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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스미는 아픔을 딛고 - 동아(백제) 후기

月波 2005. 8. 7. 18:06

 

가슴에 스미는 아픔을 딛고 - 동아(백제) 마라톤 후기(2004년 10월 10일, 4시간 18분 5초)

 

 

(1) 프롤로그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뼈속을 스미는 실패의 아픔이 있으리라. 동아 백제가 그렇다. 공주에서 열린 동아 백제마라톤을 다녀온지 1주일이 지나도록 마음 한 구석에 사라지지 않는 이 아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Finish Line 5m를 앞두고 걸어서 완주했다는 사실이 주는 안타까움인가? 아니면 4시간 16분이라는 기록이 말해주는 참담함 때문인가? 모두 아니다.

동아 백제대회를 되돌아 본다. 아련한 기억속에 가슴속에 맺힌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그 궤적을 하나하나 그려보자. 그리하여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 달려보자.

(2) 동아 백제의 잔상들

10월 10일 새벽 5시 집을 나선다. 연습량 부족으로 지난 봄에 세운 목표대로 조선 춘천에서 기록단축이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번 공주 동아대회를 춘천을 앞둔 마지막 장거리 훈련으로 삼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다.

스트레칭과 기념사진을 찍고, 출발선상에서 만난 강마의 멤버들은 목표시간을 평소 기록보다 30분이상씩 늦추어 잡는다. 모두 즐겁게 달리며 춘천을 위한 LSD로 삼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Sub4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금년에는 코스가 바뀌어 초반에 공주시내를 제법 달린다. 아침 일찍 시내에 나와 환영해주는 시민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초반에 근육이 뭉치며 고전했던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금년에는 초반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금강대교를 되돌아 건넌다.

금년의 코스는 여러 곳에서 크로스를 한다. 앞서 달리는 주자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중간 반환점을 돌아오는 주자들과 마주치며 강마의 님들끼리 서로 힘을 외쳐준다. 17Km지점에서는 친구(박교수)가 따라와 반갑게 인사하며 잠깐 동반주한다. 지난 광주 울트라 100에서 만나고 오랫만의 조우다. 그는 전국의 마라톤 대회장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

20Km를 지나면서 갑자기 체력이 떨어지고 스피드를 낼 수가 없다. 그 때까지 시속 11.8Km페이스로 달렸으니 목표한 Sub4에 비해 빨리 달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 오버페이스인가? 그래, 마음을 편히 먹고 스피드를 조금 줄이자...... 그런데, 날씨는 점점 더워오고, 목이 말라오며 급수지점이 자꾸 기다려진다. 최근에 20Km이상 장거리 훈련을 하지못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25Km지점을 지나며 물을 세컵이나 마신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물을 많이 마신 대회는 고생했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한다. 세번째 중간 반환점을 돌아오는 주자들과 크로스하며 힘을 내보려하지만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발바닥이 아파온다. 마라톤을 하며 순간순간 수없이 포기의 유혹을 받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하다. 그저 주저않고 싶다.

그러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걸을 수도 없고, 중도포기는 더욱 할 수가 없다. 10번의 풀코스 완주를 하는동안 단 한차례도 걷거나 중도포기 없이 달려서 완주했다. 오늘 내키지 않는 부끄러운 역사를 새롭게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보자.

세번째로 크로스를 하고 지나가는 친구 정산(正山)을 만난다. 생각보다 뒤로 쳐져있다. 그도 힘들어 보인다. 친구끼리는 이심전심인가? 서로 손을 들어 힘을 보태지만 마음 뿐이다. 30Km이후 조금씩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뭉쳐져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왠지 불안하지만 그저 앞으로, 앞으로 달릴 뿐이다. 스피드는 시속 10Km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길거리 아스팔트 위에는 10월의 따가운 햇살이 작열하고 있다. 그 햇살에 콧잔등은 타들어가고, 한 번 갈증에 빠진 몸은 회복될 줄 모른다. 서서히 인정하기 싫은 패배를 예감하듯 마음은 깊은 자책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무모함이 가져다주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나에게 이 무슨 허식의 덩어리에 빠져있냐며 자문해 본다. 안타깝다.

걷지않고 달리기를 계속한다. 마음 하나는 끊임없이 걷기를, 중도포기를 요구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하나는 침잠해있는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달리게 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두 개의 마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싸우고 있다. 아직은 달리는 마음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나의 몸은 그저 마음이 시키는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37Km지점의 터널을 지나 내리막길을 달리며, 죽음같은 고통속에서도 어렴풋이 완주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 결승선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때문이리라. 비록 Sub4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걷지않고 달려서 Finish Line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씩 스피드를 올려본다.

39Km지점에서 걷고있는 친구(박교수)를 다시 만난다. 그는 아주 편안한 모습이다. 힘들어 하는 나에게 옆에서 구호를 외치며 함께 달린다. 40Km 급수대와 마지막 반환점을 돌아 41Km지점을 달리는데 종아리가 석고처럼 굳어져 오는 느낌이다. 다리근육이 실룩실룩한다. 정말 힘들다. 친구(박교수)는 속도를 늦춰 걷자고 하지만 말없이 계속 달린다. 그러나, 이것이 화를 부를 줄이야?

오른쪽 종아리에 심하게 쥐가 나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풀썩 뒤로 나자빠진다. 다행히 친구(박교수)가 내 다리를 하늘로 올리고 맛사지를 하지만 고통만 더해올 뿐 이다. 순간 머리속이 두려움이 엄습한다. 송곳이나 바늘로 뭉친 종아리 근육을 찔러야 풀리는데...... 다행히 근처의 누군가가 달려와 수지침(벌침)을 놓고, 10여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일어선다.

이제 남은 거리는 1Km가 채 되지않는다. 그래도 달려야 한다. 서서히 달린다.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순간순간 종아리 근육이 발걸음을 잡지만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린다. 저 앞에 Finish Line이 보이고, 사진사들 앞에 두 팔을 번쩍 들어 포즈를 취한다. 이제 Finish Line 5m 앞이다. 아 ! 그런데 ..... 이럴 수가 !!!!! 그 순간 왼쪽 종아리에 또 심하게 쥐가 난다. 이제 주저앉을 수도 없다.

그대로 멈춰 석고상처럼 우뚝 서있다. 결승선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본다. 쥐가 나 굳은 왼쪽 종아리를 안타깝게 보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결심을 한다. 쥐난 다리를 움켜잡고 끌면서 움직여본다. 억지로 걸음을 옮길 수 있다. 그래 이 길 뿐이다. 간신히, 간신히 다리를 끌며 Finish Line을 밟고 결승선의 사회자와 Hi Five를 한다. 그 순간 파란 가을하늘이 내게 쏟아진다. 4시간 16분에 걸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낸 것이다.

(3) 에필로그

동아백제이후 쉬다가 나흘만에 청계산 목요산행을 통해 종아리 근육을 외형적으로는 회복시킨 것같다. 그리고, 하루를 더 쉬고 인화원 잔디구장을 1시간 정도 달려보니 그런대로 달릴만하다. 하지만 가슴속에 남아 있는 동아 백제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

비록 쥐가 나서 쓰러지기는 했지만,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마지막 5m를 쥐난 다리를 움켜 쥐고서...... 그런 의미에서 " 뛴다 끝까지 즐겁게 !!! " 를 모토로 살아온 내 삶에 부끄럽지 않은 또 하나의 궤적을 그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전히 남아 있는 이 아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쉬움이 아니라, 어쩌면 준비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을 스스로 허용한 자신에 대한 소리없는 질책인지도 모른다. 훈련을 게을리한 스스로를 눈감고 덮어 준 부끄러운 자화상에 대한 자기반성인지도 모른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게 살아가라는 어른의 가르침을 스스로 어긴 아픔인지도 모른다.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이 내면의 아픔을 뼈저리게 받아들여라 하리라. 준비하는 자에게만 미래가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달리기나 비지니스나 모두 적용되는 철칙이다. 한 순간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훈련에 시동을 걸자. 공주에서의 아픔을 딛고 다시 춘천에서 즐겁게 Finish Line을 향해 달려보자. 마라톤처럼 내 삶에서도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 보자.

[완주기록] 4시간 16분 05초, 풀코스 남자 910위
- 구간기록 : Check1(5.84km) - 09:31:39, Check2(17.78km) - 10:33:18,
- 구간기록 : Check3(31.79km) - 11:57:36, Check4(40.389km -12:5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