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기]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종주일자 : 2003년 8월 23일(금) - 8월 25일(일) 2박3일
- 종주코스 : 성삼재-노고단-연하천(숙박)-벽소령-세석-장터목(숙박)-천왕봉-중봉-치밭목-대원사
- 종주대원 : 김정환, 김재철, 송영기, 심재천, 박희용
6. 시대의 이단자들
벌써 중천에 떠 있는 따가운 햇살아래 영신봉(1657 M)을 오르기 시작한다. 급경사의 험한 바위길은 오르기 쉽게 나무계단으로 잘 단장되어 있다. 계단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져 있고..... 오래된 산객(山客)에게는 예전의 밧줄로 매어진 그 벼랑길이 오히려 그리울 것 같다. 편하기는 하지만 왠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기보다 훨 출세해 왠지 얘기 나누기가 쭈삣쭈삣해지는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발아래 백무동을 굽어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정산과 무진, 김 관장이 차례로 땀범벅이 된 모습으로 계단을 오른다. 영신봉을 지나면 세석평원이 지척이다. 오늘 일정은 어제보다는 여유롭다.
세석산장에서 먼저와 있던 [다리 제일] 재철이와 합류한다. 행동식으로 준비한 미숫가루와 찰떡파이로 점심을 대신하며, 민족상잔인 6.25 전쟁의 와중에서 지리산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의 얘기를 잠시 주고 받는다.
지리산에는 일세를 풍미했던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흔적과 호랑이 토벌대장 김종원에 얽힌 얘기가 곳곳에 남아 근세사의 한 족적을 형성하고 있다. 지리산에 얼룩진 그 들의 고뇌와 아픔의 크기를 내 재주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이념의 깃발아래 지리산에서 젊음을 불사른 시대의 이단자, 그 들에게 지리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느 님의 글을 떠올려 본다.
"지리산은 시대에 항거하면서 살았던 이단자들의 최후의 도피처였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상고해 보건데, 지리산에 살다 떠나면서 제발로 온전하게 걸어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진 다 그대로 지리산의 흙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리산은 세상이 버린 사람도 다 안았습니다. 어머니처럼. 동란시절 지리산을 무대로 모진 목숨을 이어오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은 지리산에서 죽어서야 영원한 안식을 찾았습니다."
- 이 개호의 [지리산 편지]중에서 -
그러나, 어제와 오늘 우리가 걸어온 그 자리에는 그들의 신념이나 투혼의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자연 그대로의 평화로운 질서가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고뇌하다 지리산의 흙이 되어버린 시대의 이단자들도 이제는 이념에 대한 갈등을 거두고 평온하게 저 자연 속에 잠들고 있는지..... 오로지 서로가 한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화해하고 용서하면서.....
그렇다. 한 조상 한 핏줄의 젊음들이 피아(彼我)로 나뉘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리라. 상대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상대를 미워할 수만 없없던 그 들, [한 민족]이라는 뿌리 앞에 마음속 깊이 아파했을 그들이기에......
세석을 떠난 발길은 촛대봉(1703 M)과 삼신봉을 지나 연하봉(1730 M)의 기암괴석(奇岩怪石)과 기화요초(奇花妖草) 앞에 잠시 넋을 잃는다. 지리 10경의 하나인 연하선경(煙霞仙景)을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이끼낀 기암괴석은 고색이 창연한데,
기화요초는 향기롭게 돌틈에 피어나니,
제몫을 다하고 꿋꿋이 버텨선 고사목은 들판을 이루고,
발아래 원시림은 수백년 푸르름을 자랑하네.
멀리서 가까이서, 흰구름속에 안개속에, 산들바람에 소슬바람에 연화봉은 그 오묘한 모습을 달리하니 어찌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겠는가?
여유로운 오늘 일정 탓인지 선경(仙景)에 빠진 정산과 김관장은 연하봉에서 발길을 돌릴 생각을 않는다.
그 들을 두고 먼저 장터목 산장에 도착한 3인은 낙조시간을 기다려 천왕봉을 오르기로하고 훌라패를 쉼없이 돌린다. 자, 무진아 재철아 원 훌이다, 팔뚝 걷어라 ! 장터목 산장에서는 때아닌 카드놀이가 한 판 어우러진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그 어디냐? 오늘 우리가 머물 곳은 그 어딘가?"
오늘 밤 장터목의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을 헤아리며 가슴가득 안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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