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智異十景

저 높은 곳을 향하여(5)

月波 2005. 8. 7. 16:47

[지리산 종주기]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종주일자 : 2003년 8월 23일(금) - 8월 25일(일) 2박3일

 - 종주코스 : 성삼재-노고단-연하천(숙박)-벽소령-세석-장터목(숙박)-천왕봉-중봉-치밭목-대원사

 - 종주대원 : 김정환, 김재철, 송영기, 심재천, 박희용




5. 비누의 화신

종주의 둘째날을 동녘의 붉은 해오름과 함께 시작한다. 과연 내일도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일기예보는 비인데...... 어제 반야봉에서의 기도가 효험이 있을지.......

밤새도록 연하천을 들썩거리게 했던 어느 코골이의 모습을 뒤로한 채, 부산히 짐을 꾸려 갈 길을 재촉한다. 늘 그렇지만 오늘따라 무진의 마음 씀씀이가 더욱 돋보인다. 작은 쓰레기 하나까지 함부로 버리지 않고 비닐봉지에 묶어 배낭에 챙긴다. 그기 두면 그대로 자연오염의 씨앗이 되려니...... 평소 순리를 중시하는 성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희생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비누는 사용할 때마다 자기 살을 녹여서 작아진다. 종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그 때마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씻어준다.
녹아서 작아지는 비누처럼 사람의 삶중에 희생하는 삶만큼 숭고한 것은 없을 것이다.

희생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인간관계는 어느 것이나 아름답다. 사랑이 그렇고, 우정이 그렇고, 동료애가 그렇다. 비누처럼 나를 희생해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삶......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삶이다. 이번 산행의 등반대장인 무진의 마음씨를 다시 가슴에 새긴다. 무진이 있어, 그가 친구라 나는 더욱 행복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발길은 벌써 삼각고지를 거쳐 형제봉으로 향한다. 아침나절의 안개가 피어올라 구름바다를 형성한다. 노고단에서 미처 느끼지 못한 운해(雲海)에 빠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산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 산이 일어나는 모습을 오감으로 체험한다.
정산과 김관장은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무진은 이 멋에 능선주를 하는 거라고 되뇌이고..... 재철아, 저게 산이냐, 바다냐, 하늘이냐? 저기에 취해 파일럿들이 가끔 이름 모를 산하에 비행기를 곤두박질 치는 것일까?

 

 


선경(仙景) 위를 떠도는 기분으로 형제봉에 오른다. 소슬바람이 제법 불고 있다. 마음 속까지 시원해진다. 그 바람을 코끝에 적시며 고개를 돌리니, 멀리 서북능선에 펼쳐진 운해는 또 다른 장관이다. 정말 능선종주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큰 소리로 외쳐 본다. 능선아, 능선아 너 모습 아름답구나 !

형제봉에서 벽소령 가는 길은 크고 작은 바위를 밟고 오르내리는 너덜길이다. 너덜길...... 매 걸음마다 무릎이 통증을 호소한다. 정말 끝없이 인내를 요하는 길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치며, 간간이 고개를 들어 삼정산을 바라본다. 지난 6월, 네 커플의 11기 부부가 함께 트랙킹했던 지리산의 지산이다. 양정, 음정, 하정...... 영원사, 상무주암...... 각묵스님을 못뵈고 상경하던 아쉬움.....이런저런 생각에 발길은 벌써 덕평봉을 지나 선비샘이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상하좌우가 온통 황홀경이라 둘러보니 칠선봉이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덧붙이랴? 그 이름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고독한 너덜길 주행을 해낸 보람이 있다.

초가을 햇살이 칠선봉을 감싸고 바람이 되어 가슴으로 파고든다. 오랫만에 배낭을 내려놀고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뒤를 돌아보니 반야봉은 휜구름에 휩싸여 엄마품처럼 포근히 있는데, 고개돌려 달려갈 그 길에는 멀리 천왕봉이 여여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PS] : 녹아서 작아지는 비누를 다시 떠올려 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저없이 녹아서 작아지는......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이 아름다운건 상대의 허물을 깨끗이 씻어 주고, 스스로는 작아지는 비누의 화신이 있기 때문일거다.
비누의 삶이라? 무생물에도 불성은 있는 것인가?
이거 정말 갑자기 머리 아프네.(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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