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雪岳戀歌

[사람의 산] 하얀 산에 태운 불꽃 - 유재원

月波 2006. 5. 13. 17:16

 

[책] 사람의 산 - 박인식

 

하얀 산에 태운 불꽃 - 유재원

 

1
샤모니 침봉들은 제단에 놓인 촛대 같다. 황혼의 햇살 비길 때 그 촛대에 불이 켜진다. 그러면 한 차례 제의(祭義)가 하얀 산에 치러진다. 때로 산사람이 그 제물로 놓여지느 그 의식은 신의 자리를 넘보다 저주받은 바릴론 후예의 비극적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샤모니 촛불은 스스로의 몸을 알피니스트라는 운명의 촛대로 세운 한국의 산사람 유재원의 심지에도 불을 당겼다. 5년 동안 치열하게 타던 그 불꽃은, 어느 날의 제의와 더불어 우리 눈에 찬란한 불꽃의 환상만 남기고는 꺼졌다.

2
무언가 막연한 힘에 묶여 깨지기 쉬운 물체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 막연한 힘을 '신'이라 부를 때가 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어떻게?"
"어쩔 수 없는 일......"
유재원과 그의 등반 파트너였던 마사오는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을지 모른다.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는데다 운명은 신에게 맡길 도리밖에 없었기에. 그러나 신의 뜻은 우연이나 신비로밖에 나타나지 않는 걸까?
눈사태는 두 사람을 결국 쓸고 말았다.
우연히?
아니면 섭리로?
1977년 7월 프랑스 알프스 샤모니의 어느 봉우리에서다.

3
몽블랑이 그 흰빛을 버리고 북쪽으로 흘러내린 푸른 산자락에 또 다른 샤모니의 산군이 있다. 거기에는 몽블랑, 그랑드 조라스, 플랑, 드류, 에귀 베르뜨 등 샤모니 산군의 거의 모든 봉우리들이 항아리많안 크기의 바윗돌로 축소되어 앉아 있다. 그 바위들은 모두 산쟁이의 이름과 짝이 되어 있다. '어느 날 산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문득 하난의 조그만 바위에 지나지 않더라...'는 얘기나 하려는 듯 바위들은 그 산에서 죽은 산사람의 화신으로 앉아 있다.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 가이드 묘지다.
유재원은 72년 샤모니로 오자마자 이곳에 들렀다. 세계 등반사에서나 봤던 에드워드 윔퍼, 릴오넬 테레이, 아르망 샤를레, 루이스 라슈날 등의 묘비들을 이곳에서 하나둘 찾아내고는 알프스라는 등반 역사적 공간에 첫걸음을 디딘 자신을 대견해했을 것이다. 묘지의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며 그의 머리는 끊임없는 뺄셈을 했겠다. 묘비마다 그 주인이 태어난 해와 조난당한 해의 연도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24, 21, 26, 20, .... 등 거의가 서른을 넘기기 못한 삶이었음을 깨닫고 그 젊은 목숨의 맑음과 서러움을 자기 나이 스물다섯의 맑기에 견주어보았을 것이다.
5년이었다. 그에게 덧붙여진, 아니 그의 진정한 삶의 길이는. 그 바위 곁으로 5년 후 그도 하나의 돌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유(yu), 1947~1977, AIG NOIRE DE PEUTEREY'라고 새겨져 있다.

4
샤모니서 가다오다 들리는 그의 이름은 거의 경전에 가까운 투로 발음되었다. 르네 드메종이나 실벵 쏘당 같은 유명 산악인도, 그를 아들처럼 거둬준 띠띠 씨도 사랑이 스며든 억양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르르 아는 어떤 사람이건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천재로 문중의 총애를 받더니, 그러나 요절한 사촌형님을 떠올리는 투가 되는 것이다. 자기 같은 건 쓰레기, 살아야 할 사람은 죽고, 없어도 좋을 밥버러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는 저 사랑의 마조히즘을 샤모니 사람에게서 보았다.
여권마저 없이, 등산장비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던 이름없는 어느 동양의 알피니스트에게 보내는 저들의 경의와 사랑은 무엇 때문일까? 보수적이라는 프랑스 사람 중에서도 유별나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라는 샤모니 산동네 사람들이, 본국에서도 잘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을.

5
유재원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72년 가을이다. 한국산악회가 파견한 제2차 알프스 훈련대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74년 여름쯤 어느 신문에서 '몽블랑 만년 빙벽에 도전하는 두 한국의 젊음이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로 유재원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고 그가 귀국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후 월간<山>지에 게재된 유재원의 유럽 알프스 등반기를 몇 번 보았다. 74년의 에귀 베르뜨의 윔퍼 꿀르와르 단독등반기, 75년의 그레퐁 동벽 등반기 등이다. 그러다가 77년 7월, 신문지상에서 그의 조난 소식을 접했다. 77년 8월호의 <山>지에는 조난 상보와 추모의 글이 실렸다.

(28일부터 날씨는 다시 악화, 이태리 쪽 프레니 빙하 위는 2.5m나 되는 눈이 쌓였다. 악천후는 계속됐다. 8월 5일이나 되어 구조대는 신설을 헤치고 출발했다. 구조대는 8일 오전에 프레니 빙하의 균열에 낀 찰과상 없는 유재원과 마사오의 유해를 발견했다. 이들의 모습으로 보아 7월 27일 날 서벽 초등에 성공하고 늦게 하산하여 2,600m 지점이 되는 빙하 위에 비상 노숙하다가 신설 눈사태에 500m나 밀려 조난사한 것 같다. 조난일은 28일로 추정...)

79년 6월, 경복궁 앞 프랑스 문화원에서 고인의 추모사진전이 개최되었다. 경동고의 동문 산악회 후배들이 개최한 것이었다. 추모사진 속의 고인은 붉은 스웨터와 몸에 착 달라붙는 니커바지 차림으로, 상상외로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상이라함은 이국 땅에 혼자 떨어진 이방인이라는 이미지에 붙어다니는 궁색함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그는 궁색하기는 커녕 자신만만하고 화려한 알피니스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과 검은색안경은 서쪽으로 먼 나라의 풍물을 느끼게 했다. 외국물 먹은 요즘의 산쟁이 모습 그대로였다. 흰 산을 배경으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사진에는 그 파이프에서 나오는 담배연기에 어울리는 서정적 분위기가 자욱했다. 등반을 끝내고 정상에서 휴식할 때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나이라, 그것도 알프스에서, 흠, 멋쟁이였는데... 하던 느낌의 찌꺼기가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전시장에는 그의 등반기록이 차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72년부터 77년까지 이뤄낸 23개의 등반이었다.
그 중에서 반을 넘는 15개가 단독이었다. 그 연거푸 적힌 '단독'은 보는 이의 가슴에 '외로움'으로 찍혀있다. 그 기록은 77년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 북벽 등반으로 끝나 있었다. 그것을 보다 말고 나는 이거 뭔가 이상한데, 하는 의아심에 사로잡혔다. 유재원, 하면 모두들 <山>지의 기사대로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 남서벽 초등자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시장 차트에는 남서벽이 아니라 북벽을 등반한 것으로 나와 있지 않은가. 죽음으로 이뤘다는 그의 마지막 행적조차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서쪽 저멀리 알프스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그럴 수 도 있을 것이다. 추측기사가 빚은 오보일 가능성을 생각해보면서 전시장을 나왔다.
70년대 후반부터 국내 산악인의 해외진출이 급증했다. 샤모니로도 많은 발길이 이어졌고, 그랑드 조라스 북벽과 드류 서벽을 오르는 개가도 올렸다. 그러한 성과의 배경으로 우선 조명되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그들보다 적어도 5년 전에 그만한 등반을 해낸 유재원이다. 그럼에도 그의 등반은 제대로 평가받은 적이 없다.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숨겨야 할 부끄럼이라는 듯 잊혀갔다. 같이 간 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지 않고 불법으로 그곳에 눌러앉은 불법체류자이기에? 그것만 핑계되기에 그의 산행기록은 너무 뛰어나다. 정사에서 벗어나 야사가 된 그의 이름은 산사람의 귀에서 귀로만 돌아다니는 풍문이 되었다.
'왜?' 하는 의구심이 알프스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랐지만 남들처럼 나도 그를 잊어갔다.
이상은 내가 그리려는 젊은 알피니스트 유재원 초상의 기본 데생이다. 그것은 나에게 뿐 아니라 한국 산악인들이 떠올릴 유재원의 희미한 초상이기도 하다.

6
유재영 씨가 들려준 집안에서의 오빠로 막연하기만 하던 유재원의 초상화에 몇 개가 보태졌다. 아버지 유진수 씨와 어머니 김유순 씨는 오빠 뒤 딸만 다섯 더 두었다. 오빠는 1947년 5월 1일생. 아버지가 군인이라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근무처를 따라 여러곳에서 보냈다. 오빠가 열 살 되던 무렵 서울에 정착하게 되어 오빠는 삼선초등학교, 경동중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들어갔다. 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오빠는 여드름이 몽글할 때까지도 인형을 갖고 놀 만큼 어린애 같았다. 그래서 동생들은 인형이 되었다. 여동생 인형을 갖고 놀던 오빠는 여성적이었다.
여동생들이 많아서였을까. 막내동생을 보고 '너는 자라지 말고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린애이기를 바랐다.
다들 뒷머리를 치올리는 시절에 오빠는 머리를 길렀다. 여자처럼, 과일을 좋아했다. 호두나 잣만 먹으며 살고 싶어했다. 예쁜 그릇을 탐내기도 했다. 음식 만들기도 좋아했다. 떡볶이 솜씨가 좋았다. 여동생들이 그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면 너무도 기뻐하던 오빠였다. 참! 노래도 잘 불렀다. 통기타, 드럼도 치고 요들송 솜씨도 특별났다. 고등학교 때 4인조 보컬팀을 만들어 법석 떤 기억도 난다. 사진 찍기도 좋아하던 재주꾼 오빠였다. 술을 많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골초인 게 흠이었다.
아버지가 예편한 후, 중앙청과 국영기업체에 일시적으로 몸담았다가 곧 그만두고 설립한 회사가 그런 대로 성공ㅇ르 거두어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편이었다. 여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오빠의 산은 집안에서 유일한 근심거리이면서도 아기울음처럼 피붙이들이 함께 사는 맛을 돋우기도 했다.
오빠는 고등학교 때부터 뭣에 홀렸는지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전부터 산에 다니긴 했다. 하지만 두 산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동생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바위 탄다는 것을 알고는 집안에서 오빠의 산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산에 갔다가 늦는 날이면 어머니는 꼭 골목까지 나가 기다렸다. 오빠가 산에 점점 빠져드는 게 역력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산행 전날은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산행 준비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무엇에 시달리는 환자 같기도 했다. 대학 시절은 온통 그렇게 보냈다.
71년 졸업 후 현역으로 육군에 입대했으나 2대 독자인 까닭에 6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했다. 71년 한국산악회의 한국등반기술연구회(KCC)에 입회함으로써 오빠의 산행은 본궤도에 오른 것 같다. 이때 김향원, 최선웅 씨 등과 한국산악회의 회보 편집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던 오빠는 한국산악회 제2차 알프스 훈련대에 선발되어 알프스로 갔다. 김인섭, 김향원, 그리고차양재 오빠와 더불어 두 달 예정으로 72년 9월 7일에 떠났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떠나가는 것도 보지 못했어요. 제가 고2 때입니다. 그 길로 끝이었어요...."
그리고 말이 없다. 울적한 슬픔이 침묵의 공간에 끼어들었다.
"그 후 어떻게?"
"어쩔 수 없이 살 수밖에는...."
우연이나 신비로나 나타났던 신의 뜻을 알 길 없기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조적인 끝말을 두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81년 늦가을 광화문에 있는 어느 다방에서다.

7
알 길이 없었다. 유재원의 샤모니 생활 5년은 누구를 만나고도 알 수 없었다. 초상화의 기본 데생 위에 색을 입힐 수가 없었다. 국내 산행에서는 특기할 게 없었다. 그의 초상화에 화룡점정할 핵심은 샤모니의 산생활에 있다. 한데 그게 불투명했다. 집에는 샤모니 산행을 거의 숨기며 지내왔다. 산악회 후배들이나 주위 산사람들은 일간지나 <山>지에 난 기사나 편지로 샤모니 생활상을 추측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에 대해 글 쓰는 일을 연기했다. 그와 함께 알프스에 남은 차양재 씨와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다는 띠띠 씨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잡아두었던 샤모니를 가본 다음에야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기회가 왔다 나는 연세대 알프스 원정대를 꾸려 82년 7월 샤모니로 가게 되었다. 샤모니를 봤다. 가이드 묘지에 가서 그에게 분향재배했다. 띠띠 씨(본명은 트레사미니) 부부와 유재원을 잘 알던 프랑스 산악회 샤모니 지부장, 르네 드메종, 샤를레 씨 등을 만났다.
보송빙하를 통해 몽블랑을 오른 첫 샤모니 산행이 재원의 첫 산행과 일치하는 운도 따랐다. 그의 알프스 등반 중 가장 위험했다는 에귀 베르뜨의 윔퍼 꿀르와르, 에귀 디 미디 북벽의 프랑도 스퍼빙벽을 오르며 그곳에 스쳤을 유재원의 숨결을, 피켈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차양재 씨를 만나보지 못했다. 파리에 살고 있는 그는 마침 한 달 휴가를 얻어 바캉스를 떠나고 없었다. 차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유재원과의 샤모니 5년을 얘기해달라고.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가 수월치 않았는지 답장이 쉽게 오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는 사이 엉뚱하게도 알프스 취재노트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또 연기해야만 했다. 다시 샤모니로 갈 기회가 있을 때까지.
82년 10월 차양재 씨로부터 답이 왔다. 77년 조난사고 후 여러번 이런 류의 청탁이 있었으나 전혀 응하지 않았다는 그는 "5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이곳을 다녀간 산친구들조차 재원에 대해 모르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와전된 것도 있고. 재원에 대한 것이 이런 상태로 굳어진다는 것은 재원 쪽이나 한국 산악계에 손실일 것 같아서, 더 늦기 전에..."라며 처음 입을 연 이유를 밝혔다.

8
72년 9월 샤모니의 국립등산학교(ENSA) 외국인반을 수료한 후 재원을 포함한 대원 네 명 모두 파리로 나왔다. 김인섭, 김향원 대원은 귀국하고 산행을 더 해볼 뜻으로 재원과 차씨는 남았다. 8개월 가까이 파리서 머물렀다. 다시 샤모니로 재원과 함께 들어간 때는 73년 6월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산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직장문제에 여권문제(이들은 1년 기한의 단수여권을 갖고 있었고, 이미 여권기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까지 겹쳐 언제 귀국해야 될지 모르는 불안한 때였다. 띠띠 씨의 도움으로 재원은 피켈을 주로 생산하는 등반장비 메이커인 샤를레 모제 공장에, 차씨는 빵가게에서 몇 달 동안 일했다. 띠띠 씨 부부의 요청으로 차씨는 산장 르 샤모니아로 일자리를 옮겼다. 재원의 공장은 샤모니 시내서 4킬로미터쯤 북쪽에 있어 늘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공장 쪽에서 방을 내준다고 했으나, 재원은 숙소를 바꾸지 않았다. 유럽의 유명 알피니스트들이 단골로 이용하는 띠띠 씨의 샤모니아 산장에 머무는 것이 산행 정보를 수집하거나 등반 파트너를 찾는 일에 도움될 때가 많아 재원은 차씨와 산장서 지냈다.
생활은 해결되었지만, 기한이 만료된 여권 때문에 항상 마음이 쫒겼다. 그래도 귀국하기 전에 한코스라도 더 올라보려 애써다.
둘이 함께 등반키는 어려웠다.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서였다. 재원의 공장은 토.일요일을 쉬었고, 그의 산장은 주말이 더 바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름 시즌에는 보름 정도 산행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 환경에 적응되어 안정감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여권문제에서 헤어난 것이다. 몇 사람의 도움으로 거주증명과 노동증명을 갖게 되엇다. 그것으로 프랑스 안에서의 생활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간 차곡차곡 쌓은 산행 경력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저축한 것과 마찬가지로 샤모니 생활의 방편이 되었다. 그것을 통해 '등산의 메카'라는 샤모니가 주는 초기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등반 열의를 저들도 인정하고 산악가족으로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어장벽이 다소 무너지면서 비로소 그 사회에 파고 들 수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말못하면 굶어야 하고 굶게 되면 산에도 못 가게 되니 짧은 기간 안에 말문이 트였다. 입 따라 눈도 열렸다. 불어를 생활로 익히자, 그곳 산악잡지와 신문 등을 볼 수 있게 되어 등산 기술과 등산 철학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차씨는 에밀 지그몬디의 [성채]등을 읽고 재원과 열띤 논쟁을 벌인 기억이 난다. 재원은 소머벨의 데생이나 수필집에 심취했고 루이 라슈날을 존경하는 산악인으로 꼽기도 했다 . 차씨는 리오넬 테레이을 좋아했다. 프랑스의 두 산악 영웅인 테레이와 라슈날은 전혀 다른 성격으로 아주 다른 등반양식을 추구한 라이벌이다. 그 두 사람의 산행 스타일을 비교하며 재원과 차씨는 그 속에 자신들의 개성과 특성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밤을 지샜다.

9
76년 그들의 생활에 변화가 왔다. 샤모니서 좀더 큰 등반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오히려 샤모니늘 떠나게 만들었다. 주말에 주어지는 하루 이틀의 짧은 시간으로는 의욕적인 등반을 해낼 시간 여유가 없었다.
파리로 옮겨 여름 시즌 한두 달의 장기휴가를 얻어 산행에 전념키로 작정했다.
76년 봄, 차씨가 재원보다 먼저 파리로 나왓다.
그해 11월 샤모니의 재원도 파리를 다녀갔다. 재원은 파리 생활때 함께 일했던 한국인 화가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옛 그림을 수선하여 표구하는 일을 부업 삼은 화가였다. 77년 초부터 다시 함께 일하기로 결정하고 샤모니로 돌아갔다.
샤모니서 맡아했던 식당 일과 영화 시사회 보조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파리로 이주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막상 77년 초에 이 계획은 틀어졌다. 샤모니 생활을 정리한 재원이 파리의 그 화가에게 연락했더니 그 화가는 사정이 바뀌어 함께 일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프랑스 정부는 외국인의 취업을 최대한 막았기 때문에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는 좀체 파리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 즈음 차양재 씨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도 재원의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러던 중 재원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해 여름 시즌만 보내고 귁국하겠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그동안 귀국하겠다는 뜻을 비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재원은 일하는 동안 저금해둔 돈이 바닥나 있었다. 여름등반용을 빼고는 그간 모은 장비마저 처분해야 했다. 몇몇 장비점에 판매 의뢰했고 호텔 바마다 판매할 장비 목록을 붙여두었다. 그때부터 재원은 여름 등반철까지 띠띠 씨네 산장에서 잔심부름을 해주며 지냈다. 그 즈음 샤모니로 등산 유학을 온 일본인 마사오와 자주 어울렸다. 마사오도 재원과 거의 같은 생각으로 샤모니에 6년째 머물렀고, 이제는 귀국해야겠다고 동료 알피니스트 히로시, 이찌이, 스즈끼 등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6월 말경, 재원으로부터 7월로 등반 시기를 조정할 수 없겠느냐는 전화가 다시 왔다. 8월보다 7월의 기상이 좋다는 예보가 나왔다면서 7월 초 마사오와 큼직한 등반계획을 세워두었다는 것이다. 재원이 이번 등반 대상지로는 몽블랑 프레네이 중앙필라, 트리올레, 레 드롸뜨, 레 쿠르트 북벽 등 샤모니 산군에서 고전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6급의 등반 루트를 꼽았다고 한다. 재원의 마지막 등반이 된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에 대한 언급은 그때 없었다.
초기 샤모니 생활처럼, 일단 귀국한다는 가정을 세우게 되면 배수진을 친 경우가 된다. 재원이 뭔가 등반사적 의미를 ㅜㅂ여다을, 그런 욕심을 부린 나머지 다소 무리가 따를 만한 등반 대상지를 고르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차씨에게 들었다.
하늘도 그의 편을 드는 것 같지 않았다.
7월 초 시내에서 유재원의 자전거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승용차와 마주쳤다. 순간 서로 피했다. 자동차는 가로수를 들이받아 탑승자 한 사람이 즉사하고, 다른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 재원은 어깨를 심하게 다쳤다.
설상가상으로 등반 출발 전날, 또 한 번의 사고가 일어났다. 띠띠 씨에 산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열차 건널목에서 기차와 자동차가 서로 충돌했다. 그 바람에 승용차를 뒤따르던 재원의 자전거도 충돌에 휩쓸려 앞니가 부러지고 허리를 다치는 부상을 입었다.
차씨가 판단하기에 재원의 몸 컨디션이 큰 등반을 해내기에 무리가 따를 것 같았는데도 재원은 등반을 연기하지 않았다. 마사오를 먼저 출발시켰고 다음날 이탈리아 쪽의 토리노 산장에서 두 사람은 만나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상했다. 재원이 조난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파리서 샤모니로 달려가 그의 방을 처음 열었을 때 그의 방은 당장 이사를 가는 듯이 여러 개의 짐으로 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 세상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려는 사람처럼. 그가 아끼던 장비는 짐꾸러미 속에 없었다. 장비점에 알아보았더니 팔아달라고 맡겨둔 일도 없었다. 장비는 도데체 어떻게 해버렸는지... 재원도 장비도 돌아오지 않았다.

10
차양재 씨의 편지가 유재원의 샤모니 시절에 대한 궁금증을 여러 모로 풀어주기는 했지만, 되레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면도 있었다. 혹 그가 마지막을 예견하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이었다. 마지막 등반 전에 일어났다는 두 차례의 자전거 사고에 대한 그의 처신과, 행방이 묘연해진 그의 장비와, 이사가는 사람처럼 정리해두었다는 그의 방에 관한 얘기가 그러했다.
그 궁금증에 싸인 채, 나는 83년 7월에 다시 샤모니로 가게 되었다. 유재원이 살았던 르 샤모니아 산장에서 9월 어느 날, 우연히 그 궁금증을 풀 열쇠를 찾은 것도 하늘의 뜻인가.
시내의 가이드 묘지를 둘러보고 띠띠 씨의 르 샤모니아의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웬 낯선 사람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책을 보고 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빨간 티셔츠 차림에 파이프를 피우는 폼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 그 빨간 티셔츠와 파이프는 유재원의 무덤에서 오는 길이어서인지 꽤 오래 전 경복궁 앞 프랑스 문화원에서 보았던 유재원의 옛 사진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낯설게 생긴 서양 사람인데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나에게 그는 "두 유 노우 유?" 하고 물어왔다. 'Do you know you?"라면 내가 나를 아느냐는 소리 아닌가! 아닌 밤중에 들이댄 선문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큰소리쳤다지만 나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냥 나는 자신을 모른다고 얼떨결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는 "아이 노우 유"라고 했다. 자기가 나를 안다는 소리 아닌가!
촌사람 놀리는 건가 싶으면서도 뭔가 심상찮은 예감이 들어 그의 까닥이는 손가락질을 따라 그에게로 끌려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파이프에는 '유(you)'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아느냐고 물었던 '유'란 당신을 뜻하는 '유'가 아니고 유재원을 가리키는 '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생텍쥐페리의 영어판 [성체]였다. 그 책의 맨 뒷장에도 '유'가 서명되어 있었다. 생텍쥐페리가 마지막 출격을 예감하고 그의 친구에세 미완으로 넘기 원고가 바로 [성체]였다.
유재원도 마지막 등반에 출사표를 던지기 이틀 전에 이 책을 그의 영국 친구, 바로 이 크리스 하디에게 주고 벽으로 떠난 것이다. 이 친구에 대해서는 차양재 씨나 재영 씨 등 주변의 누구로부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 하디는 책을 펴 보였다. 유재원이 밑줄 쳐놓았다는 장이 펴졌다.
'주여 나는 당신의 곁으로 갑니다.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나는 땅을 경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씨를 뿌려주세요. 나는 이 큰 촛대를 세웠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거기에 불을 붙여주세요.'

11
재원이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처음 있는 일이다. 산에 갈 때는 언제나 띠띠 씨에게 대상지의 선정이나 등반 일정 등 세세한 사항까지 상의하던 재원이었다. 띠띠 씨는 다음날, 샤모니의 장비점과 가이드 조합 등을 샅샅이 수소문하여 재원이 마사오와 함께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 북벽으로 떠났음을 마사오의 친구 히로시를 통해 알아냈다.
그 벽은 미등으로 남아 있던 처녀지다. 그만큼 단단한 마음을 요구하는 대상이다. 전날 자전거 사고를 당한 몸으로, 대체 어떤 결심을 했기에, 아무 얘기도 없이 그런 곳으로 떠났을까. 생각할수록 띠띠 씨는 불안해졌다. 사흘째 저녁, 날씨는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나귀 모양의 구름이 몽블랑 위에 얹혔다. 심한 폭풍설을 예고하는, 그 악명 높은 '몽블랑의 당나귀Donkey on the Mont Blanc'였다. 몽블랑의 당나귀가 끌고 온 검은 구름 장막이 샤ㅗ니 일대를 덮어버렸다. 순간 띠띠 씨의 가슴에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는 눈이 오고 있을 것이다. 7월의 눈이! 몽블랑의 당나귀의 저주에 희생된 수많은 젊은 목숨을 기억하는 샤모니의 터주대감 띠띠 씨는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안 돼, 유(Yu), ...... 그럴 수는 없어.... 안 돼!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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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7월 23일 , 이른 새벽 샤모니를 떠난 유재원은 이탈리아 쪽토리노 산장에서 파트너 마사오를 만났다. 전날 재원의 자전거 사고로 마사오는 먼저 떠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투르 롱드의 북쪽 발리 블랑쉬 설원을 횡단하여 기글리 무인산장Biv. Ghigli에 오후 5시에 닿았다. 다음날 새벽 2시 기글리 산장을 떠나 브렌바 빙하를 어둠 속에 건넜다. 이날 오후 3시경, 이탈리아 구조대 소속의 헬기가 브렌바 빙하 일대를 정찰 비행했다. 헬기의 구조대원은 퍼트레이 북벽 하단부를 오르고 있는 두 알피니스트를 보았다. 구조대원은 건투를 빈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두 알피니스트는 걱정 말라는 듯 힘찬 팔매질로 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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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오르고 있던 산의 이름은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다. 에귀란 '침봉', 노아르는 '검은', 퍼트레이는 '암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검은 바윗덩어리'란 말이다.
'검은 바윗덩어리'에 밑줄이 쳐 있었다.
ㅡ리스 하디가 내민 [성체]에서 생텍쥐페리는 신의 모습을 성체에 빗대 '검은 바윗덩어리'로 그려놓고 있다. 그렇다면...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가 유재원에게는 단순히 산의 의미로만 머물지 않는 대신 신의 모습으로 파악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텍쥐페리는 [성체]에서 말한다.

(검은 바위의 무거운 덩어리! 그것이야말로 시드는 일 없이 맑은 신의 모습이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신에게 보수를 바라지 않는 기도를 의미한다.)

유재원은 책의 여백에다 이 문장의 신god을 산mountain으로 바꿔 써놓고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말을 '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산에게 보수를 바라지 않는 산행을 의미한다'라고 새긴 것이다.
그래서 유재원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알피니스트는 등반을 위해서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희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젊은 시절을 알프스의 산들에 바쳤다. 그것 때문에 돌아오는 어떤 고난과 고통을 조금도 후회 없이 받아들인다.
-에프롱 브렌바 등반기 중에서)

유럽문화권 속에서 유재원은 5년 가까이 지냈다. 원래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면서도 기독교도는 아이었기에, 니체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생텍쥐페리에 심취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린애로 남기를 바랐던 어린 왕자가 바로 유재원 아니었던가.
유재원이 생텍쥐페리를 처음 접한 것은 76년 겨울이다. 그해 봄 차양재 씨마저 파리로 나가버려 재원은 더욱 외로워졌다. 이 무렵, 그의 내면세계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그 홍역은 한국의 산과 한국 산악계와는 너무도 다른 샤모니의 자연과 사회가 처음 그에게 준 충격에서 벗어나며 시작된 것이었다.
보편성과 영원성에 목말라하던 그는 산행에 언뜻언뜻 비친 영적이며 절대적 모습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시였을까. 종교를 갖지 않은 그로서는 계시라면 더욱 헷갈릴 만했다. 극한적인 산행에서도 특별한 답을 구할 수 없어 그는 외롭고 불안해졌다. 종교는 아닌, 그러나 종교 같은 어떤 믿음이 이역만리 홀로 떨어진 그에게 필요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크리스 하디가 재원에게 준 선물이 [성채]였다. 비행사의 뛰어난 성찰은, 이 외로운 알피니스트의 정신적인 갈증을 때맞춰 적셔줄 오아시스가 된 것이다. 그 책 한 권과의 만남은 재원에게 그야말로 운명적인 것이었다.
영국 친구 크리스 하디는 46년생으로 재원과는 거의 동년배였다 여름철엔 관광회사에서 안내를 맡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겨울엔 샤모니로 찾아들어 스키를 즐기는 한량이었다. 70년대부터 매년 샤모니아의 띠띠네 집에서 겨울철을 지냈다. 때문에 재원과는 73년 겨울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실벵 쏘당(고산 활강스키의 일인자. 그랑드 조라스의 이탈리아 즉 설벽, 매킨리, 그리고 80년 카라코람의 8.000미터 거봉 히든 피크를 스키로 활강한 기록을 갖고 있다)에게서 재원과 함께 스키를 배웠다.
둘이서 스키를 탄 기억은 부지기수다. 발리 블랑쉬 설원 횡단과 그랑 몽테 설사면 스키 활강을 크리스는 잊지 못한다. 산행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유재원에게는 가장 절실한 친구였다.
재원이 퍼트레이로 떠나기 이틀 전, 그러니까 77년 7월 2일 크리스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관광회사에 안내원 자리가 생긴 것이엇다. 그때, 재원이 선물을 주었다. 바로 '유(YU)'가 새겨진 파이프와 [성채]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던 책을 왜 되돌려주느냐고 묻자, 재원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또 그 뒷정리의 뜻을 알려고 그후 크리스는 여러 번 [성채]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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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띠띠 씨는 구조대에 조난신고를 했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설선이 2.000미터대로 내려왔다. 엄청난 폭설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구조대도 속수무책이라 헬기조차 띄울 수 없었다.
띠띠 씨의 연락을 받은 차양재 씨가 파리서 급히 달려왔다. 띠띠 씨 부부, 야닉 셰뉴르, 르네 드메종 등의 유력 가이드와 여러 구조대원이 대책을 숙의했다. 하지만 그들도 이런 악천후 속에서는 달리 손써볼 도리가 없었다. 27일, 28일, 29일....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적설량은 1미터를 넘었다. 하늘만 쳐다보는 샤모니 사람들의 걱정도 그만큼 쌓였다. 속수무책의 상태로 8월을 맞았다. 차양재 씨와 띠띠 씨는 구조대를 편성해 날씨가 호전되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폭설로 인한 눈사태 우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헬기를 이용하지 않고는 현장에 접근할 방도가 없었다.
8월 3일 오후, 날씨는 호전되었다. 헬기가 뜰 수 있을 정도였다. 악천후가 시작된 지 열흘 만이었다. 퍼트레이가 이탈리아령이라 프랑스 구조대 헬기는 접근할 수 없었지만, 띠띠 씨가 이탈리아 구조대장 자페리Zapelli의 협조를 얻어내어 프랑스 구조대의 헬기까지 투입시켰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합동대가 헬기로 수색작전을 폈다. 네 대의 헬기가 서른 시간이나 퍼트레이 부근을 뒤졌으나 헛일이었다. 키를 넘게 쌓인 눈은 바위 위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재원과 마사오가 노아르 산장 쪽으로 하산하였으리라는 마지막 희망은 8월 3일 그곳으로 하산한 이탈리아 고비Gobbi팀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정상에서나 하산 도중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는 그들의 얘기는 모두를 절망케 했다.
헬기는 브렌바 무인산장을 뒤졌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프랑스쪽에서 퍼트레이 북벽으로 접근할 때 등반기지가 되는 곳이 브렌바 산장이다. 재원은 그 산장에 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기글리 무인산장에서 등반 전날 묵었음이 밝혀졌다. 7월 23일 오후에 도착해 다음날 새벽에 떠났다고 기글리 산장 방명록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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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74년 7월 에귀 베르뜨(4,121미터)를 단독등반한 적이 있다.
그동안 등반을 미뤄온 이유가 매우 유재원답다. 그는 등반 자체의 어려움이나 위험보다도 '심미적으로 에귀 베르뜨는 접근하기 힘들었다'고 등반기에서 밝혔다. 정상에서 절정에 오르는 카타르시스가 에귀 베르뜨라는 한 고봉을 등정했다는 기쁨보다 더 본질적이어서 가슴에 더 짙게 와닿았다는 것이다.
베르뜨 산행의 고백에서 이런 짐작을 할 수 있다. 유재원은 어떤 산을 오를 때 그 산에 어울리는 미적인 자격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의 산행이 내일의 산행을 위한 전체라면 산행은 어떤 연속성을 갖게 된다. 그 단계적 산행은 미의식의 상승작용을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등반고도를 '어떤 절대미'를 향해 나아가는 계단으로 파악하려 했던 유재원의 알피니즘이 여기서 한결 돋보인다.
4년간 샤모니에서 목숨 그 자체와 등가를 이루는 산행을 통해 서른의 나이가 갖는 자기해방을 몸부림치며 갈구할 때, 그는 어떤 에언자로서의 생텍쥐페리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재원은 생텍쥐페리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텍쥐페리적 인간이란 신을 받아들이기에 어울리는 신전을 쌓아가는 자이다. 생텍쥐페리적 인간으로서 유재원은 기도한다.

(저는 신전을 쌓고 있습니다. 그 산 속에서 살아주세요.
-기글리 산장의 방명록에서)

그런 기도을 받을 신의 자리에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를 세우고, 그때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한 기도의 영역으로 그는 산에 전전 생애를 내던진 것이다.
그이 선지자 생텍쥐페리는 신이 '대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것의 유일한 증거'라고 했다. 유재원이 그 가르침을 놓쳤을리 없다. 그래서 대답 없을 때를 대비한 깨끗한 정돈이었고 이사를 떠나는 사람의 홀가분한, 그러나 조금은 슬픈 웃음이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예견이라는 초능력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날 당시 그의 행동은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얽혀 사는 보통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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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다시 절망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퍼트레이의 서쪽 이노미나타(Pnta Inominata, 3,729미터)를 등반하다 악천후로 후퇴한 또 다른 이탈리아 팀이 알려주었다. 7월 27일, 그들은 콜 드 이노미나타 부근에서 프레네이 빙하 건너편에서 지르는 고함소리를 눈보라 속에서 가까스로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원은 정상을 올라선 후 그 반대편 프레네이 빙하 쪽으로 하강한 셈이다. 대체 어쩌자고? 그곳이야말로 '죽음의 벼랑'이다. 여러 곳이 오버행으로 되어 다음 하강지점을 찾기가 몹시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악천후 속에서라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8월 7일, 차양재 씨는 가이드 스테판 모라네와 함께 샤모니를 떠났다. 이탈리아 쿠르마이어에서 몬지노 산장을 향해 올랐다. 눈은 허리까지 빠졌다. 산장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떨어졌다. 프레네이 빙하 하단부에서 비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다시 눈 속을 헤집고 돌아오지 않는 친구에게로 나아갔다. 기진한 몸으로 콜 드 이노미나타에 닿았다. 그때가 오후 1시 30분, 그곳서 퍼트레이 서벽의 하강지점으로 가려면 프레네이 빙하를 건너야 했다. 빙하의 크레바스들이 거의 새로 내린 눈으로 덮여 있어 그 상태로는 건널 수가 없었다. 눈사태 위험도 아직 가시지 않았다. 콜에서 한 번 더 비박하기로 했다.
오후 4시, 이탈리아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의 구조대장은 그곳에서의 비박이 무의미하다고 충고했다. 오히려 또 다른 조난의 위험이 있다기에 차씨는 헬기를 타고 하산키로 했다. 차씨는 조종사에게 다시 한 번 서벽 쪽을 살펴보자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며 조종사는 투덜거렸지만, 차씨의 끈길긴 설득으로 못내 기수를 돌렸다. 헬기는 빙하 중간 부분부터 하강지점을 거슬러 올라갔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헬기가 벽으로 향한 머리 부분을 뒤로 돌리는 순간, 빨간 점 하나가 차씨의 눈에 빗살처럼 빨려들었다. 친구의 배낭이었다. 여러개 오버행 중, 단 하나만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 마지막 오버행만 내려서면 담 앙글레스 무인산장Biv. des Dames Anglaises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친구는 반쯤 눈으로 덮인 배낭만 달아두고 끝내 사라진 것이었다.
배낭 아래쪽의 프레네이 빙하로 추락한 것으로 판단하고, 쿠르마이어와 샤모니의 구조대 본부로 연락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합동 구조대는 눈사태 위험을 무릅쓰고 대원들을 빙하로 투입시켰다.

8일 오후 9시, 이탈리아 구조대 헬기가 쿠르마이어 병원 뜰에 내렸다. 차양재 씨는 뜰로 달려갔다. 친구가 뜰에 누워 있었다. 5년 전 함께 한국을 떠나와 이국 땅에서 울고 웃던 친구는 그를 영영 알아보지 못했다. 편안한 자세였다. 외상도 없었다. 마사오는 목뼈와 척추가 부러져 있었다.
8월 13일, 유해는 샤모니 가이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때마침 그곳에 들른 한국등산학교의 안광옥, 백경호, 이형삼 씨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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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의 유해는 배낭 아래쪽 20미터 지점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10미터, 마사오는 15미터쯤 눈 속에 묻혀 있었다. 그는 등반차림에 우모복을 껴입었고 마사오는 비박용 텐트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샤모니 최고의 가이드인 르네 드메종을 83년 8월 샤모니서 만나 유재원의 마지막 산행에 대해 물어보았다.
"두 사람이 북벽을 초등한 것 같지는 않다."
날씨가 악화된 날짜와 정상에 도달한 후 이탈리아 구조대에 구조를 요청한 시가으로 미루어, 유재원과 마사오는 북벽 등반 이틀째에 날씨가 흐려지자 동릉으로 우회(트레버스)한 것 같다고 드메종은 덧붙였다. 트래버스 예상지점 위로는 300미터의 거대한 오버행이 버티고 있어 등반하는 데 3~4일은 더 걸릴 루트이기에 나온 추측이었다.
84년 2월 샤모니의 어느 카페에서 나는 마사오의 클라이밍 동료였던 히로시를 만나보았다. 그 자리에서 히로시는 유해 검사 결과 그들은 숨진 지 열흘 이상 되었더라고 했다. 아울러 조난 요청 다음날인 7월 26일을 조난일로 추정했다. 조난 때의 차림으로 봐서 그는 대피 중 눈사태에 당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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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유재원의 '등산의 메카'라는 샤모니행은, 그러니까 성지순례와도 같은 성격을 띠었다. 주자학적 도그마 속에 갇혀 있던 18세기 조선조의 선비들이 연행사(燕行使)로 중국에 가서 놀란 눈으로 온갖 서양 문물을 보았듯, 그들은 샤모니서 새로운 무엇을 보았다. 홍대용, 박지원 등이 북경서 고증학과 서학을 접하고 실학에 눈떴듯, 재원은 샤모니서 알피니즘의 정수를 체험하며 당시 한국 산악계에서 물려받은 수직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고산병과 같은 어질머리였다.
72년 9월 7일부터 ENSA에서 받은 2주 과정 중 9일간 교육을 마친 한국훈련대는 몽블랑 등반에 나섰다. 원래 그들은 ENSA 수료 후 그랑드 조라스나 마터호른 북벽을 등반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되는 환상이었다. 국내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했던 동료들과 함께 수료했던 ENSA의 외국인 과정은 극히 초보적인 것에 불과했다. 가이드 과정이 교육 3년, 견습 2년으로 짜여 있었다. 그에 비해 그들의 교육은 2주 과정에 불과했다. 동료 학생들이 대개 인접해 있는 여러 유럽 국가에서 온 동네 아마추어들인 데는.... 국가대표다, 프로라는 자만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몽블랑의 에귀 디 구테 능선을 최종 훈련지로 택했다. 몽블랑을 오르는 여러 루트들 중 가장 쉬운 루트다. 독일인 중년부부와 함께 9월 24일 오후 1시경 몽블랑 정상에 섰다. 물론 태극기와 한국산악회 깃발을 들고 등정기념 촬영도 했다.

(...한 번의 실수는 약 3,500m 아래 양쪽 중 하난가 된다. 유재원 대원에게 불안정한 나를 부탁하고 한 발씩 완전하게 내딛기를 약 1시간, 드디어 우리는 하향의 능선을 확인하고 그곳이 몽블랑의 정상임을.... 대원 저마다 한 가지씩의 특기와 잘 꾸며진 협동체데, 그리고 천우신조의 기회가 삼위일테가 되어 어려운 등반에 성공하였다.... 수고한 대원을 위하여 김항원, 차양재, 유재원의 순으로 정상을 밟도록 하였다.....)

<山>지 72년 12월호에 실린 이 등반기는 당시 한국 산악계의 수준을 재는 바로미터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과 한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낮부끄러운 기록이다. 한국을 대표한 훈련대가 마무리 등반으로 몽블랑의 에귀 디 구테 루트를 오른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데이트 삼아 나선 남녀들과 부녀자 사이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기념촬영하며 울먹이는 연기를 하기에 재원은 너무 순진했다. 하물며, 당시 그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그랑드 조라스 북벽의 경우도, 날씨 좋은 날은 이름마저 없는 현지 산꾼들이 서너 팀씩 등반에 성공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유재원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는 샤모니서 울고 싶도록 부끄러운 우리 산악계의 현실을, 또 죽어버리고 싶도록 초라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10월 초 대원들은 모두 파리로 나왔다. 한국산악회의 경비 후원문제가 확실치 않았다. 한국산악회의 어느 관계자는 전적으로 자비부담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일보> 및 일부 장비업체에서의 도움을 받아 한국산악회는 서울-파리간 비행기표를 대원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표는 훈련이 끝날 때쯤 우편으로 부쳐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표는 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산악회에서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자비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았지만 유재원, 차양재, 김항원대원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파리로 나올 때 유재원의 수중에는 10프랑밖에 없었다고 한다. (최선웅 씨에게 쓴 편지에서) 몽블랑 등반기에서 불안한 자신을 유재원 대원에게 부탁하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던 김인섭 대장만 자비로 먼저 귀국했다.
세 대원은 경비를 마련코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조선일보> 주불특파원 신용석 씨의 도움으로 포도농장에서 포도 따는 잡일을 시작했다. 2개월간의 포도 따기 아르바이트로 김항원 대원은 비행기표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인섭 대장에 이어 두 번째로 몽블랑 정상을 밟았던 김 대원은 두 번째로 귀국했다.
유재원과 차양재 씨 집안은 모두 살 만했다. 그들이 연락을 취했다면 당장 돌아올 여비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집안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귀국이 지연되자, 외무부와 대한산악연맹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하게 된 한국산악회는 그들에게 송환령을 내렸다. 두 사람의 비행기 삯 1,200달러를 외한은행에 예치시켰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73년 9월까지는 1년 기한이던 여권이 살아있어 불법체류는 아니었다. 단지 한국산악회의 훈련대를 이탈한 허물만 쓰고 있었다.
관계당국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한 한국산악회는 73년 10월 외무부에 그들의 여권 연장을 불허하는 신청서를 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여권 만기를 넘기면서 이들은 무국적 불법체류자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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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6월, 유재원은 다시 샤모니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샤모니시장 모리스 엘조그의 도움으로 거주증명과 노동증명을 얻어냈다. 모리스 엘조그는 인류 최초로 8,000미터급 봉우리를 올ㄴ 프랑스 안나푸르나 원정대를 이끈 알피니스트다. 리오넬 테레이와 루이 아슈날, 그리고 가스통 레뷰파와 함께 정상에 직접 오른 그가 쓴 [성봉 안나푸르나 초등기]는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명저다.
이 무렵 몽블랑, 에귀 디 미디, 투르 롱드 북벽, 에귀 디 제앙, 에귀 디 비오나세이 북벽 등을 등반하고 재원은 샤를레 모제 공장에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가이드가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 겨울에는 실벵 쏘당을 만나 스키를 배운다.
74년 4월, 유재원은 여권기간 연장을 위해 파리의 한국 대사관으로 여권을 우송하지만 천만뜻밖으로 여권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여권 불소지자로 고발당하는 곤욕을 치른다. 노동증명과 거주증명이 끝나는 75년 1월 25일까지 여권을 돌려받지 못하면 증명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게 될 낭패에 빠진다. 그런 불안 속에서도 유재원은 74년 여름 에귀 디 아르장띠에르의 밀류빙하, 에귀 베르뜨 남벽의 윔퍼 꿀르와르 단독, 레 쿠르트 북동벽 단독, 그랑 샤르모그레퐁 단독 횡단등반 등에 성공하여 샤모니 산악계의 주목을 받는다. 샤모니의 신예 알피니스트로 급부상한 그는 74년 10월 프랑스 히말라야 원정대의 일원으로 선발된다. 하지만 여권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라인더에 손가락을 다치기도 한다.
75년, 노동허가증 연장에 실패한다. 여권문제가 계속 괴롭힌다. 하지만 띠띠 씨의 도움으로 75년 4월 29일 무기한 연장 가능한 노동증과 거주증명을 만든다. 그리고 직장을 실벵 쏘당의 식당으로 옮긴다. 쏘당의 식당 'Restrant Impossible'에서 일하며 그의 영화 시사회 일을 돕는다. 몽블랑 뒤 타퀼의 제르바슈티 꿀르와르 단독, 그레퐁 동벽 단독, 몽블랑의 에프롱 브렌바, 몽 모디 등을 그해 여름 등반한다. 이러한 산행을 밑천 삼아 가이드가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
그해 가을, 인도 히말라야의 눈 쿤봉 등반대원으로 선발되는 기회를 맞는다. 등반대장 실벵 쏘당이 동행하여 직접 파리의 한국 대사관까지 찾아가 유재원이 출국 가능하도록 협조를 구한다. 그러나 또 거절당한다. 유재원은 그 자리서 참다못해 기절하고 만다.
그 이듬해, 그러니까 76년 봄 차양재 씨마저 파리로 떠났다. 재원은 더욱 산행에 열중한다. 자신의 등반 소식과 알프스 등반 경향을 계속 <山>지로 송고하며, 경동고 산악부 후배에게 그런 정보를 빠짐없이 전해준다. 76년 6월 띠띠 씨가 여권이 없음에도 스위스 국경을 넘게 해줘 마터호른 훼른리릉을 단독등반하고 샤모니로 돌아온다. 이어 그랑 샤르모의 북벽 등반에 성공한다. 그러고는 크리스마스에 생택쥐페리와 [성체] 속에서 만난다. [성체]가 단숨에 유재원을 생택쥐페리적 인간으로 변모케 했을 리 없다. 재원에게는 샤모니 산행 4년이라는 기도시가니 있었다. 생텍쥐페리를 만나기 위한 그만의 수행방식이 바로 성채 같은 알프스의 산행이었다. 산행에 비친 어떤 상징의 그림자를 파악하고, 그의 정신은 마지막 해머질을 기다리는 무쇠처럼 달아 있었던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그에게 감각 뒤의 필연성을, 필연성 뒤의 질서를, 그리고 질서 뒤의 신을 읽도록 가르쳐주었다.
띠띠네 산장 르 샤모니아의 각 방들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 재원의 방 이름은 '비박'이었다. 비박이란 천막 없이 산이나 바위절벽에서 그냥 잔다는 뜻의 불어다. 순수 우리말로는 '한둔'이라 한다. 그 '비박'은 비박 자리만큼 좁은 방이었다. '비박'에서 비박하며 틈만 나면 산으로 나선 것이다. '비박'은 그의 밀실이었다. 그리고 하얀 산이 샤모니 사회의 광장임을, 그 광장으로 나가는 길이 바로 산행임을 알게 된다.
그의 밀실은 온갖 얘기와 산 추억으로 가득했다. 코스 개면도, 산사진 등이 벽에 가득 붙어 있었다. 하켄, 해머, 피켈, 바일, 자일등등의 등산장비가 동류별로, 제작된 나라별로 구분되어 빼곡하게 진열되었다. 그 모든 장비들은 늘 기름기를 먹어 아무 때고 광장으로 나설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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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모니에서 사람 사는 동네는 해발 1,000미터에 자리잡았고 최고봉 몽블랑의 높이는 4,807미터다. 따라서 샤모니 알프스의 수직 공간은 1,000에서 5,000으로 이어지는, 그 4,000미터 사이에 들어 있다. 그 4,000미터는 해발 2,500미터의 등고선에 의해 아래위 두 세계로 쪼개진다. 아래 세계는 푸름 일색이고 그 위는 흰 세계다. 그 아래쪽의 푸른 세계는 우리 땅의 산자락과 마찬가지다. 그곳엔 우리의 삶터와 똑같은 밀실이 있다.
푸른 세계 위에는 그들이 일요일이면 찾아가는 교회당의 첨탑과 어김없는 모양의 흰 세계가 놓여 있다. 바로 샤모니 산쟁이들의 광장이다. 그 광장에 등불을 밝히는 이가 가이드다. 유재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4년간 열심히 광장을 살핀 뒤 손에 쥔 시리게 가난한 열매였다. 프랑스 산악회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비가이드 그룹과 가이드 그룹이다. 프랑스 산악회장이었던 루시앙 데비를 필두로 피에르 알랭, 모리스 엘조그, 기도 모노, 로베로 포라가 등이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프랑스가 등산 선진 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후 안나푸르나, 마칼루, K2 등의 원정을 이끈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샤모니 가이드들의 활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랑스 산악계 내에서 가이드들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르망 사르레, 레뷰파, 테레이, 라슈날, 드메종, 셰놀, 마지오, 파요, 드부소, 지라디니 등의 샤모니 가이드들이 바로 뒤쪽 그룹을 대표한다. 샤모니뿐 아니라 알프스 전역의 무수한 난벽들이 이들에 의해 초등되었다.
샤모니 가이드들도 요즘은 몇 개의 분파로 갈라지고 있다. 국립등산학교 교수로 활약하는 가이드와 조합에 가입하지 않고 개인활동을 하는가이드들, 그리고 젊은 가이드 그룹 등이 있다. 이러한 파벌의식에 편성된 샤모니 가이드 사회의 기질은 무척 배탁적이다. 타지방이나 다른 나라 출신의 산꾼들이 발붙일 여지가 없다. 가이드 교육기간은 최소 5년이다. 이렇게 긴 교육기간은 뒷문제로 치고서도, 유재원은 아무리 등반 역량을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가이드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유재원 이전에 스즈키, 히로시, 가토, 야수오, 하세가와, 마사오등 많은 일본인들이 샤모니 가이드가 되려고 노력했으나,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유재원은 더욱 노력했지만, 샤모니 가이드 사회의 보수적인 벽은 다른 나라에서 온 한 개인이 뚫기에 너무도 두터웠다. 아직 동양인 샤모니 가이드는 한 명도 없다. 몇몇 일본인이 샤모니서 등산 안내자로 일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일본인 관광객이나 등산객을 상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유재원이 가이드가 되지 못한 것은 그의 기량이나 노력과 상관없는, 다시 말해 그의 산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가 진정으로 가이드해야 할 영역은 산이되 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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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가을, 재원은 실뱅 쏘당으로부터 낭가파르밧 원정대원으로 참가해다라는 요청을 받는다. 다시 한국 대사관에 여권 갱신을 의뢰하지만 거절당한다. 한국 대사관이란 그에게 거절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77년 초, 재원은 귀국을 결심한다. 가이드가 될 가능성마저 없는데다 해외등반마저 여권문제로 자꾸 좌절되자 "이번 여름 시즌만 보내고귀국하겠다"고 파리의 차양재 씨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귀국 선물을 결정해야 되었다. 히로시는 유재원이 뭘 귀국 선물로 할까 하고 고심하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크리스 하디에게도 그 얘기를 자주 했다. 5년 만의 귀국이다. 그는 자기 땅의 사람에게 무엇을 안기고 싶어했을까.
밀실 속에서만도 광장 속에서만도 살 수 없었던 그는 늘 밀실로서의 '비박'과 '하얀 산' 광장 사이를 오갔다. 남보다 일찍, 또 남보다 늦게 그 광장의 횃대에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지켜보던 유재원은 어느 날 좀 색다른 느낌으로 광장의 구석에, 그러나 가장 높이 걸린 횃대를 본다.
그 횃대가 광장의 그곳에 언제부터 놓여 있었는지 모를 만큼 오래되어 재원의 눈에도 익어 있었지만, 그 높고 어둔 모습 때문인지 누구도 그 횃대에 불을 밝히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른 새벽, 젖빛 두 손으로 불씨만 감싼 채 밀실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광장의 구석진 자리의 그 횃대를, 그곳 말로 한다면 바로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 북벽을 그 귀국 선물로 떠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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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검은 바윗덩어리'라는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가 무엇보다 보고 싶었다. 82년에서 84년 사이 몽블랑, 에귀 베르뜨의 윔퍼 꿀르와르, 에귀 디 미디 북벽의 프랑도 스퍼, 투르 롱드 북벽, 브렌바, 레 쿠르트 북벽, 마터호른 등 유재원의 발길이 닿은 곳을 따라 올라갔다. 고인의 영혼을 뒤집어쓰는 '빙의' 현상을 기대하며 띠띠네 집의 '비박'에서 지내기도 했다. 유럽에서 10개월을 지내기도 했다. 그럴수록 궁금해졌던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였다. 프롱 브렌바 등반 때 그 모습을 바라본 적은 있었지만, 어떤 의미를 가진 대상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83년 10월, 나는 혼자서 브렌바 아레트의 기글리 산장을 거쳐 퍼트레이 북벽 아래로 나아갔다. 유재원의 발자국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어둠 속의 브렌바 빙하를 건넜다. 어둠이 벗겨지며 퍼트레이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설악산 천화대 앞에 서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몽블랑에서 동남으로 공룡의 등허리처럼 들쭉날쭉한 암봉을 연이어 흘러내린 퍼트레이 능선의 모습은 영락없는 천화대였고, 그 가운데서 가장 우뚝한 퍼트레이는 바로 범봉의 모습이었다.
그 검은 암릉의 모습은 누군가가 무작정 그립고 왜 산에 가는지가 턱없이 궁금해졌던 어느 날, 봄 안개비 속에 길마저 잃고 천화대 능선에 홀로 섰을 때 눈앞에 범봉이 우뚝 나타났던 어느 설악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비바람 속에 외로이 서 있는 범봉을 본 그때, 흠뻑 젖은 온몸이 가슴속으로부터 뜨거워져오며 눈빗물로 온 얼굴이 범벅되며 터져나왔던 하나의 뜨거운 언어, 바로 그 '용서'라는 말이 퍼트레이 앞에 선 순간 다시 터져난온 것이다.
"용서하소서. 그대여 나를 용서하시게."
그때 나는 누구에겐지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용서의 대상이 산인지, 아니면 유재원의 한에 관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어떤 이별을 강요한 배신에 관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자 유재원이 그 많은 알프스의 침봉 중에 범봉과 영락없이 닮아 보이는 이 봉우리를 귀국 선물로 택한 뜻도 알게 되었다. 그 구석의 횃대에 불을 켜고자 떠난 유재원은 '.....나는 이 촛대를 세웠습니다'라는 [성체]의 기도대로 스스로를 눈보라 속에 하얀 성채의 촛대로 세우게 되었다. 온 세상을 지우는 7월의 눈 속에 어떤 절대의 음성이 두고 온 고향처럼 그리워, '검은 바윗덩어리'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가 하얀 불빛으로 눈부시게 타오르던 그날, 유재원이 눈보라 속에서 외친 그 마지막 목소리는?