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기]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종주일자 : 2003년 8월 23일(금) - 8월 25일(일) 2박3일
- 종주코스 : 성삼재-노고단-연하천(숙박)-벽소령-세석-장터목(숙박)-천왕봉-중봉-치밭목-대원사
- 종주대원 : 김정환, 김재철, 송영기, 심재천, 박희용
7. 낙조여행(落照旅行)
낙조(落照)를 기다리며 벌였던 장터목의 5마는 천왕봉(1915 M)의 일몰시간을 앞두고 그 판을 접는다. 수차례 천왕봉에 오른 지리산지기 무진이 혼자 산장에 남아 저녁을 준비하기로 자청한다. 역시 제 살을 깍아 상대를 빛나게 하는 [비누의 화신]이다.
나머지 넷은 카메라, 랜턴, 자켓만 챙긴 가벼운 모습으로 왕복 2시간의 천왕봉 낙조여행(落照旅行)을 떠난다.
"날씨가 맑으면 천왕봉에서 멀리 덕유산, 가야산도 보일텐데......" 정산의 바램이다. 내일 새벽 천왕일출(天王日出)이 불투명하기에 천왕낙조(天王落照)가 더욱 기대되는지도 모른다.
장터목에서 시작하는 낙조여행은 그 출발부터 가파른 돌계단이다. 제석봉(1806 M) 오르는 길에서 세월의 아픔을 안고 우뚝 서있는 고사목 군락지를 만난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고 소리없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지난 7월 정산과 함께했던 당일 종주의 가장 힘든 고비에서 하산하던 무진과 치현씨를 극적으로 만나 생기를 회복했던 그 지점이다. 그 때의 반갑고 고마움이란......
제석봉 고사목에는 탐욕에 눈먼 인간이 저지른 부끄러운 얘기가 얽혀있다.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 제석봉에 불을 지른 치졸한 인간이 남긴 자취가 여기저기 생생히 남아있다.
고개를 돌리고 만다. 멀리 석양을 바라본다. 붉은 해무리가 구름에 휩싸인 채 일몰(日沒)을 준비한다. 흡사 30여년 전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 제석봉을 불태웠던 도벌꾼들의 추한 모습이 핏빛으로 불타는 것 같다.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우리는 곧장 천왕봉 정상으로 향한다. 통천(通天)을 이루었으니 천하가 발 아래에 있다. 이제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드디어 천왕봉(1915 M)이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일몰의 모습을 서투른 글로써 이루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가슴에 담을 뿐이다.
가야산은 저 멀리 구름속에 가려 있지만, 다행히 덕유산이 아스라히 보인다. 이미 서녘에는 흰구름이 낙조와 어우러져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저녁노을에 마냥 취한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한없이 마음이 넉넉해진다.
몸에 묻은 때를, 마음에 밴 욕심을 씻고 털면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달려왔다. 버리고 비우면서, 무소유로부터 느끼는 충만을 되새기며, 더하기보다 빼기의 법칙을 생각하면서...... 다 버릴 수 있어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이렇게 살리라 다짐해 본다.
이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내려가야 할 길만이 남아 있다. 내일 새벽 일출은 기약할 수가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아쉬움도 욕심도 없다.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온 가슴이 풍성할 뿐이다. 오래도록 이런 마음이었으면......
정상에서 한 걸음 내려서며 노을에 비친 강산도인의 숨결을 만난다. 낙조(落照)아래 절절히 흘러 넘치는 그의 산정무한 소요유(山情無限 逍遙遊)가 산행객의 발 걸음을 붙잡는다.
푸른 산 흰 구름은 산객(山客)의 마음이요
바람의 물결은 산객(山客)의 발이로다
카메라 하나 딸랑 메고 천왕봉에 오르다
물따라 핀 꽃 향기 코끝을 때리고
산정(山頂)은 높아 운해(雲海)는 더욱 한가로운데
애석히도 오늘 다시 나 홀로 보는구나
무슨 일로 서풍은 불어 잠든 숲을 깨우고
한소리로 차가운 산새는 장천(長天)을 울며 나는가
서쪽 하늘 아래로 태양이 떨어지자 산길은 금새 어두워 온다. 이마에 랜턴을 달고 길을 돌려 하산을 서두른다. 내일 새벽 일출을 보러 다시 이 길을 오를 수 있을런지...... 낮에 만난 산장관리인은 비가 예보되어 있다고 했다. 내일 새벽에 보잔다. 호우 주의보라도 내리는 날에는 일출은 커녕 능선종주 자체가 금지이니 바로 하산해야 한단다.
그러면, 하산코스로 계획한 천왕봉, 중봉, 써리봉, 치밭목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즐길 수 없다.
천왕일출(天王日出)을 보는 것은 섭리에 맡기자. 3대의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선업(善業)을 쌓아온 좋은 친구들 덕에 그 복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 반야봉에서의 기도 효험을 기대해 볼 수는 없을까?
장터목으로 돌아온 우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지리종주(智異從走)의 마지막 밤을 준비한다. 배낭속에 남겨둔 온갖(?) 먹거리가 총 출동한다. 숱한 연봉(連峰)을 오르내리며 어깨를 묵직히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 그 와중에 아직도 [참眞 이슬露]가 아홉 팩이나 살아남아 있었던가? 참이슬 덕분에 장터목의 밤은 더욱 무르익어만 간다.
아, 그런데..... 예감이 좋다. 밤하늘은 마냥 맑기만 하고, 우리가 나누는 소주잔에는 수많은 별들이 앞다투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연하천에 이어 장터목의 하늘 아래서도 수없는 별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천왕일출에 희망을 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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