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 마라톤 완주기

단풍과 호수에 어우러진 가을축제

月波 2005. 8. 7. 18:09

 

[단풍과 호수에 어우러진 가을축제] -조선일보 충천마라톤(2004년 10월 24일, 3시간 45분 28초)

 

 

1. 프로로그 : 12번째 완주에 나서며

마라톤 신청을 해놓고 참가를 주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달리면 달릴수록 마라톤에 대한 자신이 떨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주전 동아 공주에서의 악몽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부족한 훈련에 대한 스스로의 자책이리라.
춘천대회를 하루 앞둔 토요일 오후에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정산(正山)에게 전화를 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답은 간단하다. 훈련이 부족하건, 일이 바쁘건 상관없이 춘천은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

그래. 쥐가 나서 고생했던 공주의 기억을 지우고 달려보자. 늦게나마 이온음료와 물을 사다가 마시기 시작한다. 꿀꺽, 꿀꺽 ..... 주위에서 힐끗힐끗 쳐다본다. 집에가 준비물을 챙겨 하루 먼저 강촌으로 가서 워밍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워밍업이라 해야 별것이 있던가! 저녁 먹고 강촌에서 가볍게 2-3Km 정도 조깅하는 것이면 충분한데......

10월 24일 아침, 강촌에서 간단히 전복죽 한 그릇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찰밥과 떡으로 출정하던 여느 때와 다르다. 형편되는대로 달려보자. 서두르지 말고 단풍과 호수가 어우러진 춘천호반에서 그저 즐겁게 달려보자. 자기암시를 계속한다. 아직 배번도 챙기기 전에 남대장에게서 전화가 온다. 강마를 태운 버스가 지금 강촌을 지나고 있다고..... 서둘러 춘천으로 향한다.

춘천 운동장에는 형형색색의 유니폼으로 물결을 이루고 있다. 강마의 텐트를 찾아 여러 지인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달림이들은 모두 하나다. 스트레칭과 가벼운 런닝, 아자아자 아자! 운동장으로 들어간다. 회사의 무한질주 멤버들을 찾아보지만 인파속에서 찾기가 쉽지않다. D그룹에서 강마의 동지들을 몇몇 만나 출발에 앞선 긴장을 풀며 얘기꽃을 피운다.

기록을 포기하고 천천히 즐겁게 달리자고 마음을 먹으니 그저 마음이 편안하다. 버리면 이렇게 편안한 것을 뭐 그리 움켜잡고 마음 고생을 하는지? 욕심에 짓눌려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기가 생각만큼 쉽지만 않으니 ..... 그래. 생각을 바꿔보자. 기록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달려보자. 12번째의 마라톤 여행은 나만의 신조대로 편안히 달려보자. 뛴다, 끝까지, 즐겁게 !!!



2. 백오리 여행의 기억들

(1) 출발 - 10Km : 51분 02초

12번째 풀코스 도전에 나선다. 출발 매트를 밟으며 운동장을 벗어나는 달림이들과 길가에 응원나온 시민들을 번갈아 살핀다. 환호와 축제의 분위기다. 생각보다 몸과 마음이 가볍다. 어쩌면 분위기에 이미 취해 있는지 모르겠다. 오버페이스하면 안되는데.....
어차피 처음 5Km는 지속되는 오르막이니 크게 무리할 수는 없을거다. 천천히 달리니 D그룹에서 함께 출발한 강마의 여러 동지들이 한 사람씩 앞서 간다. 따라 붙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페이스를 늦춘다.

5Km 급수대에서 물 한모금을 입술에 축이고 내리막 길을 달린다. 어제부터 충분히 이온음료와 물을 마셨으니 왠만하면 급수는 최소한으로 하고 달릴 생각을 한다. 앞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의암호를 도는 인공터널 속에서 달림이들이 외치는 함성이다. 춘천 마라톤 코스중 제일의 묘미가 여기 의암댐이다. 달림이들이 ㄷ자 모양으로 달리며 단풍과 호수의 환상적인 조화속에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달리는 곳이다.

나도 큰 소리로 환호하며 터널을 빠져나와 의암댐으로 내달린다. 의암댐에는 사무실의 여러 동료들이 먼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응원을 해준다. 플랭카드까지 걸고서...... 초반이라 아직 힘이 넘치지만 그네들의 저 마음이 35Km 지나 마지막 어려운 고비에서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잠시 멈춰서서 함께 사진이라도 찍었으면 했는데, 달리는 발걸음에 붙은 가속도를 어찌할 수 없다.

의암댐을 돌아 10Km 급수대가 가까워지니 의암호에 떠있는 섬, 중도가 눈에 들어온다. 호수에는 뱃사공이 노를 젓는 모습이 한가롭고 ...... 2년 전 여기 춘천에서 처음으로 풀코스에 도전할 때는 거리표시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앞사람 꽁무니만 보고 달렸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2년동안 12번의 풀코스에 도전하며 제법 달리는 여유가 생긴 셈일까? 삼악산의 단풍과 의암호의 정경을 눈에 담으며 즐주를 계속한다.


(2) 10 - 20 Km : 49분 29초(누적 1시간 40분 31초)

달리는 발걸음에 제법 탄력이 붙는다. 경험상 가장 기록이 좋은 구간이 10 - 20 Km다. 금년에는 기록순 출발이 제대로 지켜졌나 보다. 주변을 함께 달리는 달림이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모두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지속주를 하고 있다. 숨이 다소 가쁘지만 스피드를 유지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거칠은 숨소리는 늘 나의 전매특허이니 .....

의암호수를 끼고 달리는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조금씩 스피드가 빨라짐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오버페이스의 전조가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도 몸이 반응하는대로 맡겨본다. 달리다 보니 작년에 무진(無盡)이 나를 따라와 추월했던 지점이 나타난다. 금년에도 함께 뛰기로 했는데, 갑작스런 일이 생겨 함께 못한다는 전화에 아쉬움이 컸었다. 내년을 기약해야지 ......

15Km를 앞두고 강마의 임환X님을 만난다. 그는 마라톤을 진정으로 즐기는 참 달림이다. 금요일 밤의 무한질주를 즐기며 50Km 연습주를 함께 하던 5월의 여러 날들, 양재천에서 탄천을 따라 핀 아카시아 향이 코를 찔렀었지..... 울트라의 길에 함께 입문하며 밤새워 빛고을 광주 산야를 밤새워 달리던 일이 뇌리를 스친다. 그는 금년에 왠만한 울트라와 풀코스를 빠지지않고 두루 섭렵하고 있다. 게으른 나를 채찍질하여 빛고을 울트라 100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와 함께 밤새워 달려보고 싶다.

임환X님을 뒤로한 채 15Km 급수대를 지나니 제법 가파른 깔딱고개가 나타난다. 여기 근처 어딘가에 박사들이 많이 배출된 박사마을이 있다는 기억이 난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봐야지 하며 깔딱고개를 힘차게 달려 오른다. 작년에 여기서 힘들어 했었는데, 아직까지 컨디션이 좋다. 앞에는 D그룹의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를 중심으로 한 무리가 달리고 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던가? 그렇게 잠재워 두었던 기록에 대한 욕심이 슬슬 발동하기 시작한다. 2주전에 다리에 쥐난 경험도 있고하니 초반에 슬슬 달리다가 후반에 체력이 되면 스퍼트하려했는데..... 15Km지점에서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잡으니, 내면에 잠자던 욕심이 분출한다. 깔딱고개를 지나 내리막 길에서 페메를 추월해 달리고 만다.


(3) 20Km -30Km : 52분 16초(누적 2시간 32분 47초)

하프지점(21.0975 Km) 통과기록이 1시간 46분 12초다. 작년의 기록보다 3분이 빠르다. 갑자기 온 몸에 생기가 돈다. 그래. 달려보자. 처음에 가졌던 생각, 천천히 즐겁게 달리면서 Sub 4를 목표로 하자는 생각이 일순간에 바뀐다. 이 페이스대로 달리면 3시간 30분대에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21Km이후 청평댐까지 5Km는 완만한 오르막이 길게 이어진다. 여기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면 곤란하다. 보폭을 줄이고 시야를 좁게하여 발아래만 보고 달린다. 정산이 건네 준 파워젤을 입에 넣으니 꿀맛이다. 작년처럼 식이요법도 해보고, 파워젤도 몇 개 준비할 걸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러나, 어찌하랴? 바쁜 일정에 제대로 훈련도 못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

26Km 지점, 청평댐을 지나면서 작년보다 몸 컨디션이 좋다는 생각으로 달리는 템포를 그대로 유지한다. 청평댐을 지나 잠시 오르막을 달리면 그 이후 30Km 지점까지는 대체로 내리막길이다. 조금씩 피로감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지만, 오른쪽에 북한강을 끼고 달려내려가는 재미에 젖어보려고 한다.

30Km지점 급수대가 기다려지기 시작한다. 달리면서 다음 체크 포인트가 기다려진다는 것은 서서히 체력이 떨어져감을 의미한다. 30Km지점에는 물과 바나나, 초코파이가 있겠지하는 기대가 커져간다. 확실히 달리는 템포에 부담이 느껴진다. 그러나, 템포를 늦출 수는 없다.

드디어 30Km 지점이다. 바나나 반개와 물 한 컵을 마신다. 바나나도 초코파이도 한 입이상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12Km지점부터 참아왔던 소변을 보며 배설의 시원함을 만끽한다. 노상방료다. 이거 경범죄인데 왜 이렇게 뻔뻔해졌을까?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잠시, 갈길을 재촉한다.


(4) 30Km - 40Km : 59분 6초 (누적 3시간 31분 53초)

31Km 지점을 지나면 곧 102보충대가 나타난다.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전방배치를 앞둔 신병들이 거쳐가는 곳이다. 신병들이 길가에 나와 인의 터널을 만들고 응원을 하는 곳이다.
30 Km를 지나면 누구나 서서히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30Km이후가 진정한 마라톤이라 하지 않던가! 금년에는 신병들의 터널대신 조촐히 군악대가 길가에 나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지쳐가는 자신을 잠시 음률에 맡겨본다.

군악대의 음률이 서서히 멀어지면서 서서히 넓고 평탄한 아스팔트 도로로 접어든다. 늘 그랬듯이 평지의 넓은 일직선 도로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런 길은 달림이들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달리는 스피드가 현저히 떨어진다. 숨소리는 조용히 안정되었지만 대신 스피드가 나지않는다.
훈련부족에 따른 지구력의 문제인가? 벌써 체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 미처 2Km도 못달리고 다음 급수대가 기다려진다. 쥐가 날까봐 조금씩 굳어지는 종아리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달린다.

무의식중에 물을 한 컵 들이키고 35Km지점을 지나간다. 글리코겐이 고갈되었는지 다리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정신이 몽롱하다. 이 역경을 이겨내야지.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지. 스스로 체면을 걸어본다. 여의치 않다.

15 Km지점에서 내가 추월했던 3시간 40분 페이스메이커가 달랑 세명의 주자를 데리고 나를 앞서나간다. 하프라인을 통과하며 꿈꾸었던 3시간 30분대의 기록이 어렵다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정신을 집중해야하는데...... 반야심경을 외어본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도 일체고액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이 무색성향미촉법 ...... 제대로 외어지지 않는다. 정신집중이 안되는 것이다. 마음을 모아 행선(行禪)을 하기가 그리 쉽지만 않으니 육신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소양교가 눈에 들어올 무렵 앞서가던 강마의 오영X님을 만난다. 상당한 훈련으로 실력을 쌓았는데, 뒤쳐지는 것을 보니 아마 오버페이스한 모양이다. 함께 동반주를 하며 소양교를 건넌다. 나의 페이스에 맞추어 뛰니 참 편안하다는 오영X님의 얘기가 내게는 위안이다.

소양교를 지나면 4Km 정도의 넓은대로는 그야말로 죽음의 길이다. 달려도 달려도 거리가 줄지 않는 아스라한 길, 그것도 힘들고 지친 종반부에 인파도 제대로 없는 일직선 대로를 달려야 한다. 이 고비를 넘겨야 춘천을 완주할 수 있으니, 춘마의 마지막 난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천도 호락호락한 코스가 아니다. 다행히 38Km지점에서 응원하는 이규익, 지용님을 만나 힘을 얻는다. 40Km 급수대를 통과하며 길가에 나선 시민들을 보고, Finish Line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5) 40Km - Finish Line : 13분 35초 (누적 3시간 45분 28초)

40km이후는 많은 시민이 환호해주고 박수로 힘을 보태는 시내길이다. 작년에는 여기에서 힘을 얻어 마지막 스퍼트를 할 수 있었는데...... 그저 힘들고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2주전 동아 공주에서 마지막 41Km지점에서 쥐가 나서 드러누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스피드를 올리는 것을 포기한다.

그래. 출발할 당시의 원래 마음으로 돌아가자. 속도를 늦추고 마지막 남은 거리를 편안히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보자. 그래, 그래, 그러는거야. 속도를 늦춘다.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운동장 입구에 도열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선명히 들어온다. 낯선 그들의 얼굴에서 한없는 친밀감을 느낀다.

운동장으로 들어와 트랙을 돌면서도 여유있는 스피드는 지속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달린다. 운동장에도 스탠드에도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다. 수 없는 사람들의 시선속에 오른 손 주먹을 불끈 흔들며 Finish Line을 밟는다. 3시간 45분 28초에 걸친 105리의 환상여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3. 에필로그 : 또 다른 Fun Run을 꿈꾸며

이번의 춘마는 당초 기대 이상으로 잘 달린 것 같다. 연초부터 은근히 꿈꾸던 3시간 30분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다지 회한이나 아쉬움은 없다. 스스로 노력한 것만큼 정직하게 되돌려 받는 운동이 달리기이니....... 6월의 광주 울트라 100 이후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속도훈련이 없이 가을을 맞이했으니 .....

그런 여건속에서도 작년보다 3분정도 늦은 3시간 45분의 기록은 내게 과분하다. 또한, 2주전 동아 공주에서의 악몽을 떨칠 수 있어 더욱 다행이고....... 속도에 대한 욕심은 동계훈련을 하면서 서서히 다스려보자. 심폐의 한계가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않는 범위에서 자신을 점검해보자.

속도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는 쉽사리 다스려질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욕심만으로 해결될 일이던가?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언제 어디서나 "뛴다, 끝까지, 즐겁게"의 모토대로 달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벌써 또다른 Fun Run을 꿈꾸고 있다. 내년 가을 삼악산의 단풍과 달림이들이 하나가 되어 춘천호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일 그 날, 그 자리에 다시 달리는 내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기록] 3시간 45분 28초, 기록순위 3632위, 연령순위(45세-49세) 90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