릭 교도들이 보헤미아에서 추방되고 투른은 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온건한 클레슬 추기경에 의해 황제는 평화로운 논의를 제의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정부는 이를 즉각 거절 함으로써 유럽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보헤미아 반군들에게 순수한 종교적 대의가 아닌 정치적 동기가 숨어있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보헤미아의 선출된 왕으로써 가장 잃을 것이 많았던 페르디난트 대공은 초조했다. 보헤미아 이단들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군사행동이 필요하였는데 클레슬 추기경은 끝까지 반군과의 협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대공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데에 걸림돌인 추기경을 체포하여 티롤의 요새에 감금하였다. 황제는 클레슬을 감금한 것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항의했으나 대공의 강경한 태도를 꺾을 수는 없었다. 대공은 군사행동을 시작하였다.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플랑드르에서 모집한 제국군이 보헤미아의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투른 백작은 이미 조치를 취해 놓았었다.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백작의 지원을 거절했으나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와 그의 수하인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이었다.

 

황제와 대공은 선제후에게 화를 내며 항의했으나 프리드리히는 반란군을 설득해 타협에 나선것이라고 변명을 하였다. 선제후의 대사는 이 변명을 교묘히 이용해 보헤미아 정부에 더욱 다가갔다. 선제후측 일파는 보헤미아의 정부에게 병력증강을 촉구하고 안할트 공이 군대를 지휘하도록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그저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랐다. 선제후는 곧바로 합스부르크가에게 적대적인 사보이 공작에게 특사를 파견해 대규모의 용병군대를 빌렸다. 두 군주(선제후와 사보이 공작)가 후원하는 정예용병대는 당시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지휘관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보헤미아측 지원자로 나섰던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재위 1580-1630) (좌)

그의 용병 대장 만스펠트 백작 (1580-1626) (우))

 

 

만스펠트의 군대가 보헤미아로 향하자 빈 정부도 더 이상 뜸들일 여유가 없었기에 제 2차 제국군을 파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파견되었던 제 1차 제국군은 투른의 보헤미아 군대에게 고전하고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만스펠트의 정예병이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제국군대는 일시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의 부유한 도시인 플제니가 만스펠트에게 함락되고, 투른과 슐리크 백작이 지휘하는 보헤미아 군은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를 유린했다.

 

 

 

1618년 초겨울, 플제니가 함락되는 모습이다.

플제니는 중세적 형태의 성벽을 지니고 있었으며, 근세적 요새로 발전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플제니는 만스펠트의 재빠른 공격과 성벽 파괴에 견디지 못했으며, 만스펠트는 이 점령을 계기로 신교도들에게 명성을 떨치게 된다.

 

 
오스트리아 국경지대가 유린되는 동안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신교연합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신교연합의 제후들이 자신과 뜻을 같이 할것" 이라는 선제후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선제후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보헤미아의 반란군과는 어떠한 협정도 맺으려 하지 않았고, 신교 공동의 군대를 육성하자는 선제후의 제안도 거부함으로써 중립노선을 취하고자 하였다.

 


(*)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은 뛰어난 지력의 소유자로, 30년 전쟁을 일으킨 한 축이 된 신교도 동맹은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봉신이었지만 무능했던 선제후는 안할트 공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신교연합의 행동에 누구보다 크게 놀란 사람은 연합의 의장인 프리드리히였다. 선제후는 그 당시 회의에 모인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자신의 수하인 안할트 공의 책략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안할트 공은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해줄 세력을 육성한다" 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그는 페르디난트 대공이 왕위에 선출되기전에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에 후에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회로 삼은 것이었다. 그의 야심은 노골적으로 드러났기에 신교연합의 군주들은 곧바로 그의 책략을 간파하고 거부하였다.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과는 다르게 선제후는 처음부터 보헤미아의 평화를 원했다. 보헤미아의 반란은 그가 구상해왔던 정책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그의 제안은 신교연합 공동의 군대를 육성하여 황제에게 항의 하자는 것이였다. 그의 의도는 이런 식으로 독일 신교도들이 단결했다는 것,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할 태세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려는데 있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면 무력을 사용할 필요성도 없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러면 보헤미아 뿐만아니라 제국내의 모든 신교도들의 권리가 보장되고, 향후 있을지도 모르는 강압적인 조치를 예방할수도 있을 터였다. 크리스티안은 또다른 신교 선제후인 요한 게오르크와 게오르크 빌헬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그 계획이 비현실적인 구상이라고 설득했으나 프리드리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안할트 공은 선제후의 계획을 표면에 내세우고 후방에서 자신의 계획을 차차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선제후는 자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사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교연합 회의 이후에 그도 동료 군주들이 품은 의심의 배후에 무엇인가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안할트는 자신의 계획을 선제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일 이후로 그에 대한 선제후의 신뢰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였다. 그는 선제후가 오래전부터 수족처럼 부려왔던 수하였고 생각을 같이해왔던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보헤미아의 신정부는 계속되는 선제후의 대사들의 접근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투른 백작은 만약 비어있는 보헴아의 왕위를 팔츠 선제후에게 제의한다면 그가 받아들일지도 은근히 떠보기 까지 하였다.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은 또다시 선제후 몰래 자신의 계획을 순차적으로 시행해갔다. 우선 보헤미아를 지원하는 군대를 이끌고 있던 만스펠트의 군대 급료문제를 해결하고, 사보이 공작과의 8주가 넘는 외교전 끝에 만족스러운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안할트는 신교연합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 존재인지를 인식하지 못했고 영국왕 제임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안할트가 자신이 주군인 선제후 몰래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페르디난트 대공은 합스부르크가 내에서 미약하기만 한 자신의 대한 지지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에스파냐와 제국내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보헤미아 반란 초기일때만 하여도 대공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팔츠 선제후와 사보이 공작이 판스펠트를 앞세우고 개입하자 그들의 지원은 주춤거리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슐레지엔이 합스부르크에게서 등을 돌리고 반란세력에 가담하였으며 가문이 통치하는 지역의 충성심은 날이 갈수록 약해져갔다.

 

브뤼셀에서는 대대공의 친척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 까지 페르디난트를 지원하느니 차라리 그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안겠느냐" 라는 의견까지 제시하는 사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대공은 가문내에서 아무런 지지도 못핸체 전쟁에 임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선제후와 대공 일파가 서로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내에서의 전쟁을 막고자 하는 세력도 있었다. 후에 독일 세력의 통합을 위하여 독일 민족세력을 이끈 두 인물, 바이에른막시밀리안작센요한 게오르크는 황제가 죽기전에 보헤미아의 반란 사태를 해결하고자 밤낮으로 분주했다.

 

사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 황제를 선출해야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보헤미아의 황제 선출표를 획득하려는 팔츠 선제후 일파와 합스부르크의 충돌이 불가피해지므로 앞날을 가늠할수 없을 터였다. 작센 선제후의 간절한 설득과 청으로 인해 보헤미아 정부는 1619년 4월 에게르에서 열리는 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평화를 바라는 이 모든 노력들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독일을 평화로 이끌 수 있었던 마지막 길이 끊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1619년 3월 20일 오전 9시, 마티아스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 

 

 

(*) 30년 전쟁사

      http://blog.naver.com/armi1312 

 

(*) 선제후란?  (영)Eloctor, (독)Kurfürst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대해 서술할때 "선제후"를 언급한 바 있을 것이다. 선제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독일어로 쿠르퓨르스트 (Kurfürst)라고 불리는 제후들이다. 어원을 따지자면, 쿠르 (Kur)는 ‘고르다, 뽑다’라는 뜻이 되겠고, 퓨르스트(Fürst) 는 ‘공(公), 제후(諸侯) (prince)’ 라는 뜻이 되니 말 그대로 선거권이 있는 지방의 유력 제후들을 말하는 것이다.

 

선거권의 대상은 다름아닌 신임황제이며 혹시 생길 선거권 독점과 동점투표를대비하여 7명의 유력한 제후들에게 한표씩만을 배분하였다. 본래 게르만족의 리더는 각 부족의 선거로써 선출되는데, 프랑스에서는 이 전통이 사라졌지만, 현 독일지역의 신성로마제국에서 만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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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rty Years' War"

 

[부록] : 당시 유럽의 군사체계와 독일의 7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페르디난트의 전면전이 일어나기전에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는 독일의 군주들이 어째서 보헤미아의 왕위에 그렇게 까지 집착하는지에 대해서이고, 둘째는 그 당시 유럽의 군사체계이다.

 

 

7 선제후

기본적으로 보헤미아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경제적으로도, 행정상으로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토적 야심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보헤미아 왕위에 포함되있던 "선제후" 의 직함이다. 선제후는 새 황제 선출에 대한 표결권을 가지고 있는 일곱 제후들을 말한다. 팔츠, 작센, 브란덴부르크의 군주와 쾰른,마인츠,트리어의 세 주교, 그리고 보헤미아의 왕이 7선제후에 속해 있었다.

 


30년 전쟁 초기의 선제후령

 

마인츠 선제후령 (흑회색), 쾰른 선제후령 (좌측 상단의 회청색), 트리어 선제후령 (하늘색),

보헤미아 왕국 (노란색),

작센 선제후령 (붉은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 (남색), 팔츠 선제후령 (녹색)

 

 

선제후들의 우두머리격인 마인츠 선제후는 쾰른선제후, 트리어선제후와 함께 가톨릭 교회의 이익을 대변했다. 나머지 네 선제후는 세속군주로서 그 들중의 서열 1순위의 군주는 팔츠선제후였다. 하지만 선제후 제도가 있었다 하더라고 제위는 오래전부터 합스부르크가의 차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는 항상 황제 선출에 유리한 입장이었으나 한번 제위에 오르게 되면 선제후단의 통제를 벗어날수 없었다. 선제후단은 여러의미에서 제국의 진정한 통치자였다. 그들이 아니면 새 황제는 선출될수도 없었고, 그들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제국의외회도 소집할수 없었다.

 

선제후는 앞서말했듯이 총 일곱명이었으나 선제후 회의에 소집될 수 있었던 선제후는 총 여섯명이엇다. 이유인 즉 슨, 보헤미아의 왕은 (독일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의 독립군주였기 때문에 황제 선출에 필요한 표결권은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 내부의 일에는 간섭하지 못하였다.

 

당시 제국의 선제후들은 보헤미아의 왕을 제외한다면 종교적으로 균형상태를 유지하였다. 작센, 팔츠, 브란덴부르크의 군주가 신교인 반면 주교선제후령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는 가톨릭이었다. 2화에서 다루고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팔츠의 선제후로써 황제 선출에 대한 하나의 표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보헤미아까지 차지해 2개의 표결권을 가지게 된다면 제위를 유지하려는 합스부르크가와의 정면 충돌은 불가피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두 군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과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두 세력의 정면충돌을 막고자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을 막으려던 두 군주는 각자 자신들이 이끌던 세력을 통합시키려 하지 않았고 시간을 지채했다. 황제는 이미 운명했고, 새황제를 뽑아야 하는 일이 남은 가운데 보헤미아의 표결권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제위를 차지하려던 페르디난트와 합스부르크의 제위 독점을 막고자하는 프리드리히의 충돌은 불가피해진 것이다.

 

 
30년 전쟁기의 군사 체계

많은 사람들은 30년 전쟁 당시의 군대들은 각국 군주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상비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비군을 가지고 있던 유럽 국가들은 소수에 불가했고, 상비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비군의 수는 전투에 보내기도 어려울만큼 적었다. 당시 유럽의 군대들은 대부분이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 들이었다. 이런 용병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한명의 지휘관에게 의지하며 군주들과 계약을 맺고 복무했는데, 계약에 없는 내용은 이행하지 않아도 됬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용병대와 지휘관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채 자유롭게 다른 군주들과 계약할수 있었다.

 

용병대를 구성하고 있는 군인들은 머스킷과 대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훈련받은 직업 군인"들이었다. 근거리 전투에서 원거리 전투로, 그것도 화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에서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란 쓸모가 없었다. 창병들은 주로 근거리 전투에서 총병들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총의 성능이 개량을 통하려 점차 좋아지자 창병들의 비율은 계속 줄어들었다. 30년 전쟁기의 총병과 창병의 비율은 엇비슷하였다. 기병은 전체군대의 3분의 1 을차지하였고, 전장에서는 이들 능숙한 기병대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30년 전쟁기를 통틀어 17세기에서 유럽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테르시오" 진형이다.

스페인의 천재 전략가 "코르도바"가 고안해낸 이 진형은 당시 유럽사회에서 "무적의 진형" 이라고 불려졌다.

 

 

용병 지휘관들은 민족이나 종교를 상관하지 않고 가난한 농민들이나 인구 과밀지역의 잉여 인력들을 병력으로 충원하였다. 모집된 군사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에게 충성한 것이 아닌 ,자신이 속해있던 군기에 대해서 충성을 맹세하였다. 하지만 이런 충성심도 신뢰할수 있는 것만은 아니였다.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대개 적군의 병력으로 충원되었고 군사들의 탈영은 늘 상 있는일이였다. 탈영병들은 당연 처형 대상이었지만, 이듬해 봄이 되면 전리품을 얻기 위하여 대부분이 복귀했으므로, 지휘관들은 굳이 탈영병들의 죄를 물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지않았다.

 

30년 전쟁은 용병군인들에게는 최적의 시기였다. 그 당시 군대에서는 점령지역 약탈이 인정되었으므로 군대가 진군하는 경로의 거의 모든 도시가 초토화 되었다. 초토화 된 지역의 사람들은 생계유지수단을 잃었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이 군대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독일지역에서 맘껏 군대를 충원할수 있었고, 전투에서 승리할때마다 그들이 독일에서 미치는 영향력 또한 커져갔다.

 

프리드리히가 고용한 지휘관인 만스펠트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자신만의 용병단을 이끌고 다니던 용병지휘관세력들이 각 국의 군주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주무르게 되는 지는 독자들은 앞으로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차례 보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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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의 30년전쟁 The War of Thirty Years  三十年戰爭

 

기독교세계의 최대이자 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30년 전쟁(1618 ~48)은 4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구교 측 입장에서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 1기, 즉 전쟁의 발단은 독일의 남부 뵈멘(보헤미아)에서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1618) 황제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반란의 주동자들은 철저히 보복을 당했다(1620)

 

제 2기는 이에 불안을 느낀 루터파의 신교국가인 덴마크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 받고 독일에 출정했으나(1625) 독일 황제군의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에게 밀려 뤼벡 조약을 맺고 소득없이 전쟁에서 손을 뗐다(1629)

 

제 3기는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던 스웨덴의 국왕이 신교국가의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독일에 침입(1630), 일진 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스웨덴 국왕이 전사하고, 신교연합이 무너지면서 구교의 승리로 끝났다(1635)

 

제 4기는 구교국가이면서도 이해관계때문에 배후에서 독일의 신교를 원조하고 있었던 프랑스스웨덴과 연합, 독일을 침입하자(1635) 독일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전쟁을 수행, 일진 일퇴를 반복하다가, 결국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네덜란드 등과 독일 내의 제후들이 참가하여 지루한 협상 끝에 휴전에 조인, 베스팔렌 조약(1648)으로 독일이 불리한 가운데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독일,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으며, 황제 권은 더욱 약하여 이 후 독일의 분열은 더욱 촉진되었다. 반면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았고, 칼뱅 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를 확장하였다.

 

- 이런 내용을 좀더 상세하게 엮은 것이 아래 글이라 생각하고, 시간이 나시면 천천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전쟁의 원인

 

30년 전쟁은 독일에서 신·구교간 종교적 갈등이 표출되어 내전(內戰)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 각국이 종교를 빙자하여 개입,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지고 복잡한 국제전의 양상을 띄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시의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덩치만 컸을 뿐 내용상으로는 300 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군웅할거의 무대가 되었으며, 황제를 계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는 제국의 안위 보다는 자신들의 영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고, 다른 제후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루터가 던진 파문은,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로 독일 및 유럽 전체를 몰고 갔고, 급기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겨우 봉합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당시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서 독일 안에서 신·구교도 간 화해가 일단 성립되었으나, 신교측에서는 루터파만 참석했을 뿐 칼뱅파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배자의 종교는 그 지배자의 영지(領地)에서 신봉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 선택은 오직 영주나 도시당국자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일반인들은 지배자가 선택한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신교로 개종하면 성직은 박탈되고, 영지는 카톨릭 교회에 보류(保留)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것 또한 분쟁의 소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은 성립되었지만, 百家爭鳴의 난세에서 이것이 그대로 지켜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체제가 50 여 년 간 겨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간의 눈치를 살피고, 자가세력의 부식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측에서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종교재판과 금서목록의 작성을, 교황청의 직권으로 광범하게 실시하고, 로욜라의 예수회 같은 것을 앞세워 실지 回復을 위한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늦게 출발한 칼뱅파 역시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자신은 구교로 개종하였으면서도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에 대해서는 신교측을 원조하였으며, 루터파를 신봉하고 있었던 덴마크와 스웨덴 역시 독일의 국내사정에 무관할 수는 없었다.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는 그의 늙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원조를 얻어 구교 측의 세력을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제후나 성직자들의 개종, 결혼, 상속 등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협정을 적용해서 구교측의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런 황제와 구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측에서는 1609년 신교 연합(union)을 결성했고, 이에 맞서 구교측에서는 동맹(league)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톨릭, 루터파, 칼뱅파로 3분되었던 독일은, 다시 신·구간의 연합과 동맹이라는 2대 세력으로 정리되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할 만큼 사정은 복잡했다.

 

제후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나 타산적이었고, 루터파와 칼뱅파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으며, 신 구교측 모두가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충돌의 소지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타협으로 겨우 무마되다가 급기야 뵈멘(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2) 전쟁의 경과

 

보헤미아(라. 영 : Bohemia / 독: 뵈멘Bohmen / 현 체코)는 슬라브계 주민이 중심 세력권을 이루고 독립되어 있었으나, 독일의 식민정책에 따라 1198년 독일의 연방이 되었고, 1306년에 프르셰미슬가의 대가 끊어지면서, 독일계 룩셈부르크가(家)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의 종교분쟁인 후스 전쟁(1419 ~ 1436)은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는 체코의 국민주의운동이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신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독일황제 루돌프 2세1609년 이곳 루터파의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구교도와 같은 권리를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1617년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완고한 카톨릭주의자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사정은 급변, 루돌프 2세가 제후(諸侯)·기사(騎士)·도시 등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서(1609)를 파기하고 신교도를 탄압하고 구교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되자 프라하의 신교파 귀족 대표가 시민 1천명을 무장시켜 1618년 5월 23일 아침 왕성으로 몰려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귀족 대표는 2명의 국왕 고문과 서기 1명을 상대로 부당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였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난 대표들은 이들 세 사람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이들은 중상을 입었으나, 시민 군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을 피해서 달아났다.

 

서전(緖戰)을 화려하게 장식한 뵈멘의 신교도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국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까지 진격하여 기세를 올렸다. 한편 1619년 황제가 죽고 그 뒤를 프리드리히 2세가 잇게 되자, 뵈멘의 의회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5세에게는 칼뱅파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에 독일 신교측에서는 루터파가 이탈하였고, 그의 의부(義父)에 해당하는 영국왕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오히려 스페인과 같은 황실인 독일 황제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태도를 바꾸어 독일의 신교도 반란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변하자,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5만의 황제군은 1620년 11월, 뵈멘에 침입, 프라하 근방에서 프리드리히 5세의 3만 군대를 격파하고, 프라하를 점령하였으며 프리드리히 5세는 외국으로 망명하여 전쟁은 구교측의 승리로 첫 막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더욱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신교도를 탄압하여, 반란의 지도자들은 잡히는 데로 처형되었으며, 처형된 자와 망명자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하였고, 처형을 면한 자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뵈멘 영토의 3/4이 주인이 바뀌었고, 프라하 대학은 예수회교단으로 이관되었다. 또 하나 신교의 거점이자, 뵈멘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 팔츠에 침입해서 여기에도 구교를 강요하게 되었고, 신교 연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서막은 구교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외국 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독일은 카톨릭의 땅으로 완전히 되돌아 갔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도 이루어져 다음 단계인 절대왕정에 합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의 신교 연합이 완전한  패배에 이르자 이번에는 신교측의 여러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내전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찰스 왕자의 결혼을 주선했다가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절 당한 국왕 제임스 1세가 평소에도 감정이 좋지 못했던 합스부르크가(家)에 반감을 가지고 신교파 국가들의 동맹을 계획하고 군사비의 제공을 약속하고 전쟁을 부추겼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30년 전쟁의 제 2 라운드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덴마크왕국,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1588∼1648)는, 그가 독일의 홀시타인의 영주라는 구실을 붙여서,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그리스도교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황제군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 Wenzel von Wallenstein / 1583. 9 ~1634. 2)과 틸리에게 패배하고, 양측은 뤼벡 조약으로 화해하였는데(1629), 덴마크왕은 홀시타인을 계속 영유하되 독일의 내전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이렇게 덴마크와 화약(和約)을 맺자 오래간만에 황제의 위광(威光)이 살아났다. 이 기회를 놓지지 않기 위해 다른 제후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復舊令을 발표하였다. 이 복구령은 "구교파의 제후들은 각자의 영내에서 신교도를 추방해도 좋다. 또 신교도의 손에 들어가 있던 교회령은 구교측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로서, 아우크스부르크화약 이전의 상태도 환원함을 의미한다.

 

복구령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각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루터파의 제후들은 큰 타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하였고, 칼뱅파가 탄압 당하는 것도 못마땅 하게 생각 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의 복구령이 단순한 카톨릭에 의한 제국의 재건(再建)이 아니고, 황제를 정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거(割據)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지키려는 구교파 제후들까지 황제의 계획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때 페르디난트 2세의 뜻대로 통일이 이루어 졌다면 독일은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절대왕정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뵈멘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까스로 잡을 번 했던 통일의 기회는 이번에도 제후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후들은 황제의 이런 생각 배후에는 발렌슈타인과 그의 군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면직(免職)을 요구했다. 이런 제후들의 요구를 황제가 순순히 받아들여 그는 면직되어 프라하로 돌아갔다.

 

이렇게 황제군을 승리로 이끈 발렌슈타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뵈멘의 신교파 하급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일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그의 재산과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고국 뵈멘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몰수된 토지 등을 구입하여 다시 큰 돈을 모았으며, 덴마크왕의 침입이 있자, 용병을 구할 자금이 없는 황실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황제에게 "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면 제 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치루곘습니다"라고 제안하자,...

 

다급한 상황에서 다른 여지가 없었던 황제는 이를 수락하였고, 발렌슈타인은 자기가 거느린 용병으로 전쟁을 치루면서 약탈로 더욱 재산을 모으고 군대도 10만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런 약탈 과정에서 많은 제후들로부터 반감을 샀던 것은 당연하다.

 

30년 전쟁의 제 3 라운드는 뤼벡 화의가 성립된 이듬해인 1630년 6월,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II / 1611∼32)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북방의 사자왕(Lion of the north)이라고도 불린 그가 인구 150만의 광막한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의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군비의 증강, 네덜란드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무기를 개량하고 자신이 솔선해서 새로운 무기의 사용법을 익혔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등으로 둘러 싸인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런 그의 계획에 독일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 북상을 묵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덴마크가 패배한 직후 그는 직접 정예(精銳)를 이끌고 발트해 남안(南岸)에 위치한 포메른(Pommern)에 상륙,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30년 전쟁에 뛰어 들었다.

 

병사들은 성서를 휴대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두 번씩 예배를 드렸으며, 약탈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그의 군대는 연전 연승, 갈수록 군대의 숫자도 불어났다. 틸리의 구교동맹군이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고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고 시민 3만명이 학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의 신교파 제후들은 앞을 다투어 스웨덴 군에 가담했다.

 

1631년 여름 구스타브 아돌프의 정예군과 북부독일의 신교파 연합군은 라이프찌히 근처까지 남하해서 틸리의 황제군과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병대를 적절히 이용한 구스타브 군대는 승리를 이끌어 북부독일을 해방 시켰고, 그의 군대는 더 남쪽으로 내려와 독일 황제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심장부를 압박했고, 황제군의 장군 틸리를 전사케 했다.

 

다급해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2년 전에 그로부터 면직되어 프라하에서 제왕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로 은거 중인 발렌슈타인에게 사자를 세 번씩이나 보내어 그를 다시 총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전쟁의 균형은 구교측에 기울고, 구스타브의 군대는 지쳐 있었으며, 북부독일의 신교 연합군은 방자하였다. 양측이 뉘른베르크에서 맞 부딪히자, 구스타브는 발렌슈타인에게 화의를 요청, 그러나 이를 거절한 발렌슈타인은 신교파의 거점인 작센을 향해 진군했다.

 

이곳의 신교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뒤 따라간 구스타브 군대는 1632년 11월 16일, 라이프찌히의 남서 쪽 뤼첸에서 격돌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시작된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는 왼쪽 팔과 등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국왕의 전사 소식은 스웨덴군을 분발시켜 해가 질 무렵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은 라이프찌히로 퇴각하였고, 황제군 전사자 6천, 스웨덴군 4천, 총 1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전투는 끝났다. 스웨덴군이 구스타브의 시체를 찾아 냈을 때는 병사들의 발에 짓밟혀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라이프찌히로 퇴각했던 발렌슈타인은 그 길로 프라하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제가 불렀으나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에 그가 황제자리를 찬탈하고자 하는 의혹이 있다고 의심한 황제는 다시 그를 파면시켰고, 결국 그는 프라하에서 암살되었다(1634) 이후 황제군의 주력은 스페인군으로 대체되었고 황제군과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을 공격했다.

 

1634년 9월, 스웨덴군의 최후의 거점인 늬르틀링겐(Nordlingen)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신교파가 이탈하기 시작하자, 작센 선제후는 황제측의 요구대로 1635년 프라하에서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군의 지원으로 스웨덴군을 격파한 황제는 국내의 제후와 도시들에 대한 지배형식을 옛날 그것으로 환원시켜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이 프라하 조약에서는 신·구 양파 모두가 반발했다.

 

30년 전쟁의 제 4 라운드프랑스의 개입으로 막을 열었다. 프라하의 화의 직후인 1635년,  이번에는 막후에서 신교파를 지원했던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서 독일에 출병하고 스페인에도  선전을 포고, 스웨덴과 연합전선을 폈다. 구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가 독일의 신교도를 돕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했다면, 종교 이전에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군의 저항 또한 만만치 만은 않아, 전쟁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가, 1637년 독일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가 카톨릭의 복귀와 독일통일의 꿈을 접은 체 사망하고, 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스페인의 쇠퇴, 그리고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모두가 평화를 외치자 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독일로서는 아무 결정권도 없었다.

 

1641년부터 열린 강화회의는 50킬로미터나 상거(相距)한 베스트팔렌의 두 도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독일 황제는 프랑스와 스웨덴을 상대로 각각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문제의 회의가 개막된 것은 1644년 봄, 참가자는 독일측에서 황제를 비롯한 66개의 연방 대표, 외국에서는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네덜란드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의 대표들 수 백 명이 모여 협상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이 국제적 회의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의석배분에 따른 의전문제에서부터 의사 진행과 방법, 여기에 각국마다 다른 사정과 이해관계가 얽히고,...회의는 지지부진한 가운데 술판이 벌어지고,...전투는 계속되고, 전투의 상황에 따라 회의의 양상도 바뀐다.

 

1648년 봄, 30년 전쟁의 진원지 프라하가 스웨덴에게 점령되었고, 프랑스군은 독일 황제군과 스페인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런 전세의 변화는 회의의 속도가 빨라져 그해 11월에 6년간 끌어오던 화의가 오스나브뤼크에서 조인되었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3)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의 주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프랑스는 알자스 대부분과 메츠·베르 등을, 스웨덴은 서(西)포메라니아·브레멘주교령(主敎領) 등을, 브란덴부르크는 동(東)포메라니아를 얻고, 그 밖에 바이에른·작센 등도 약간의 영토를 각각 획득하였고,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을 승인 받았으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가 정식으로 승인되고, 칼뱅파에게도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으며, 독일의 제후(諸侯)는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조약체결권이 인정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신성로마제국에게는 사망증명서와 같은 것이었고, 제후들에게는 승리의 사령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용병들에 의한 약탈, 방화, 살육 등으로 국토는 황폐하였고, 한 때 발렌슈타인의 점성술로 있었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도 이 전쟁의 소용도리에 휘말려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굶어 죽거나 역병에 걸려 죽은 것은 케플러 뿐만 아니었다. 당시 1천 6백만 독일 인구가 6백만명으로 줄었고, 국토의 4/5가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는 지배자의 것일 뿐 여전히 일반에게는 지배자의 종교가 당연히 강요되었다.

 

더욱 분열된 독일에서 절대왕정에 합류한 것은 독일 전체가 아니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의 연방국가 들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시 수모를 당한 독일에서는 급기야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런 기운에 편승해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재상 비스마르크를 기용하여, 철혈정책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어 1871년 1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가짐으로서 대망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출처 :  blog.naver.com/armi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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