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람의 산 - 박인식
산이 부른 환청의 메아리 - 김혜경
1
산은, 설악산은, 72년 7월 여름의 설악산은 푸른 빛의 바다로 바람에 몸을 뒤튼다. 김혜경은 연세대 하계 태백산맥종주 등반대의
일원으로 빛 푸른 설악에 들어선다.
첫날 내설악 용대리에 도착하여 몸무게 정도의 짐을 지고 넋빠진 7월의 태양 아래 느릿 백담골로
걸어 들어간다.
첫 장기등반에, 짐이 너무 무겁고, 길은 멀고 또 멀어 하염없다. 친구, 집,거리, 여자 혼자라는 심한 소외감,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픈 감정에 조금은 귀찮고, 나선 것이 약간 후회가 된다.
다음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계속 걸어온 혜경은
너무 힘들어 짜증이 난다. 밥 먹고 설거지하는 것마저 귀찮다. 무거운 짐에 불덩이 태양까지 애를 태우지만 첨벙대고픈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따라
수렴동을 오른다.
그 이튿날은 예정 막영지 한계령까지 못 가고 중청과 대청봉 사이 고갯마루에서 밤을 보낸다. 발아래 깔리는
구름바다에 노을이 물들었다. 더 멀리 동해, 중청에는 초승달.... 대청봉 위로 별, 자신을 몹시 좋아하게 된다. 산에 있지 않은 모든 사람을
동정해본다.
닷새 만에 닿은 한계령의 밤이다. 혜경은 바짝 마른 나무로 모닥불을 짓고, 그 타다 남은 붉은 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저만치 산 속에 버리고 온 자아를, 붙잡아 펴보고 싶도록 가까이 선 기쁨을 느끼며, 한낮의 고생은 이미 잊고, 헤치고 온 길섶에 솟은
풀과 덤불에 그리움을 싣는다. 지나고 나서야 생기는 동경도 품는다.
점봉산, 비가 온다. 땅은 젖고 등짐에서는 구질구질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강한 자아를 느낀다. 그래서 내일도 산에 갈 거란다. 8월에는 집에서 책을 읽고 싶고, 빗방울이 천장을
두들기며연주하는 경쾌한 리듬의 음악이 즐겁다. 침구에 스며드는 ㅜㄱ축함에 뭔가 황홀감까지 느낀다.
점봉산 어느 구석, 덤불을
눕히고 그 위에 잠자리를 편다. 혜경은 늦게까지 밖에서 별을 헨다.
사흘 만에 신물나는 점봉산에서 헤어난다. 심마니의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 그 방안에서 풍겨오는 흙벽 냄새와 밥 짓는 냄새에 옛 내음을 맡은 혜경은 자꾸 어려지고 싶어한다. 땀에 배여 쓰린 얼굴을 쓸며
별을 보며 휘파람을 분다. 아무래도 집 생각이 난다.
화전 마을에서 민박을 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뭉쳐주시던 술밥 같은 맛있는
밥을 오랜만에 먹는다. 아직 사람을 대하는 것이 짐스럽고 괴롭다. 밤이면 혼자 앉아 며칠째 별을 헨다. 온통 괴롭지만 그래도 산을 사는 맛만은
버리지 못한다.
107고지를 넘다가 여러 번 거꾸로 박힌다.
비가 온다. 반갑다. 혜경은 고향에 좀더 가까이 간 것 같다.
(내가 살 곳은 어딘가? 산, 비, 바다, 바람... 약수산, 용봉산 위로 걸쳐진 구름을 밟고 간다. 산, 그 숨결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으로 다가온다. 비가 계속되면 내일은 쫄딱 젖어 운행하겠지... 비 오는 소리가 좋다. 그러나 암만 해도 목마르고 배고프다. 집에 가면
수박, 냉커피, 환타, 우유, 짬뽕, 카레라이스, 통닭....(∞ 에 수렴) 등을 해먹어야겠다.)
예정된 오대산으로 못 가고
주문진 근처의 마을에서 불을 토할것 같은 산을 우러르며 잔다. 산촌 사람들의 마음은 암담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것이 흐뭇하면서도 혜경의 마음
한구석에는 체념 같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는 생각 말자. 남은 방학은 국사를 읽으며 보내자.
주문진으로 식량을 사러
나갔다. 주문진 거리를 보며 혜경은 어릴 적의 평택 서정리를 생각한다. 작은 아이들과 할머니를 보면 먼 그리움이 솟고, 짚신과 잠방이 바지가
보고 싶어진다. 잠시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 자꾸만 몸부림치는 포말이 짖궂은 연인처럼 방파제를 희롱한다. 그 짜릿한 파편이 혜경의 온몸에
뿌려진다. 소금기 머금은 바람은 영원에의 동경을 일러준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웠다. 보름이다. 나뭇잎 새로 작은 달이 기교를
피운다. 멀리 전나무 숲이 꿈처럼 서 있다. 정말 축복받은 인간만이 느낄 행복감에 잠긴다. 이제 산을 떠나고 싶지 않다 대신 달이 간다. 옛
생각을 떠올린다.
(어릴 때 나는 몹시 울었다지. 그래 엄마는 날 데리고 논가에 나가 울었단다. 그때도 지금처럼 개구리가
울었다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며 오늘을 산다.)
앞에 가는 사람 몸에서 풍기는 땀냄새. 이제는 그 산냄새가 오히려 정답다.
점심 후 진고개로 향했다. 환상 같은 초원을 지나자 쉬 밤이다. 구름이 산허리께로 감돌고 안개가 혜경을 홀로 만든다. 그녀는 스스로를
황홀해한다. 안개 싸인 초원에 누워 먼 고향을 그린다. 고향은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늘 그리움만 준다. 산, 바다는 곁에 있어도 내 것일 수는
없다는 거리를 느끼게 한다.
매봉과 대관령을 지났다. 지금까지 온 길이 꿈처럼 아득하다. 대낮엔 지겹기까지 했으나 이젠 내려가고
싶지 않다. 바다와 산이 숨막힐 듯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 안에서 숨쉬면서도 곧 놓쳐버릴 것 같아 혜경은 안타깝다.
등반에
나선 지 한 달째, 닭목재로 향했으나 더위에 모두 나가떨어진다. 내일이면 태백산맥 하반부를 올라오는 산친구들을 만난다. 잠자리를 편다. 학교
교실 창에 하현으로 굽은 달이 빛난다.
드디어 삽다령에 도착, 아래쪽에서 북상해온 대원 전원을 만난다. 등반은 끝났다. 경포대로
갔다. 물을 가지고 다툼하는 해수욕장에서 왠지 혜경은 자꾸만 울고 싶고, 다시 고생하던 산으로 가고 싶어한다. 혼자서 살다 혼자서 죽어가는
산엘!
조금은 죽음을 그려본다. 모든 감정으로부터 영원한 해방을.
2
김혜경은 그렇게 산과의 첫 긴 만남을
끝냈다. 그녀는 1953년 평택에서 목축업을 하는 가정의 맏딸로 태어났다. 경기여중고를 거쳐 72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산악부에
들어갔다.
산에 특별한 의식이나 부담감 없이, 산에 다니며 호연지기나 길러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산악부에 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산은 그녀에게 별다른 무엇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매 주말 암벽등반은 그녀에게 새로운 산세계를 열어놓았다. 그 산은
감당하기 어려운 새 물결로 그녀에 와닿았고, 뛰어나게 영리했던 그녀는 산의 아름다움에 대비되는 인간의 초라한 위치를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 바위에서 온몸으로 산을 느끼다가 파김치가 된 몸을 눕히며, 언제나 동생에게 음악을 틀어달라며, 그 음악 속에서 다시 산과 바위를 오르던
김혜경은 72년 가을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간다. 구면이 된 산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맞아줄까를 생각하며 전날 밤 잠 못 이루던 혜경은 그
가을에 설악산과의 두 번째 만남을 마친다. 이때쯤 그녀는 '산은 바로 나이며 또 님이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산에 빠져든다.
3
늦 가을. 그녀는 산악부 동기들과 지리산을 다녀온다. 그리고 매 주말 산행을 계속하며 혼자서도 산에 갈 정도가 된다. 그 겨울 크리스마스
이튿날 혼자서 도봉연봉을 넘은 감동을 오래 잊지 못한다.
(누구라도 이제는 내게서 산을 감추려 하지 못한다. 어떤 쉬는 날 하루가
온통 내 것일 때 산에 갈 거다. 그리고 돈이 좀 생기고 더 긴 시간이 허락되면 마산엘, 언젠가 본 작은 도시처럼 황량하고 흙탕물 튀기는 거리를
쏘다녀보겠다.....)
입학 후 멍한 시간은 제 혼자만 달아나고 설악과 지리산만 아직도 혜경 곁에 남아 있다.
학교생활은
전혀 내용이 없었다.
우린 정말 이대로 살아도 좋은 건가. 순수한 정열을 빼놓고 우리는 젊다고 생각해도 될 것인가. 대학은
멍청하다. 휴교령 해제 후의 학교 부근 다방은 제록스 루미다. 교수는 그것으로 학점을 주고 사회는 그 학점을 한 인간 위에 입힌다. 절대로
벗겨지지 않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한마디 뱉으면 그때마다 따져지는 계산. 바보로 살고
싶다. 모든 일에서 자기의 의지를 빼낸 바보같이.
갑자기 생각난다. 산이! 설악은 품이 크고 오연하며 자칫 거만한 데 반해
지리산은 품이 크고 아늑했다. 그 여유 있게 주름진 산등성이는 바다처럼 넓어 어머니의 모정을 느끼게 했다. 그 지리산 세석산장에서 허우천 노인을
만났지.
(운무에 둘러싸여 산장은 뵈지 않았지.
성급한 바람, 네겐 인간이 우스웠나?
꿈꾸듯 비틀대던 발길에 인적이
채인다.
공기를 찢을 듯이 몰아치는 바람아.
세월 따라 패어지 주름아.
체념처럼 피어난 수염이 진정 네 자유만큼이나
부러웠다.
체념을 노래ㅏ고 싶었다.
맘이 내키면 노래해도 좋다.
산에서의 폭풍, 앞이 뵈지 않을 만큼의 비구름 속, 간신히
발견한 산장,
잠결에 들리던 바람의 울부짖음, 초로의 산사람, 그가 가꾸는 산장.
바람에 내동댕이쳐진 자신.)
하얀
수염이 턱 아랫부분을 덮었고, 작은 수염이 온 얼굴에 물결처럼 퍼진 허우천 노인에게서 혜경은 산이 키운 사람, 평생을 산에 들어 산에 사는
사람ㅇ, 그리고 산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영원한 산사람을 본다.
혜경에게는 설악이 반하고 싶도록 젊고 이상적인 남자상이다. 그래서 언제나
설악은 강한 끌림으로 혜경의 머리에 떠오른다.
4
73년 1월 연세대 용아장성 동계등반대의 일원으로, 헤경은 온산이 흰빛
덩어리로 번쩍이는 설악에 들어선다.
남교리에 도착, 식량 박스를 지고, 바람의 숨소리마저 죽어 더욱 하얀 십이선녀탕 계곡을 지워질
듯 걸어 들어간다. 사흘 내리 내린 눈무게에 처진 나뭇가지가 가엾은 생각에 눈을 떨구어주기도 하며 혜경은, 지원조에 섞여 연일 식량 박스를
나른다. 이름만 불러도 그리움이 솟는 대승령, 흑선동 계곡을 거쳐 네 번째 캠프(C4)가 설치된 수렴동 대피소까지 운행한다. 전신에
피로가몰려든다. 산? 혜경은 알 수가 없다. 침묵이 그저 즐겁다.
보름 만에 용아장성에 붙었다. 잦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변덕이
흥미롭다. 그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 흥미롭듯. 용아장성 등반이 끝나는 날. 수렴동 대피소에 등반대원 전원이 모여, 모닥불을 둘러싸고 웅성거린다.
다시 얻을 수 없는 젊음으로 타오르는 불 앞에서 혜경은 무엇을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타오르는 버너 불이 사그라져도 동경하는
혜경의 마음은 결코 작아지지 않는다. 별, 별자리를 보며 자연을, 무한대의 순수를, 순수한 정열을 꿈꾼다. 그러나 결국은 내일 집에 가야 한다.
산, 눈, 겨울, 별, 침묵, 그리고 버너 소리를 남겨둔 채 마음을 다진다.
(다음에는 이 설악엘 꼭 혼자 온다. 꼭 오겠다.)
5
세 번째의 설악에서 돌아와 남은 겨울을 보내며 혜경은 산과 가장 내밀한 관계를 다진다. 책을 읽으며, 점점 더 굵게
결정되어지는 내면의 산을 닦아 햇살에 비춰보며 그녀는 겨울을 보낸다. 허나 항상 전하고 싶은 바를 다 전하지 못할 인간관계의 한계를 감득한다.
똑같은 명제에 대해서 사고의 전개방식도 관심도 너무 다르다. 얘기는 언제나 피상적이고, 문제의 핵심은 건드리지 못한다.
(밤에
별을 보고 산을 생각한다. 산에서 살고 싶다. 지금은 공부를 한다. 여기엔 눈도 낭만도 없고, 소음만 가득 찼다. 정녕 겨울은 이대로
가버릴건가. 매운 바람이 있으면 외로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2월의 어느 일요일, 강촌 구곡폭포 빙벽등반을 마치고 저녁 귀로에
논두렁에 서니 잘라낸 벼 그루터기 사이로 기억이 솟는다. 얘기도 많았다. 모두모두 변색되어 아프다. 밤은 도심의 구석이나 들길 가운데서나 어디든
신비롭다.)
봄이 온다. 겨울은 끝내 순진하기만 하다. 꽃시샘하는 찬바람을 마구 흩트려놓아도 돌고 도는 절기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산과 대기에는 벌써 생기가 돈다. 시간마다 의미와 가치를 찾지는 말자. 때로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혜경은 산 바깥에 사는
자신을 그렇게 달랜다.
(이제 생각하니 설악은 눈 덮인 모습이 좋았다. 언제나처럼 산은 내려보내면서부터 부르기 시작한다. 어쩌라는
건지, 싱싱하고 푸르게 살자. 찬바람은 그래서 좋다. 잊었던 영혼과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도봉산, 선인봉 바위에 붙었다. 암벽은 자꾸만
희미해지고 때론 잊혀진 자신을 돌려주기도 한다. 너도 인간이라고, 순간도 감정없이는 보낼 수 없다고 알려준다. 온몸이 나른하다. 녹을 것만
같다. 곧 개강이다. 우스운 표현이 되겠지만, 생각하면 내 삶에는 설악만이 존재한다.
산을 제외한 내 생활은 환상이다. 대화도 필요없다.
이해도 귀찮다. 어쩌면 철저한 도피의 대상이 산이기도 하다. 도피는 안 되는 건가.)
인간에게 궁극적인 길은 자연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이다. 타인을 설복하여 자신의 생각에 동의케 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솔직히 혜경은 설복할 자신이 없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설복당하기에는 늦은 것이다. 설복당할 시간이 없다. 바삐 죽음을 향해 달릴 뿐. 다방, 때로 깊숙한 기분을 느끼게도 하는 그곳에서 자신의 세계로
깊숙이 빠진 사람을 보며 혜경은 서로 다른 체험을 나눠 갖기란 애초에 헛된 짓임을 안다.
(난 산을 그리고 있는 거다. 나의 모든
신경은 산을 느끼기 위해 있는 거다. 그래서 하루가 간다. 해가 간다.)
바람이 꽃을 시샘하는 동안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관둔
혜경은 기막히게 자유스럽다. 설악 덕분이다.
(그가 날 부르려고 준비하는 거다. 내게서 산과, 산친구를 제외하면 세상과 시간은
공허해진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아직도 난 너그러워야 한다. 좀더 이해를, 좀더 가까운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녀의 생활은
'일요일 기다림"의 연속이다. 산과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때로 산 속을 무작정 떠돌고 싶다. 눈앞에는 달려가고 싶은 설악의 얼굴이 어린다.
공룡능선! 어느 능선의 이름이 이만큼 어울리랴. 공룡, 중생대, 태고, 원시, 돌아감..........., 그렇다. 공룡능선은 혜경이 나온
곳이었고 돌아갈 곳이다. 죽은 듯 엎디어 있다가 천둥소리 더불어 불끈 일어설 설악의 등줄기, 공룡능선은 마지막날 코끼리가 찾아가는 장지에 다름
아니다.
공부는 당분간 산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도구다. 성적이 나쁘면 혜경은 침체될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산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결국 산을 도피처로 만들어버릴 게다. 그렇게는 안 된다. 산을 도피처로 전락시필 수는 없다. 그래서 공부한다.
순간의
여유도 없이, 무언가 급히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강박관념이나 시험은 늘 혜경을 못라게 군다. 의사란 바라는 생활방법이긴 하다. 조그만 육체의
아픔이긴 하나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생명에의 구체적인 접근을 가능케 하지 않는가.
(정신의학을 해볼 거다. 심리학을 택하지 않은 후회가 따르긴 하지만, 고달파지면서라도 결국은 다른 이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난
비록 자기애착에서이지만 즐거워질 수 있다. 그런 추상적인 얘기가 기껍다. 능력 이전에 흥미의 문제다.
라디오 심야프로에서 진행자가 막
흥분한다. 무언지 용기가 생긴다.
공룡능선에 꼭 간다. 나 혼자 힘으로 달려보는 거다. 고요에 둘러싸인 혼자만의 누리에서, 판초 하나만을
의지하여 두려움과 어둠과 추위와 맞부닥쳐보는 거다. 어느 하룻밤, 그 밤의 넘어섬을 겪어보자. 한낮, 공룡능선상에 하얗게 바래져 초라해진,
그래서 더욱 깨끗하고 애틋한 에델바이스를 만나야겠다.)
4월 중순, 혜경은 드디어 혼자서 설악에 든다. 공룡능선을, 그러나 그녀는
또 바라만 본다. 네 번째 바라보기만 하다 돌아온다.
6
언제나 현실은 꿈보다 가난하다. 밖에 나서니 밤이 문득 반갑다.
산에 바친 일요일의 희생을 조르던 남자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헤어져버렸고, 지금은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남들은 혜경의 산을
그처럼 비웃는지, 가끔 산이 자신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만 해도 그렇다.
바위에 부딪혀 얼굴에 대자 모양의
금이 갔다. 그래서 자꾸 자신을 잃어간다면 얼마간은 역설이리라. 다른 이에게 오만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꽃이 진다. 그래서 시간이
간다.
포르말린에 굳어진 붕어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핀셋으로 내장을 뒤적이다 하학 종소리와 함께 해방된 혜경은, 돌바람에 머리칼을
찢기며 백양로를 내려오다 신이 너무 자비롭다는 것을 갑자기 느껴버린다.
그래서 신에서 벗어난다.
말은 거추장스럽다. 악을 쓰고
목이 쉴 때까지 지껄여도, 할말은 언제나 저 깊은 구석에 미울 만큼 다소곳이 개켜져 있다. 침묵으로 마음을 나눌 수는 없을까. 그래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는다.
(네 몸을 괴롭혀라. 산으로 가거라. 어느 정도의 피로와 함께 만족이 올거다.
[인간의 대지]를 읽는다.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므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산이 정말 그랬다. 내겐 산이 대지다.
저녁
무렵은 늘 바람이 있다. 헌데 어느덧 아침이다. 엿새가 그런 식으로 가버리고 나면 일요일의 산이 온다. 그날이 나의 날이다. 산에서 침묵을,
인내의 기술도 배운다. 그리고 우정도 나눈다.
친구여, 산은 오르지 않아도 된다. 어디에고 있을 테니까. 때로 대지가, 그리고
보고픈 친구가 산이다.)
산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 혜경은 스스로 가소로와진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그 얘길 안 하고 비밀처럼
간직한다. 당연히, 산은 비밀이다. 알리고 싶지 않다.
(바위는 할수록 무섭고 어려워진다. 깊이를 가지고 바위를 대하자. 바위를
공부하면서 오르는 것이 좋겠다. 그는 생각이 있을 게다. 혜경일 부를땐 뭔가 줄 것이 있겠지. 그것을 놓치지 말자. 가을엔 다시 설악,
공룡능선에 혼자서 가겠다. 꼭.
사람에세 깊은 정은 주되, 부담을 주지 말자, 산에겐 정도 부담도 주겠다. 주어버렸다.)
학교의 축제일이다. 지독하게 무거워진 마음을 갖고 혜경은 학교로 간다. 소위 생활을 얻고 싶어. 그러나 축제는 너무 어설프다.
구경하는 사람이 비참할 정도다. 축제의 뒤끝. 폭죽이 밤하늘에 환상만 남기고, 지친 현악기의 쉰소리처럼 꺼진다. 여기저기 휴지조각이 뒹굴고
바람은 그 위에서 저들만의 축제를 시작한다.
우리가 지닌 대로의 표현과 교감이 너무 힘든가. 모두 가버린 뒤 쓰레기 위에 서서 혜경은
바람처럼 혼자만의 축제를 맞고 싶었다. 뜨거운 눈물까지도 서슴지 않을 것 같다. 오늘따라 자신의 것이 없다는 사실이 많이 슬프다.
5월이
끝나는 날이다. 기분이 쉴새없이 변한다.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조용히 죽음의 베일을 벗기려고 할 때 금시 바람 따라 혜경은 춤추고 싶어진다. 그
등댄 감정과 감정 사이로 미끄러지듯 시간이 빠진다.
지난 얘기다. 혜경은 분위기에 끌려, 정말 끌렸다, 어떤 사람에게 기대를 했다.
그리고 당연히 실망을 했다. 사람에게 기대를 한다는 것은 죄악의 시작이다.
사람은 이해, 동정, 사랑의 대상이었다. 기대는 신의 것.
실망은 당연히 하는 것이고, 그래서 잠시 동안 사람이 싫어진다면....... 침묵이 혜경의 표현의 수단이 되었다.
(요 며칠,
특히 어제는 사람이 복작대는 길 복판서 갑자기 충격이 왔다. 잠시 희망이 있었다. 죽음이 보일 듯해서. 허나 오래 살 것이다. 너무 안 죽어서
주위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질기고 질기게 살 것이다. 그래서 빨리 죽고 싶은가 보다. 죽음을 만나거든 말 좀 전해다오. 마음의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다고.)
7월을 여는 날, 혜경은 오랜만에 게을러본다. 기말시험서 해방된 것이다. 비, 풀밭, 연갈색의 예쁜 벌레가
담쟁이를 향해 조심스런 몸짓을 열고 있다. 갑각류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막혀진 세계를 열고 싶어졌다. 여름방학엔 지리산과 한라산을 간다. 고행을
생각했다. 구태여 산이어서는 안 되는냐고, 혜경은 묻고 싶다.
(7월 말에 돌아온다. 그후에 책과 겨룸하겠다. 뭔가 찾고 싶다.
혜경의 걸. 8월이 오면 어디엔가 가자, 전에 조금 취해본 적이 있는 그곳으로.)
혜경은 인천까지 걸었다. 너무도 꿈을 잃은
모양새로 소사엔 복숭아가 쌓여 있었다. 옛날의 경인가도로 해서 자꾸만 걸었다. 길은 더위와 함께 너무 길었다. 멀리 고개 넘으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고개가 다시 고개 들었다. 쩔뚝거리다가 굽이 떨어져나간 신을 아예 벗어 들었다.
옛사람들이 정 많았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이토록 멀었으니 만나면 정이 솟았겠지.
누가 반항이냐고 물었다. 차라리 부산까지 걸으라고,
헤경은 정말이다. 부산까지 걷고 싶었다. 허나 반항은 아니다. 좀더 짙은 무엇을 느끼고 싶었다. 땀을 흘리고 욕을 밟으며 자꾸만 희미해지는
자아라는 것을 만나고 싶었다. 행동동기를 말한다는 것은 다소간 너접스럽다. 이유없이 인천까지 걸었고 피로가 흐뭇했다.
얼마 전
길가에서 돈을 빌려주었다. 속았다. 어제 새벽 길가에서 누군가가 또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한 번 속고 모두를 의심한다는건 너무 자신없는 것
같아서 지갑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한 번쯤은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짐스럽다. 별 데서 다 순수함을 찾는다 싶다. 누구 말대로 다
주책스럽다. 더위도, 눈물도, 순수함도... 땀이나 흘린다. 그래 땀을 흘리러 산에 간다. 지난번 혼자서 설악행은 시간이 되지 않아서 공룡능선에
가지 않았을 뿐이다.
시간?
어떤?
7
김혜경은 연세대 하계 지리산과 한라산 등반대의 일원으로 남원행 기차에
73년 7월 몸을 실었다. 호남의 너른 들이 창 밖으로 스친다. 창에 고개 기댄 그녀에게 시의 세계가 고개를 든다.
(바람이
숨쉬는 너른 들
작은 초막엔 知를 버린
쭈그린 아버님이 계신다.
산의 침묵을 배워
들의 인내를 배워
지금은 흐뭇한 미소만을 안다.)
언제나처럼 첫날은 떠난 것이 후회스럽다. 얼결에 노고단을 거쳐 이튿날 연하천까지 갔다.
아침 안개가 비로 변했다. 등반 냄새가 비와 함께 내렸다. 테트 바늘구멍마다 비가 새고, 매트리스는 온통 젖어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다.
차라리 강물에 투신하는 편이 좋을 성싶다. 등으로 흐르는 냇물, 배 위로 떨어지는 폭포.
혜경은 버너를 벗삼는다. 내일도 여전한
비바람에다 태풍이란다. 그러나 바람은 거셀수록 정겨웠다. 혜경은 몇 번이나 바람에 내팽겨쳐졌다. 체중이 좀더 가벼웠다면 새처럼 날아갈 텐데,
사람의 빈약한 존재가 초라하지도 경멸스럽지도 않았다. 세석평원을 헤맨다. 산장이 산안개 속에 꿈처럼 다가온다.
다음날은 내원재까지 못
가고 성황당서 잤다. 그 다음날도 중간중간 계곡이 넘쳐 역시 내원재까지 못 가고 거림 마을로 돌아갔다. 삼신봉, 단천을 거쳐 1주일이 지나도록
지리산에서 못 벗어나고 신흥에서 자며 지리산서는 처음으로 별을 보았다.
(별똥이 떨어진다. 예쁜 마음들이 솟는다. 모두모두
행복해라. 모두들 행복하게 살아라.)
혜경은 모든 이에게 말을 남긴다.
지리산에서 내려와 구례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배를
타고 7월25일 제주도로 건너 갔다.
그 이튿날 개미등으로 한라산을 올랐다. 그곳은 소음과 공해에 찌들어 서울 근교 산을 연상시켰다.
대피소도 지저분하다. 이유없이 그녀는 우울해진다.
삼각봉에 닿았다. 이름과 달리 늠름하게 생겼다. 왕관봉도 나타 났다. 예쁘장하다. 자기
머리에 얹으면 꼭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삼각봉에서는 암벽등반을 했다.
한라산! 혜경에게는 지루하고 참신한 맛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느긋하고 완만한 산등성이에는 과묵과 참음, 그리고 겸손이 널려 있었다. 귓부리를 울리는 물소리에 별이 넘친다. 은하수가 오만하다.
얘기가 들린다. 먼 옛적 이래 잊은 인간들의 사소한 바람의 소리들이 속닥거린다. 별은 그래서 꿈인가 싶다. 건천이라 안으로만 흐를 줄 아는
샘물을 가진 이 산은 친해지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끔씩 힌트를 주는 한라산의 정이 그녀에게 더없이 닷사롭다. 종일 햇빛에 시달리다,
늦게 백록담에 다녀온 이튿날에는 또 바람고 ㅏ비가 몰려왔다. 등반이 끝나는 7월 마지막 날, 밸록담을 넘어 영실까지 갔다. 물 풍부한 그곳서
한라산의 또 다른 면을 보았다. 오백나한과 장군바위, 널찍한 초원... 진작의 불평을 후회했다.
(내일이면 이 산에서 벗어난다.
설악이 그립다. 공룡능선의 그 태초의 원시성이.)
8
그렇게 돌아온 혜경은 8월 한 달을 더 벼른다. 덤비면 안
되니까, 성급하게 굴어도 안 되므로, 영원의 리듬을 따르는 것일 뿐이니까. 그 영원의 리듬에 자신있게 발맞출 수 있을 때까지 혜경은 기다린다.
별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보름밤이다. 시간은 신기한 결과를 낯는다. 사람은 단지 기다리므로 많은 변화를 체득한다. 혜경은 주어진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달음질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주어진 시간들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허둥대는 걸까. 무척도 단순한 자연의 원리는 인간에
의해 복잡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사람의 역활을 숨가쁘게 달리는 방법으로 표현할 뿐, 주어진 여건을 재단할 재량마저
주어지지 않은 지극히 피동적인 삶이 아련한 슬픔을 준다.
(자연이 되자. 완곡한 표현이라도 결국 난 사람인 것을.)
그녀의 내면의식과 시간이 밀고 당긴다. 8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바람이 제법 선득했다. 계절이 문득 옷가에 스치자 윤리관, 가치관,
그런 것마저 유행이었나 싶다. 흘러가고 지금은 빈 상태, 그래서 좋다. 누구의 그림자도 없는 맑은 공간, 산과 하늘에 그녀는 생각을 드리운다.
조금은 멋을 부리고 싶어지는 눈동자가 있었다.
하긴 그것은 산이었으니까. 거기에는 바람과 청정한 구름이 있다. 도봉산 석굴에 누워 얼굴에
바람을 느끼며 차라리 잠을 별도 없는 밤하늘에 빼앗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한없이 빈 그 공간에 희망을 두고.
이제 설악에 가자.
대승령을 넘고, 마등령부터 공룡능선을 거쳐 대청까지 내달아 다시 화채봉을 타고 저항령을 넘는다.... 그 땅 이름이 혜경에게 주는 기쁨이라니.
바로 고독이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기쁨과 그것이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맑은 공간, 산. 설악산! 산에 되도록 예쁜 마음을 채워야겠다.
다시 짐만큼 욕을 짊어지게 되는 산행이라도 혜경의 가슴에는 산 생각만 가득히 찼다. 이제 자신있게 고백한다.
(산은 나의
신이다.)
9
추석날 혜경은 다섯 번째로 설악을 찾는다. 나이며 그대이며 신인 공룡능선을.
(비가 오고
있다. 주룩주룩. 비가 와서 참 좋다. 지금은 축축한 갈잎을 밟으며 짐을 잔뜩 지고 욕을 삼키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 꼴이다. 조금 후에 기차를
탈 것이다. 동해와 설악으로 가는 먼 저편의 기차다. 비가 온다. 지금 설악은 초록색일 테지. 왼통. 화나지도 않고 실망스럽지도 않지만 뭔가
영영 잃은 느낌이다. 말은 언제나 후회를 가져다준다. 좀더 침묵을 지키자. 그래도 열의는 많다. 그런데도 깊이깊이 내 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추락사가 아니라 익사일 것 같다. 저 깊은 곳. 뭔가 모를 끈끈한 액체, 피. 지금은 SOS!)
10
73년 9월 17일
연세대학교 학보인 <연세춘추>에 의예과 2년 윤금석의[挽歌]라는 시가 실렸다.
(네가 사랑하던 두메의 흙에
이제
네가 묻히는구나
설더라도
가벼이 할 수 없는 목숨이어서
계곡에 물 흐르듯 살겠다더니
수림의 참대처럼
살겠다더니
아이처럼 맑은 웃음으로
고인 빗물을 점벙거리며
엉겅퀴처럼 삶을 사랑하던 네가
이제 그만
가버렸구나
뜨겁게 사랑하던 대지의 품에 안겨
스물 하나 싱싱한 나이를 조그만
손에 서럽게 움켜진 채
너의 두 눈을
아주 감고 말았구나
내 무슨 몸짓으로 너의 앳된 혼을
다시 부를 수 있으랴
내 무슨 말을 빌어 서러운 너의 혼령을
위로할 수 있으랴
더듬으면 만져지는 안타까움
되뇌이면 밀려오는 너의 영상에
하늘을 향해 울먹이던 심장은 터지고 말아
내 어쩌면 잊을 수 있으랴
너의 총명을
굳게 다문 입술에 감춘 너그러움을
내 너를 말릴 것을
내 너를
붙잡을 것을
여기 이대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너 묻힌 산골에 멧새가 되어
외로운 너의 혼과 함께 하려마
젊은 너의
산길에 벗이 되려마
너 없는 가을이라 비가 내린다
숨죽인 밤바다에 비가 내린다
너는 한 떨기 들장미였어라
가을바람처럼 들판을 헤매에 다니던
너는 정녕 한 송이 들장미였어라.)
11
73년 10월 28일, 혜경의
49재 날이었다. 설악동 신흥사에서 영혼 결혼식이 있었다. 설악에서 진 젊은 남녀가 그 자리서 혼이나마 함께 묶었다. 신랑은 크로니 산악회의
최용석. 그는 그해 1월 설악산 희운각산장 아래쪽 무너미고개에서 급사면의 눈비탈을 미끄럼 타고 내려오다 자신의 피켈에 질려 절명했다. 혜경이
죽은 몸으로 시집가던 날, 그녀의 산후배 이희연은 그 영전에 글을 올렸다.
(갈꽃 우거진 산모퉁이를 반쯤 돌면
내 여인의
무덤
장지로 떠난 초상집 같은
하오의 무덤을 뒤지는
질벅거리는 햇살
꽃배암 같던 여인의 속곳을 쫒아
바라만 보는 게으른 풀밭에
위령의 행렬을 끄는 목탁이
여인의 사위운 눈매로 흘러들어
삼단 같은 머리
풀고 하얀 소복한 채
울면서 한을 푸는 여인
반쯤 익어가던 손톱으로 웃던 내 여인이
오늘은 죽어
남의
여인으로 머리를 푼다.
꽃배암 같던 내 여인의
흰 젖퉁이 같은 무덤에
미친 듯이 입맞추는
질벅거리는 햇살)
혜경은 최용석과 나란히 설악산 입구 노루목에 묻혔다. 평소 설악을 찾을 땜다 향 사르고 두 번 절하던, 넋 놓고 설악에 지는 해를
바라던 바로 그 노루목에 영영 누웠다.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묻힌 열 동지와 토왕폭에서 산화한 송준호, 그리고 석주의 무덤 약간
위쪽에 그들과 더불어.
나는 김혜경의 바로 윗대 산선배여서 그녀와 산행을 거의 함께 하였다. 그녀는 나의 러셀 자국을 밟고 설악을
올랐고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에서, 북한산 인수봉 빌라길에서 확보를 봐주기도 했다. 말하지만 나는 그녀 산생활의 목격자다.
그래서
그녀의 산사랑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녀는 나에게 '잊지마시오! Don't forget to remember me'라는 노래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가을에 설악에서 친구가 죽는 '설악가'를 그녀에게 가르쳤는데 그녀는 내가 가르쳐준 노래의 가사를 좇아 설악으로 가서는 노랫말의 약속을
지켰다. 때문에 그녀처럼 나도 약속을 지켜야 할 터이다. 나는 그녀가 남긴 글을 바탕으로, 그녀 곁에 늘 함께 한 듯이 글을 쓰며 '잊지
말아달라'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킨다. 하지만 실제로 이 글은 내 손을 빌린 그녀의 영혼이 쓴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나는 김혜경의
혼백에 신들려 푸닥거리하는 무당이었나 보다.
설악가는 너의 침묵을 싸돌고, 엷게 풀어지는 산안개가 너의 모습을 공룡능 위에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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