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백두대간

(27) 황장산에서 보내는 편지

月波 2005. 11. 21. 23:41

 

 

[백두대간 27차] : 황장산에서 보내는 편지

 

 

1. 산행 개요

(1) 산행일시 : 2005년  11월  20일(일) 당일산행
(2) 산행구간 : (안생달)-작은 차갓재-황장산-폐백이재-벌재-문봉재-저수령

(3) 산행거리 : 도상 14 Km, 실측 14.14 km(포항 셀파)
(4) 산행시간 : 총 6시간(진입 20분, 대간 5시간 40분-휴식 50분 포함)

(5) 참가대원 : 강마클의 9명 대간돌이들

                 -  권오언, 남시탁, 박희용, 송영기, 이성원, 장재업, 정제용, 지용, 홍명기

 

 

2. 산행 후기 - 황장산에서 보내는 편지

 

H형,

오늘은 백두대간 황장산을 다녀왔습니다. 봄내음을 즐기며 산길을 걷던 일이 엊그제같은데, 나무들이 나신(裸身)을 드러낸 산은 이미 겨울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대간 능선을 걸으며  유난히 겨울산행을 즐기던 형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산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을 정리해 이렇게 형에게 글을 씁니다. 

 

H형,

모두 잠들어 있을 새벽 네시, 푸른 아침을 맞이하러 문경의 차갓재로 향합니다. 종종 형과 읊조렸던대로 "푸른 바람 불어오는데 나 이제 잠들면 그 푸른 아침 누가 맞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차갓재에는 지난 백두대간 24차(9월10일-11일) 산행의 아쉬움과 뜻밖의 즐거움이 함께 묻어있는 곳입니다.  

 

하늘재를 떠나 포암산, 대미산을 밤새도록 걸어 작은 차갓재에 도착했으나, 기대했던 식수를 구하지 못해 황장산 넘는 일을 포기하고 중도에 하산해야 했던 아픔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하산길에 들린 안생달 마을에서의 마음 포근했던 시간은 아직도 비밀의 방에 묻어두고 가끔씩 꺼내보곤합니다.

 

황장산을 포기한 대신 안생달 마을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을 얻었으니, 세상 일이란 늘 이렇게 공평한가 봅니다. 그래서 매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좀 더 넓고 길게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H형,

오늘의 대간은 그 때 끝내지 못했던 숙제를 하러 작은 차갓재-황장산-벌재-저수령으로 갑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 때 챙기지 못했던 안생달의 민속특주를 구해 형과 함께 건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백두대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안생달의 청정수로 빚은 민속주 맛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산행들머리에서 신발끈을 졸라맵니다. 늘 그러했듯이 산에 나 자신을 묶는 것이지요. 황장산의 암괴(岩塊)가 그 위세를 뽐내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차갓재로 향합니다. 황장산의 암괴는 그 뿌리부터 바위덩어리로 보입니다. 속리산, 대야산의 암산(岩山)이 포암산을 지나며 육산(肉山)으로 바뀌었는데, 다시 암릉, 골산(骨山)의 시작인가싶어 잠시 주춤합니다. 그러나, 육산을 걷는 것에 비해 몸이야 힘들겠지만, 어찌 암릉을 오르내리는 재미를 포기하겠습니까? 

 

H형,

묏등바위를 오르는데 아침햇살이 찬란히 비칩니다. 밧줄타는 것을 보류하고 디카에 그 황홀한 모습을 담습니다. 눈으로, 마음으로만 담아도 넉넉한데 디카에 그 모습을 자꾸담으려는 마음을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이런 욕심마져 버리기에는 아직 저는 중생입니다.

 

다시 황장산(黃腸山)을 향해 칼날같은 바위능선을 오릅니다. 버티고 있는 암릉이 대단한 기품을 갖고 있습니다. 잠시 이런 생각에 잠깁니다. "이 암릉구간을 지나면 오늘 산행의 종착지 저수령까지는 육산(肉山)으로 이어지기에 한결 가벼운 길일거다. 더구나 발아래 넉넉히 쌓여있을 낙엽이 발걸음을 편하게 할거고 ......."  대간을 하면서 편안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가 아닐런지요?  자신을 다독거립니다. 그러는 사이 황장산 정상에 오릅니다.

 

황장재를 지나며 잘 생긴 소나무들을 만납니다. 얼핏보니 몇 년 전 금강산에서 보았던  적송(赤松)과도 닮았는데,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른답니다. 나무 속이 노랗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황장목(黃腸木)이랍니다. 나이테가 조밀하고 송진 함유량이 많아 단단하기가 이를데 없는 최상품 소나무랍니다. 궁궐을 짓거나 왕실의 관곽재로 쓰였다고 하니 소나무의 제왕인 셈이죠.

 

그러나 그 황장목은 가물에 콩나듯 뒤엄뛰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봉산(封山)을 하고 황장목을 관리하던 시절에는 숲을 가득 메웠겠지요. 안타까움을 안고 길을 걸으니 치마바위 전망대가 나타납니다. 절벽위에 우뚝 서있는 황장목을 배경으로 갖은 자세를 취하며 사진도 찍고, 간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오늘 산행이 다른 어느 대간보다 멋있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읍니다. 아마 지난 24차 산행의 아픔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H형,

나무의 일생을 생각해봅니다.

나무마다 제각기 다른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나무하나 쓸모없는 나무가 없습니다. 살아서는 숲을 이루어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만들어주고, 죽어서는 동량(棟粱)이 되기도 하고, 서까래로 쓰이거나 땔감이 되기도 하지요. 심지어 풍진 세월속에 몸이 바스라져서 한줌 나무부스러기가 되어서도 벌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합니다.

 

다시 나무의 꿈을 생각해봅니다.

살아서 직립(直立)의 나무였을 때는 동량(棟粱)이 되기보다 아름다운 마루가 되어 널직히 드러눕거나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나무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그 얘기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을 즈음에는 그저 먼지 잘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고 싶다던 나무의 꿈 말입니다.

 

궁궐과 고찰의 동량(棟粱)이 되어 죽어서도 천년의 영화를 이어가거나, 관으로 왕과 함께 땅에 묻히는 영광을 누리는 화려한 꿈에 비해서는 훨씬 소박하고 정감있는 꿈이 아닙니까? 벌써 제 아비 키만큼이나 자라버린 내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갖게해야할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H형,

얼마 전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의 장례식에서 황장목으로 만든 전통적인 목관 대신에 향나무로 만든 관을 사용했다하여 언론에 오르내린 일이 기억납니다. 문화재청이 오래 전(1900년대초)에 미리 준비되어있던 황세손의 황장목 관을 박물관에 영구보존케하고, 대신 상업용 관인 향나무관을 쓰게했다고 비난이 있었습니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세종실록(1440년)에도 ‘천자의 곽은 황장(黃腸)으로 속을 하는데, 황장은 소나무의 속고갱이라 쉽게 썩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황장목으로 만든 관이 박물관에 남아야 하는지, 원래 주인인 황세손과 함께 땅에 묻혀야 하는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다만 나무의 꿈만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나무의 꿈 ........ 형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늘향해 쭉쭉 뻗은 황장목

   

 

H형,

벌재로 내려서는 길은 45도 이상의 가파른 내리막입니다. 경방기간이라 걱정을 하며 벌재에 닿았으나 아무도 우리의 길을 막는 사람이 없습니다. 10여분 오르막을 오르다가 어느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이른 점심을 먹습니다. 맛난 음식들이 배낭에서 쏟아져 나오고 따뜻한 햇살아래 한동안 넉넉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랫만에 대간길에서 맛보는 여유로움이었습니다.

 

다시 숨을 헐떡거리며 문복대로 향해 뜀박질을 했습니다. 산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묘한 눈초리를 보내지만 아랑곳하지않고 오르막을 달렸습니다. 아직 실력이 함께 산행하는 고수들에게 못미치지만 심장이 멎을 것같은 느낌을 안은채 산길을 달려오르는 일에 점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형이 늘 말씀하시던대로 세상살이도 이렇게 빡세게 하려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도 여러 개의 고개를 지나 대간길을 이었습니다. 작은 차갓재, 황장재, 폐백이재, 벌재, 들목재, 문봉재, 저수재 ...... 오늘 걸어온 고개들입니다.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없는 고개들입니다. 그 고갯길을 걸으며 저에게 고개는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고개 너머"라는 말만 들으도 가슴이 설레이곤 했습니다. 앞산의 고개너머에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었고, 남쪽 고개너머에는 도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너머에는 항상 새로운 세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작로가 나기 전 고갯길을 나설때 힘들어 하던 나에게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고개만 넘으면 돼."라고. 그러면 지친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호기심을 채워줄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쉽게 고개를 넘을 수 있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H형,

백두대간을 하면서 고개의 의미를 새삼 다시 새기게 되었습니다. 고개란 높은 곳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만 않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고개라고 할 때 그 고개는 산을 넘는 길의 높은 곳을 말하지요. 따라서 고개란 가는 길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걷는 대간길은 산능선을 타는 길이라 고개가 그 길에서 항상 낮은 곳입니다.

 

꼭 같은 고개인데 걷는 길에따라 높은 곳이 낮은 곳이 되고,  낮은 곳이 높은 곳이 된다는 얘기이지요. 높은 곳이 가는 길에 따라 높은 곳이 아니요, 낮은 곳 또한 가는 길에에 따라 낮은 곳이 아니더이다. 조금 더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인가요?

 

사실 고개의 본체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데, 이렇게 넘는 길에 따라  높은 곳이 되었다가 낮은 곳이 되었다 합니다. 백두대간을 하면서 새삼 인생의 고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긴 여정에서 부딪치는 고개들도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살아가는 방식이나 마음먹기에 따라 그 인생의 고개도 높은 고개가 되기도하고, 낮은 고개가 되는 것이니까요. 늘 넉넉한 모습으로 삶을 꾸려가는 형의 지혜가 오늘따라 유난히 부럽고 배우고 싶어집니다. 형의 음덕이라도 누릴 수 있게 종종 시간을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H형,

오늘 산행의 종착지는 저수재(850m, 低首嶺)이었습니다. 꼭 6시간만에 산길 14Km를 그다지 힘든줄 모르고 걸었습니다.  저수령의 뜻이 궁금해졌습니다. 흔히들 고개의 경사가 워낙 급하여 지나는 길손들이 절로 고개를 숙여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누구는 이 고개 넘던 왜적들의 목이 댕겅댕겅 떨어져나갔다고 해서 저수령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삶에 비춰 고개이름을 재해석해 봅니다. 세상살이하며 이웃들에게 항시 자기를 낮추고, 머리 숙이며 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이제 겨우 백두대간 남한구간의 중간지점을 지났습니다. 그러니, 방심하거나 교만해지지 말고 낮은 자세로 줄곧 백두대간 길을 걸으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싶기도 합니다.

 

서울로 향하기 앞서 단양의 오래된 술도가에 들러 맛있는 소백산 동동주를 한 통 가져왔습니다. 형과 오랫만에 한 잔 하고 싶습니다. 일행들도 술맛을 보고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아마 다음 산행시에도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술도가에 들리자고 할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오늘따라 더욱 형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늘 건승하시길 빕니다.

 

2005. 11.20.

한티골 다락방에서

월파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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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07:40    안생달(진입)

     08:05    작은차갓재(816m)

     08:45    암릉(묏등바위)

     08:50    황장산(1077m)-원명 작성산(鵲城山)

     09:21    황장재(985m)

     09:32    985봉  

     10:00    치마바위 전망대(20분 휴식)

     10:30    폐백이재

     10:39    전망대

     10:44    928봉

     10:56    공터(헬기장)

     11:01    벌재

     11:15    무덤(휴식, 중식 30분)

     12:27    들목재

     12:37    1020봉

     12:45    문복대(1040m, 문봉재)

     12:57    옥녀봉(1077m)

     13:25    장구재

     13:40    저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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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

백창우,한보리 시 / 유종화 곡 / 유종화, 한보리 노래



누가
깨어있을까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누가 깨어있을까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나 이제 잠들면 나 이제 잠들면

누가 누가 깨어있을까

모두 잠들어있네
푸른 바람 불어오는데
모두 잠들어있네
푸른 바람 불어오는데

이제 잠들면 나마저 잠들면
그 푸른 아침 누가 맞을까
그 푸른 아침 누가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