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백두대간

(25) 소백산, 너에게로 가네

月波 2005. 10. 20. 11:09

 

 

 [백두대간 25차] 소백산, 너에게로 가네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05년 10 월  16일(일)  당일산행
 (2) 산행구간 :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늦은맥이고개-마당치-고치령

 (3) 산행거리 : 도상 23.5 Km, 실측 24.83 km(포항 셀파)
 (4) 산행시간 :   6시간  54 분

 (5) 참가대원 : 강마클 30명 회원(대간종주 :15명, 일반산행 : 15명)

 

 

 2> 산행후기

 

 (1) 너에게로 가네 ! 

 

소백산, 얼마만에 다시 찾는 소백인가? 처음 찾았던 스무살 푸른 시절이래 소백산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 깊이 품어온 산이다. 23년전 칠흑같은 어둠속에 이마에 올빼미불을 켜고 비로봉에 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때도 유명한 소백산의 바람은 사람의 발길을 쉽게 허하지 않았지만, 산상에서 산능선을 베개삼아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야영하던 그 기억을 어찌 잊으랴? 주목군락지에 솟아나는 천상(天上)의 이슬을 받은듯한 샘물 맛은 또 어떠하고 ..........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다시 소백을 찾는다. 비록 숱한 등산객의 발에 밟혀 곳곳에 상처난 모습을 하고 있겠지만, 그 때는 몰랐던 소백의 인문지리를 새삼 익히면서 소백산이 품고있는 넉넉한 덕을 한발한발 내몸으로 느끼며 걷고 싶다. 산봉우리마다 서서 저 먼 곳을 내다보며 세상사는 안목을 키우기도 하고, 능선길을 걸으며 산아래 마을 사람들의 단촐하면서도 후덕한 인심을 가슴에 담으면서 .......

 

소백산은 어떤 산인가? 스스로의 이름 앞에 작을 소(小)자를 붙여, 그 이름부터가 겸손하다. 해발 1439m, 결코 낮지 않은 산이면서 저 홀로 우뚝함을 뽐내지 않는 산이 소백산이다. 당당한 산세를 갖고서도 그 위세를 자랑하지 않고 모두를 품에안는 산이 소백산이다. 그런 소백산의 기품을 이번 대간길에서 조금이나마 배우고 따를 수 있을까?  오래 못만난 연인을 만나러 가듯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잠을 아끼고, 너에게로, 소백산 너에게로 달려간다.

 

       너에게 가는 길이 / 세상에 있나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 여기까지 왔네

       끝없는 그리움이  / 나에게는 힘이 되어
       스스로 길이 되어 / 너에게로 가네

 

        안도현의 시집『그대에게 가고 싶다』중 [나그네]를 개사(改詞)한 [너에게 가네]             

 

시 노래를 듣고 싶으면 재생버튼을 클릭하세요

안도현의 시를 유종화가 개사/작곡하고 김근영이 노래했습니다

 

 

 

 (2) 죽령에는 대나무가 없다?

 

 사통팔달, 어디를 가도 쭉쭉 뻗은 고속도로 덕분에 백두대간 길에 접근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무박 2일 산행이 당일산행으로 해결되니 ......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리던 버스는 우리나라 도로터널중 가장 길다는 죽령터널을 앞두고 단양나들목에서 내린다. 죽령옛길을 따라 꾸불꾸불, 굽이굽이 죽령 고개마루를 향해 올라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5만분의 1 지도를 보니 단양쪽에 장림(長林)이란 마을이 있다. 이름대로라면 장림은 하늘향해 두팔벌린 나무들이 우거진 곳이겠지? 죽령(竹嶺)에도 대나무 밭이 고개를 뒤덮고 있을테고 ......  그런데, 장림무장림 죽령무죽령(長林無長林 竹嶺無竹嶺)이다. 봉화 현감 조목(1524-1606)이 읊은대로 본래 죽령에 대나무가 없고 장림(長林)마져 제대로 된 숲이 없으니, 세상살이처럼 이름에 얽매이는 일은 애당초 부질없는 허상인가 보다. 

 

 하기야 죽령은 이 고개길을 개척한 죽죽(竹竹)이라는 신라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니 애당초 대나무밭은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고개길의 역사중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는 하늘재가 최초란다.(서기 156년) 그런데, 죽령은 하늘재보다 불과 2년뒤에 고개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고하니, 18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고개인 셈이다. 우리들의 귀에 익은 [죽지랑]의 탄생설화가 담긴 [모죽지랑가]라는 향가에도 죽령에 얽힌 얘기가 있고 .......

 

 죽령 고개마루에 도착하기가 바쁘게 30명이 기념사진 한장 남기고 2개조로 나누어 소백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어갈 15명은 크로스컨츄리로 고치령을 향해 앞질러 달리고, 나머지 15명은 비로봉 지나 국망봉에서 하산할 요량으로 여유로운 자세다. 오랫만에 산행에 동참한 아내를 후미에 두고, 앞서서 대간길을 향하는 마음이 영 편치않다.

 

그러나, 어쩌랴? 여보, 나는 고치령까지 대간길을 달릴테니, 당신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소백의 능선을 즐기다가 죽계구곡으로 내려가 가을정취에 한껏 젖어보구려. 

 

        

 

                                 소백능선이 눈부신 하늘아래 뻗어있다

 

 

 (3) 연하선경(烟霞仙境)이 이러했을까?

 

 죽령에서 소백산 천체관측소를 향해 뻗어있는 길은 흉물스럽게도 시멘트 포장을 해놓은 오르막이다. 그 길을 지겹게 1시간 30분이나 올라가야한다는 사실이 지레 사람을 질리게 한다. 이럴 때는 마음을 다른 곳으로 몰입시켜야 한다. 어디에 혼을 팔아볼까? 걷는 걸음에 가속을 하여 제법 가쁜 숨을 몰아쉬어본다.

 

 중계소가 있는 제 2연화봉이 제법 가까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  북서쪽 단양지방의 산군(山群)들은 이제막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양 운무(雲霧에 휩싸여 있다. 지리(智異)의 연하선경(烟霞仙景)이 저러했었지 싶다. 새벽산행을 해야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아침 9시가 되도록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누구의 복덕(福德)일까? 

 

 지리산 천왕봉에서 한 발 내려서며 글로써 만났던 강산도인의 연하선경 소요유(烟霞仙境 逍遙遊)가 저러했을까?

 

             구름위에 떠있는 고봉준령

             첩첩이 가슴에 품고

             어머님의 인자한 모습으로 서있네

             운무 머무는 고봉

             연하선경에 신선이 노닐고

             흰구름 걷힌 청산은 산산수수(山山水水)

             그대로 여여(如如)하도다

 

         

                                 소백산 연화봉 너머로 피어 오르는 아침안개

 

 

 겨울산행은 무박으로 새벽산행을 자주해야겠다는 욕심을 내본다. 찬란한 일출도, 피어오르는 새벽안개도 차가운 공기속에서 반사각을 달리하는 법이니 좀 더 멋있는 사진 한장 건질 수 있을까하는 부질없는 욕심이다. 그런줄 알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는 중생이 아니겠는가?  제 2연화봉, 천체관측소를 지나 발길은 제 1연화봉을 향한다. 연화봉 아래 어느 토굴에서 수행했던 일초(一超 : 시인 고은씨의 승려시절 법명)스님을 생각하며 .......

 

 

 (4)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천체관측소 뒤의 1383봉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시멘트길을 벗어나소백산의 산 내음을 맡을 수 있다. 소백산군의 산세를 마음껏 즐기며 제1연화봉(1,394.3m)으로 향한다.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생태의 보고처럼 수목과 산야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봄은 산 아래에서부터 오고 가을은 산정상에서부터 오는 법이니, 소백산 능선에도 예외는 아니다. 넓디넓은 소백능선의 한해살이 초목들이 성큼 다가온 가을앞에 그 싱그러움을 잃고 속살을 내놓고 있다. 초목들이 푸른 기운을 마음껏 자랑할 봄, 여름에 여기를 다시 걷고 싶다.

 

          

                              소백산 주목 관리초소 근처의 잎바랜 야생초들

 

 비로봉을 앞둔 소백능선의 고원지대에는 한해살이 풀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나무가 거센 비바람속에서 자라고 있다. 소위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生千年 死千年)을 산다는 주목(朱木)이다. 백두대간을 하면서 지리산 연화천 산장 근처와 태백산과 함백산 정상부 아래에서 만났던 그 주목이다. 그러나, 소백산의 주목 군락지는 20여년 전보다 더 줄어든 것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2월 영하 25도, 체감온도 영하 40도의 강추위속에 폭설에 뒤덮힌 함백산(백두대간 17차)을 산행할 때 만났던 설화가 활짝 핀 주목을 머리에 떠올리며 비로봉을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디딘다. 사위가 탁 트인 비로봉 정상에는 서거정의 ‘소백산’ 시가 원문과 함께 새겨진 돌비석이 우뚝 솟아  제일 먼저 소백산을 오르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드디어 소백산 정상 비로봉이다. 사위가 탁 트인 비로봉에는 커다란 돌비석이 소백산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서거정(徐巨正)이 지은 [소백산]이라는 한시(漢詩)가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小白山連太白山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위타百里揷雲間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鬼破慳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5) 비로봉, 그대는 몇이나 되더냐?

 

 비로봉(1439m, 毘盧峰), 오늘 걷는 소백산의 주봉이다. 우리나라 산봉우리중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얼마나 될까?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아마 이럴때 쓰라고 만들어진 한자어가 부지기수(不知其數)이지 싶다. 그것도 대부분 큰 산의 주봉(主峰, 최고봉)에 비로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져있다.

 

 가장 높기로는 백두산 열여섯 연봉중 천지에 더 나아간 망천후(2712m) 세 봉우리중 하나를 비로봉이라 한다. 묘향산(1909m), 금강산(1638m), 오대산(1563m), 치악산(1288m), 팔공산(1192m), 황악산(1111m)의 정상이 비로봉이다. 속리산에도 천황봉(1058m) 다음의 비로봉(1032m)이 있고, 가까이는 수원 광교산에도 비로봉이 있어 정상에 있는 예쁜 팔각정이 산객을 반기고 있다.

 

 비로봉이라는 이름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연유한다. 불교에서 말 하는 깨달음의 세계(眞理)가 법신불(法身佛)이요, 그 상징이 비로자나불이다. 주요 명산의 봉우리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의 거처인 셈이다. 현세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통상 대웅전(大雄殿)이라 부르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부른다. 내 스무살 시절의 고뇌가 묻어있는 해인사에도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얼마전 해인사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이란 사실이 밝혀졌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불법(佛法)은 온 세상에 광명천지처럼 항시 두루 비치고 있을테니, 오래되고 새로움을 구분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변하지 않는 진리 그 자체, 법신(法身)의 본성만을 쫓고 따를 뿐 ........

 

 부처님, 부처님, 온갖 이름의 부처님 ! 어찌 사는 것이 정말 마음 편히 잘 사는 길인가요?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거나 분별하지 말고, 온갖 허울과 껍데기를 대충 털어버리고 살면 좋을텐데 .....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거죠?

 

          

                            비로자나 부처님의 품에 안겨서, 오늘따라 바람도 잠잠하다

 

 

  (6) 죽계구곡(竹溪九谷)에 물든 단풍


  비로자나 부처님의 품안에 잠시 머물렀을까?  선두조의 남대장에게서 연신 무전이 날아든다. 갈길을 서둘러라는 메시지다. 고치령까지 가는 길의 반이 조금 못미치는 거리를 2시간 30분만에 달려 왔으니 6시간 남짓하면 고치령에 도착할 것같은데 ....... 왜 이리 서두를까? 조급히 재촉하시면 우리 그냥 국망봉에서 초암사로 하산할거유 !!!!!

 

 비로봉에서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대간길도 걷기에 편안하다. 고산지대에 늦게 핀 하얀 구절초를 가끔씩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능선길을 바람처럼 구름처럼 걷는다. 유명한 소백산의 바람이 오늘은 잠잠하다. 소백산 열번 산행에 한두번 만나기 어려운 [바람고요]라고나 할까?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르고 ......

 

 국망봉이 가까워 온다. 저 발아래 초암사 계곡을 내려다 본다. 초암사 아래에는 유명한 죽계구곡(竹溪九谷)이 이어진다. 멀리서 보아도 산 정상부와 달리 계곡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후미에서 잰걸음으로 걷고 있을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내가 비로봉을 거쳐 저 초암사 계곡으로 잘 하산해야 할텐데 ....... 하산길에 초암사 붉은 단풍잎 떨어진 계곡에 발이라도 담그면 더할나위 없는 호강일거고.

 

        

                         초암사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에서(일반 산행팀의 아내모습)

 

 학창시절 그저 시험공부에 쫓겨 달달 외웠던 고려후기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대표작이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竹溪別曲)이요, 그 무대가 바로 저기 죽계구곡이라니 .......  대간 마루금 걷기를 잠시 접고 아내를 기다렸다가 함께 초암사로 하산할까? 유혹이 내 마음에 단풍처럼 빨갛게 물든다. 그 순간 날아든 선두조의 무전, "국망봉에 막걸리 대기하고 있으니, 달려서 오라"고 ..... 이것은 사과보다 더 빨간 유혹이다. 국망봉으로 달릴 수밖에 ......

 

 

                      소백산 밝아오고 비늘구름 아른아른/

                      동산의 좋은 시절/

                      꽃은 흐드러지게 그대 위해 피었네/

                      버들 그늘 골짜기에/

                      서둘러 다시 오기 기다리네/

                      난간에 홀로 기대어 꾀꼬리 소리/

                      아아 한 떨기 푸른 구름/

                      끊임없이 드리웠네’

                                                              - 안축의 ‘죽계별곡’ 제4장 중에서

 

 

  (7) 국망봉을 넘어 고치령으로

 

 국망봉(1421m)은 기암괴석이 뭉쳐있는 형상이 특이하다. 선두그룹이 1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다. 죽령에서 3시간 남짓 걸렸으니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린 셈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막걸리 한통을 허공에 날리고 주향(酒香)만 풍기면서 앉아있으니, 우리는 그저 푸른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정호 형, 다음에는 막걸리를 샴페인으로 착각말고 부디 살금살금, 조심스레 막걸리통을 여시길......

 

           

                                       국망봉 암봉에 선 선두조와 사진 찍는 정산

 

 선두를 먼저 보내고 국망봉에서 점심을 먹고가기로 한다. 해가 중천에 떴으니 이제 겨우 정오다. 산에서 먹는 밥은 언제 먹어도 꿀맛이다. 얼마 전부터 팥을 넣은 찰밥에 김치, 김으로 단촐하게 도시락을 준비해 다니는데, 이것이 가장 먹기좋고 내 체질에도 맞아 산에서 먹는 점심이 그저 즐겁다. 

 

 식사후 반주로 정상주 한잔을 나눠 마시고 동남쪽 계곡을 살핀다. 그기도 단풍이 한창이다. 저 어느 계곡에 성혈사(聖穴寺)가 있을텐데, 그 나한전(羅漢殿)의 꽃살 창호를 한 번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 정산을 꼬드겨 함께 오지여행이라도 하는 날엔, 그의 전문가다운 해설과 함께 어칸(御門)창호의 신비로운 조각을 만져보고 싶다. 연못 속을 노니는 물고기와 게, 기러기가 절간의 창호에 새겨져 있다니 ...... 

 

 다시 출발이다.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있는 상월봉(1394)을 지난다. 잠시 늦은맥이 고개로 내려섰다가 신선봉 갈림길이 있는 1272봉을 오른다. 신선봉을 따라 하산하면 천태종의 본산 구인사가 있다. 작년 여름 그기를 울트라복으로 통과했던 이들의 얼굴 빨개진 스토리는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 남대장님, 저는 이번에 반바지라도 걸쳤습니다. ㅎㅎㅎ .......

 

         

                                      상월봉을 향해 걷는 대간돌이

 

 이제부터는 해발 1000m 전후의 봉우리들이 특별한 높낮이 없이 이어진다. 그 능선에는 참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흙길에 나딩구는 낙엽은 걷기에 더할나위없이 좋다. 양탄자가 따로 없다. 평지는 빠른 걸음으로, 약간 오르막은 어김없이 달려 오른다. 이 보다 더 좋은 크로스컨츄리 코스가 어디에 또 있을까?

 

 연화동으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니 마당치가 눈앞에 나타난다. 후미를 기다려 1032봉을 올랐다가 잠시 내리막길을 달리나 했더니 고치령의 장승이 우리를 반긴다. 지은지 얼마 안되 보이는 산신각과 함께 ...... 여기에 단종과 금성대군의 회한어린 사연이 묻어 있을 줄이야 ...... 오늘 대간 길은 여기로 끝이다. 24Km, 6시간 54분 !!!!!  당일산행으로 가장 먼 거리를, 가장 짧은 시간에 끝냈으니 체력이 좋아진 것일까? 아니면 아내 말처럼 시험문제가 쉬운 것이었을까?

 

 

(8) 양백지간(兩白之間), 고치령

 

 고치령에 내려서 단양쪽으로  100여m 걸으니 찬물샘이 있다. 물맛이 제법이다. 대간의 고개마루에서 마시는 물맛은 언제나 폐부를 시원하게 해준다. 영주쪽으로 하산하기 위해 다시 고치령으로 돌아온다. 그 정상(770m)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영주쪽으로는 제법 가파른 경사의 숲길이 아스팔트 포장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고치령은 태백과 소백이 만나고, 둘로 나뉘어지는 소위 양백지간(兩白之間)이다. 정상에 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을 함께 모신 산신각이 있다. 두 산신을 함께 모신 것은 바로 고치령이 태백산 줄기가 끝나고 소백산이 이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이 산신각에는 단종애사의 슬픈 사연이 묻어있다. 정산에게 사진 한 컷 부탁했는데, 그의 프로다운 솜씨가 나올지 .......

         

                                                    고치령의 장승들

 

 고치령 산신각에 모셔진 두 산신이 바로 단종 임금과 금성대군이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됐을 당시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은 영주 순흥도호부 부사와 함께 여기 고치령을 넘나들며 단종 복위를 꽤하다 실패해 저 아래 영주 순흥 땅에 위리안치되고만다. 단종은 태백산신이 되고, 금성대군은 소백산신이 되고 ......

 

 단종복위 실패의 비극이 애틋하기만 한 고치령은 이제 번잡한 세상사를 잊고 숲속의 고요를 차지한 채 오지의 오솔길로 남아있다. 노랗게 단풍이 물든 잎깔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떨어진다. 오솔길을 걷는다. 고개마루에서 부는 바람이 세욕에 젖은 귀를 씻어주고, 나무들이 뿜어내는 싱싱한 피톤치드로 가슴을 적시며 숲길을 걷는다.

 

 빨리 하산하라는 선두조의 무전이 하도 성가셔서 못이기는체하고 간간이 산간을 드나드는 4륜구동 차에 잠시 몸을 실으니 연화동 마을입구의 햇사과가 반겨준다. 이래저래 늦가을 고치령의 풍광은 참 아름답다. 잠시 계곡에 발담그니 세상사 시름이 개울물에 씻겨간다.

 

 

(9) 연화동에서 다시 사람사는 마을로

 

 흐르는 물소리가 좋아 개울가에 앉으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맑은 물속에 내 모습도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같다. 스스로의 얼굴에 자신이 없는 것일까? 오래 머물기가 민망하다. 물속에 잠긴 맨발이 자꾸만 부끄럽다고 하는 것같다. 이렇게 연화동 마을 입구의 계곡에서 한참을 보낸다. 맑은 여울이 세상으로 나아가며 재잘거린다. 졸졸졸졸.....

 연화동 입구만 보아도 첫눈에 연화동은 세상과 인연을 멀리한 사람들의 땅으로 보인다. 높은 산이 첩첩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고, 머리 위에 뚫린 하늘은 손바닥만한게 아득하기만하다. 저 정도면 외딴 집처럼 흩어진 마을길은 우거진 풀섶에 잠겼으리라. 

 

 더덕을 캐다가 늦은 후미의 성호님이 도착하자, 사람사는 마을을 찾아 연화동 입구를 떠난다. 잠시 연화동의 품에 안겼다가 사람사는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 대미산 산행에서 캐었던  더덕으로 담근 더덕주가 잘 익었으니, 초암사 입구로 하산하는 일반산행팀을 만나 더덕향에 취해봐야지 ......

 

        

                            초암사 입구에서 즐기는 하산주, 더덕향이 그윽하다


 그의 외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남조선 천지에서 시(詩) 제일 잘 짓는 새끼" 라는 안도현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 어떻게 다가서는지 생각하며, 소수서원을 지나고 청다리를 건너 초암사로 향한다. 아마 10년이내에 안도현의 시가 교과서에 등장할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고 이렇게
                   나란히 떠나가리
                   서로 그리워하는 만큼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는 우리
                   늘 이름 부르며 살아가리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날까지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10) 영주문화권을 되새기며

 

 소백산과 태백산을 잇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의 남쪽 자락은 독특한 영주문화권이 형성돼 오늘날 수많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곳이다.

 

 6세기 말부터 신라 땅이 된 이곳은 유난히 불교가 융성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와 비로사, 성혈사, 희방사 등의 절집들이 번창한 불국토였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들어서는 우리나라 첫 사립교육기관인 소수서원을 비롯한 이산서원, 구호서원 등 무려 스무 개의 서원이 이곳에 있었다. 우리나라 유교 문화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곳이 소수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고려시대 인물 안향(安珦, 1243∼1306)이 젊어서 공부하던 곳인 백운동에 영정을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이곳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유생을 가르쳤다. 그 후 퇴계 이황이 명종 5년(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해 조정에 서원의 개명과 사액을 건의해 소수서원이 된다.

소백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그 아래 영주문화가 꽃핀다

 

 안향선생의 후손이며 관동별곡을 쓴 안축은 소백산이 올려다보이는 소백산 자락의 죽계천에서 유명한 죽계별곡을 지었는가 하면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죽계천에 세운 주세붕도 소백산을 올려다보며 소백산의 기상을 노래하기도 해 영주문화가 소백산에서부터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소수서원 앞을 지나가는 도로를 따라 부석사 쪽으로 조금만 가면 작은 다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어릴적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에 울음을 터뜨리게 했던 바로 그 다리의 유래가 되는 청다리다. 다리 이름은 '제월교' 라고 씌어져 있건만 이곳 사람들은 청다리라 부른다. 청다리에 얽힌 사연이 있다.

 

 소수서원에 공부하러 온 젊은 유생들이 넘치는 열정을 그의 여종이나 마을 처녀와의 정분으로 풀었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 어떤 유생은 처녀와 짜고 일부러 아기를 다리 밑에 버리라 해놓고 자기가 우연히 지나가다 주운 것처럼 해서 집으로 데려가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죽령옛길도 오랜 세월의 역사가 묻어나는 곳이다. 이제 그 옛고개는 새로 열린 터널에 자리를 내주고 오가는 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구절양장이 직선터널로 탈바꿈한 새 죽령길(죽령터널)을 지난다. 아내에게 정건우 시인이 읊은 [죽령터널]이라는 시를 들려주다가 깜빡 잠이드니 버스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잘도 달리고 있다. 우리네 삶도 저렇게 쭉쭉 뻗어갔으면 .........

 

그대 배알도

기실은 구불구불 하였겠으나

이렇게

쪽바로 편 길이가 십리도 넘었다니

몽창 들어낸 그 속은 이제

얼마나 가벼울거냐

 

다 비우고 나니

허망하게 어두워진 속내를

스스로 불 밝힌 그 가슴은

또 얼마나 자유로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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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산행기록]

 

 1. 백두대간 25차 참가자

 

   (1) 대간팀 : 15명

 ...... 권오언, 김길원, 김성호, 남시탁, 박홍구, 박종엽, 박희용, 손영자, 송남실, 송영기, 신정호, 이성원, 양철희, 장재업, 정제용

 

   (2) 산행팀 :15명

 ...... 김기순, 김영이, 변주희, 유난희, 유난희 가족(아들,딸,동생), 이기순님 부부(이기순,박재상),  정선자,  지용, 진성박님 부부(진성박,탁미선희), 한흥기님 부부 (한흥기. 한흥기 부인)

 

 

 2. 구간별 산행기록(대간팀 중간그룹 기준)

 

    04:15 대치동 출발

    07:55 죽령 도착 

    08:06 죽령 출발

    09:35 제 2연화봉

    10:35 비로봉 도착

    10:55 비로봉 출발

    11:45 국망봉 도착, 중식

    12:05 국망봉 출발

    15:00 고치령 도착, 휴식(찬물샘및 산신각)

    15:15 고치령 출발

    15:25 연화동 입구 도착, 휴식

    16:00 연화동 출발

    16:20 초암사 입구 주차장, 하산주및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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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죽령(竹嶺)은? ***


 죽령은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고개인 하늘재보다  2년 늦은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건설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과 백제의 서쪽을 공략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건설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는 조령과 함께 영남지방의 양반과 관료들의 행차길로 이용되었고,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로도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죽령 아래로는 중앙선 철도가 희방사역과 죽령역을 연결한다. 이 구간에는 교과서에도 등장하던 길이가 4.5㎞에 달하는 루프선(loop rail) 터널이 있다. 루프선은 표고차가 큰 구간에 선로를 건설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알프스에서 산악선로로 채택된 것이 시초다. 최근에 중앙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국내 최장 도로터널인 죽령터널(4.52Km)이 뚫여 내륙 깊숙히 숨어있던 영주 문화권이 한결 가까이 느껴지고 있다.

 

 죽령을 보듬고 있는 소백산은 북쪽으로 남한강의 원류를 이루며 단양팔경을 빚어냈고 남쪽으로는 죽계천, 내성천, 남원천 등으로 물을 흘려보내 풍기, 순안 등 영주 땅을 적시게 한 뒤 낙동강이 된다.

 

 

[죽계구곡] -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하나하나 계곡의 이름을 붙였다고 함

 

  죽계구곡은 상류 쪽에서부터 하류 쪽으로 차례로 제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 翠寒臺), 제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제3곡은 백자담(栢子潭), 제4곡 이화동(梨花洞), 제5곡 목욕담(沐浴潭), 제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제7곡 용추(龍湫), 제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제9곡 중봉합류(中峰合流)이다.

 

  실제 안내판은 제1곡 금당반석(金堂盤石), 제2곡 청운대(靑雲臺), 제4곡 용추비폭(龍湫飛瀑), 제5곡 목욕담(沐浴潭), 제9곡 이화동(梨花洞)으로 위와 이름이 다르게  설치되어 있고 제3곡, 제6곡, 제7곡, 제8곡은 안내판이 없다.



[관동별곡 關東別曲

] - 2편의 관동별곡이 있음


 1. 고려 시대에, 안축(安軸)이 지은 경기체가. [관동 지방의 경치를 읊은 내용.]
 2. 조선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기행 가사. [금강산과 동해 일대의 경치를 읊은 내용.]


                江湖애 病이 깁퍼 竹林의 누엇더니 /

                關東 八百里에 方面을 맛디시니 /

                어와 聖恩이야 가디록 罔極하다

                   -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이 되어, 은거지인 창평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 임금님께서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이렇게 시작하는 조선 선조때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서사(序詞)를 아직 잊지 않았음은  물론일테고 .........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45세 때인 선조 13년(1580)에 강원도 관찰사(관선 도시사)를 제수받고 현지로 부임하는 과정을 이처럼 낭만적으로 노래했다.

 송강이 밟은 길은 사실 그보다 250년 전인 고려 충숙왕 17년(1330),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밟은 여정과 거의 겹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안축은 당시 고려 서울인 개경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